[YS서거 1주기⑤]김덕룡과 함께 본 김영삼 정부 功過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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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서거 1주기⑤]김덕룡과 함께 본 김영삼 정부 功過는?
  • 최정아 기자
  • 승인 2016.11.21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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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청산 없었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없었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최정아 기자)

“이정현 대표님, 단식은 YS처럼 하는 겁니다.”
지난 10월 단식투쟁을 하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를 향해 이같은 질문이 쏟아졌을 즈음의 일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이 대표의 단식 소식과 함께,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회상하는 게시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중 단연 인기 있었던 게시물은 1983년 김 전 대통령이 가택연금을 당한 이후 단행한 23일간의 단식투쟁에 대한 것이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촉발되자 네티즌들의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회상은 더욱 짙어졌다. 네티즌들은 “IMF 사태라는 과(過)가 있었으나, 금융실명제, 하나회 청산 등 여러 업적으로 한국 민주주의 뿌리를 뒀던 인물” “오히려 과거 YS시절보다 민주주의가 후퇴됐다”라는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서거 이후에도 국민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될 만큼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사회에 큼직한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다. <시사오늘>은 YS가 남긴 여러 공(功)과 과(過)를 그의 최측근인 한나라당 김덕룡 전 원내대표와 함께 따라가 봤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시절 모습 ⓒ시사오늘

◇ 軍政의 패막…‘하나회’ 청산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 故김영삼 전 대통령, 2008년 11월 20일 우석대에서

YS는 역대 정치인 사상 가장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대통령으로 꼽힌다. ‘최연소 의원’ ‘최다 선(選) 기록’ ‘문민정부 첫 대통령’…. 만 26세 나이에 정치입문한 김 전 대통령은 3대 국회 이후 1992년까지 무려 아홉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문민정부 첫 대통령이란 찬사를 얻으며 다양한 개혁을 이어나갔다.

특히 ‘하나회 청산’은 김영삼 전 대통령 자신이 재임시절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던 부분이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로 만든 비밀사조직으로, 한국 군정(軍政)의 중심역할을 해왔다. 12.12 사태, 5.17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주도하며 ‘군사력’을 무기로 한국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해온 것이다.

때문에 오랜시간동안 군부세력의 통치 하에 있었던 한국에서 하나회를 해체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17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심지어 국방부 장관도 위협을 느껴, 늘 다녔던 공중목욕탕도 못 갔다”고 밝혔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YS는 1993년 3월, 취임 열이틀 만에 군내 최대 사조직 하나회의 핵심 회원이었던 김진영 육군 참모총장 등을 전격 교체했다. 한국 군부정치의 싹을 완전히 제거하고 향후 부활의 가능성도 모두 없앤 것이다.

김덕룡 전 원내대표는 하나회 청산이 민주주의의 초석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난 18일 <시사오늘>과 만난 자리에서 “하나회 청산을 못했으면, 군부가 계속해서 정치개입을 했을 것”이라며 “민주주의가 어려운 시기가 오면 군사 쿠데타 위협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국민들이 꼽는 YS 최고의 업적 ‘금융실명제’

“금융실명제는 이전 대통령들이 공약만 하고 실천하지 못했던 제도였다. 공직자 재산 등록 등 경제와 사회를 투명하게 하는 등 ‘클린 거버먼트’(clean government, 깨끗한 정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

‘금융실명제’는 김 전 대통령의 과감한 추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적(功績)이다. 또 이 제도는 국민들이 생각하는 YS 최고의 업적으로 꼽힌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국민을 대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 중 가장 잘한 것은 무엇인가’를 물은 결과, ‘금융실명제 실시’라는 응답이 34.2%로 가장 높았다.

당시 ‘금융실명제’는 마치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고 전해진다.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의 핵심부에서도 극소수만이 사전에 알았고, 철통보안속에 준비가 진행됐다. 심지어 최측근이었던 김덕룡 전 원내대표 또한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덕룡 전 원내대표는 이와관련, “심지어 최측근이었던 나도 몰랐다”며 “당시 내가 남미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나에게 김 전 대통령이 ‘외국에서야 소식을 듣겠네’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렇게 발표를 한 것이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 그는 “금융실명제 정책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가족에게 해외출장을 간다며 극비밀리에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45분,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가 발동됐다.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이 전격 시행된 것이다. 5공화국 시절 장영자 씨 어음 사기사건으로 금융실명제 실시 주장이 제기된 이후 11년 만이었다.

금융실명제의 힘은 상당했다. 1995년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에 걸려 구속된 것이다. 금융실명제가 실행되기 이전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70~80%를 육박했다.
김 전 원내대표는 이에 대해 “두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고 단죄한 것이 굉장한 역사적 교훈이라 생각한다”라며 “어떤 대통령도 응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밝혔다.

◇ 5% 최저 지지율 기록 ‘IMF 사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초래했다고 하지만 수습한 것도 김 대통령이다. 1997년 12월 39억 달러까지 떨어진 외환 보유액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할 때 185억 달러까지 늘어 기본 위기는 다 수습된 상태였다." -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사상 5%라는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그 전까지만 해도 ‘최악의 지지율(6%)’을 차지한 인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한국경제에 큰 충격을 준 ‘IMF 사태’를 기점으로 지지율이 급락한 것이다.

IMF 사태의 전조는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기점으로 나타났다. 같은 해 삼미그룹 부도와 기아자동차 도산, 쌍방울그룹, 해태그룹 등이 도미노처럼 위기를 맞은 것이다. 실제로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 원을 초과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1997년 11월, 금융?외환위기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김 전 대통령은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요청하게 된다.

이에 대해 김 전 원내대표는 “사실 그동안 쌓았던 경제정책, 관치금융부터 시작해, 재벌들이 싼 이자로 단기외자를 빌려다 무책임하게 투자했더 상황이었다”며 “당시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위기에 빠지도록 한 선진국도 비난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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