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울린 취업전쟁>캠퍼스 낭만?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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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울린 취업전쟁>캠퍼스 낭만? '헐'
  • 이해인 기자
  • 승인 2010.09.13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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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위해 졸업 미룬 ‘대학 둥지족’으로 재탄생(?)
고용시장 활발해졌다지만 대학생 체감도는 ‘글쎄’
새벽 6시. 대학을 5년째 다니고 있는 취업 준비생 박지원씨(가명·28·A대 신문방송학과)가 힘겹게 이불속에서 빠져나온다. 그는 졸업시점이 지났지만, 취업을 위해 졸업을 유예시킨 대학 5학년생이다.

10분 남짓 초스피드 샤워를 마치고 전자레인지에 즉석 죽을 돌리는 박씨. 김이 펄펄 나는 죽을 먹는 건지 마시는 건지 모르게 들이킨 뒤 헐레벌떡 가방을 집어들고 집을 나선다.

“토익수업에 늦었어요.” 박 씨가 있는 서울 신림동 자취방에서 학교까지는 지하철로 30~40분 거리. 어느 샌가 새벽에 쌀쌀한 기운이 돌면서 아침 문을 나서는 마음마저 쓸쓸해진다.

학교에 도착,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쏜살같이 강의실로 뛰어간다. 이른 아침인데도 토익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 안은 학생들로 빼곡하다. 학교 내에서 진행하는 토익 수업은 기존 사설 학원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끈다는게 박씨의 얘기다.

여러 번 반복해서 그런지 이미 알고 있던 것도 많지만 문제 풀이시 들어도 혼동되는 문제가 나오면 빨간 팬으로 다시한번 선을 긋고 기억을 상기시킨다.   

1시간 남짓 토익수업이 끝나자 박 씨는 바로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1층에 있는 멀티미디어실로 들어가 모니터 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면접에서 시사문제에 관해 의견을 묻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어서 매일 아침마다 뉴스를 봐요. 또 토론사이트에 접속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체크하는 것도 중요하죠.”

경제는 물론 정치와 연예까지 그날의 이슈를 꼼꼼히 살핀 뒤 구직 사이트로 페이지를 옮기는 박씨. 그는 벌써 많은 그룹에서 공채 모집을 시작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주면 지원서 접수가 끝나는 기업도 10곳이 넘는다고 한다.

“대학 2학년 때부터 큰 기업의 홍보팀에서 일하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근데 요즘은 한 곳이라도 걸렸으면 하는 심정에 자격만 되면 무조건 서류를 접수하죠.” 각 회사들의 채용 정보와 일정으로 빼곡한 그의 다이어리. 그는 작년부터 지금까지 쓴 이력서만 100통이 넘을 거라고 말한다.

요즘 일정 금액을 내고 졸업을 미룬 박 씨와 같은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다. 예전에는 편법으로 한 두 과목을 남겨 졸업을 미루던 것을 이제 학교 측에서 아예 졸업을 미루는 접수를 받을 정도다. 이에 따른 신조어도 생겨났다. 바로 ‘대학 둥지족’이다.

“아무래도 대학생 신분으로 있으면 대학생 인턴에도 지원할 수 있고 뭔가 안정적인 느낌이에요. 졸업했는데 바로 취직이 안 되면 불안하기도 하고 조바심이 나니까 많이들 졸업유예를 택하는 것 같아요”

정보수집(?)을 마친 박 씨는 이번엔 특별한 열람실로 향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살벌한 문구가 적힌 곳. 그 곳은 성적 등의 심사를 거쳐 뽑힌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특수독서실.
 
이 특별열람실은 고시촌을 연상시킬 정도로 온갖 잡동사니와 책들이 널려 있었다. 박 씨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오전에 들은 토익수업 복습을 시작했다.

엉덩이가 붙어 버린 줄 알았는데 12시쯤 되니 박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생식당으로 가 친구도 없이 혼자 2500원짜리 점심을 사먹는다.
 
“이달 시험에서 꼭 850점을 넘겨야 돼요” 밥을 먹는 동안에도 토익 단어장을 놓지 않는 박씨. 대기업의 경우 대부분 토익 800점은 넘어야 지원이 가능한데 요즘엔 만점자들도 많아 800점만으로는 모자라다고 걱정했다.

“취업 재수생이 될 줄은 몰랐어요. 나름대로 착실하게 대학생활을 해온 터라 졸업과 동시에 원하는 곳에 입사하는 신나는 꿈을 꾸었죠.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완전 바늘구멍 뚫기에요. 오죽하면 옛날에 20대 태반이 백수라던 ‘이태백’이란 말이 없어지고 20대의 90%가 백수라는 ‘이구백’란 신조어가 생겨났겠어요.”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채용 인원을 확대했다고는 하지만 지난 8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청년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층인 20~24세와 25~29세의 실업률이 소폭 상승했다.
 
또 2010년 졸업자의 실업률이 전년 동월대비 5.8% 포인트 가량 하락했지만 이는 IMF이후 취업 대란 때의 12%보다 조금 낮은 수치에 불과하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수치상으로 볼 때 아직까지 고용시장이 활발해 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설명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열람실로 향하는 박 씨. 오후에는 저녁에 있을 취업프로그램 준비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박 씨가 참석하는 취업스터디는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학생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하는 스터디도 많지만 취업난이 심각한 만큼 학교에서도 자체 취업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을 관리한다. 학교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자율 프로그램보다 체계적인 것이 특징이다.

취업프로그램은 요일별로 나눠 이력서·자기소개서 클리닉과 영어 면접 준비, 시사문제 토론 등으로 주로 진행되고 대기업 공채 일정이 발표되면 해당 기업 분석도 함께 한다.

“혼자 준비하다 보면 아무래도 놓치고 가는 정보도 많고 기업 분석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이 드는데 같은 고민을 가진 친구들끼리 모이니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학교에서 운영해 개인 스터디 그룹보다 체계적이고 학원보다 저렴해서 좋아요.”

사실 취업 준비생들을 괴롭히는 건 높은 입사 경쟁률만이 아니다. 취업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며 비용 등도 취업 준비생들을 옥죈다.

“그래도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여기서 무료로 영어면접 준비도 하고 이것저것 스터디도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학원비 등 취업준비 비용 때문에 자금난에 허덕여요. 한 달에 30~40만원은 기본이라 하더라고요.”

실제로 한 달에 토익학원비, 영어회화 학원비, 책값, 교통비, 식비 등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그는 심지어 면접을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학생도 있다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인상이 중요하다 보니 성형까지 감행하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코와 눈매부터 얼굴윤곽, 치아 미백까지 호감형 인상을 만드는데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 수천만원까지쓴다고 해요.”

그날 저녁. 취업 스터디가 이뤄지는 한 강의실에서 처음으로 박 씨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여기에 오면 마음이 편해져요. 이번엔 붙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랑 있어서 그런지 긴장도 풀리고요."

▲     ©시사오늘
일반 강의실보다 조금 작은 강의실에는 학생들이 옹기종기 그룹을 지어 앉아 있었다. 중얼중얼 무언가를 읽기도 하고, 서로 질문을 던지며 답이 틀리면 웃는 소리도 들렸다.

그 날은 영어면접 준비가 있었는지 외국인 강사와 함께 개인별 인터뷰가 이어졌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 차례가 아닌 학생들은 그룹을 만들어 시사스터디를 하는 등 짧은 시간도 헛되게 보내지 않는 등 한마디로 시간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취업프로그램이 끝나니 어느덧 밤 11시. 녹초가 된 몸을 끌고 그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출출했는지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몇 개 산 박 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기소개서 작성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취업정보 사이트에서 뽑은 자기소개서 항목을 보고 미리 자기소개서를 준비해요. 특히 공채 시즌이다 보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죠.”

자기소개서 작성을 마치자 침대에 눕는 박 씨. “성형할 돈은 없으니 피부라도 가꿔야죠.” 마스크 팩을 얼굴에 붙인 채 잠을 청한다. 그의 머리 맡 탁상시계는 벌써 새벽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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