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우, 온몸던져 민추협 사무실 ‘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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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 온몸던져 민추협 사무실 ‘수성’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05.27 14: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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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민추협 결성 과정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민추협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에서 조성된 야권의 결집과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민주산악회, 여기에 동교동계의 합류로 만들어낸 완성품이었다.
 
하지만 민추협이 결성돼, 열매를 맺기까지는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괴롭힘이 있었다. 민추협의 대표적 수난사로 대표되는 사무실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 때 일명 닭장차에 끌려가는 김영삼 ⓒ사진제공=김영삼

YS 단식투쟁 첫돌맞아 야권 결집할 ‘민추협’ 발족

 
김영삼(YS) 단식투쟁 1주년인 84년 5월 18일.

80년 정치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민추협이 발족하기에 이른다.

민추협은 이날 외교구락부에서 ‘민주화 투쟁 선언’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발족을 대내외에 알렸다.

민추협은 이후 6월 14일 결성식을 갖고 최고의결기구인 10인 운영 소위를 결성한다.

10인 소위는 김명윤 이민우 윤혁표 김동영 최형우(이상 상도동계) 조연하 김녹영 박종률 박성철 김윤식(이상 동교동계) 등으로 구성됐다.

민추협은 이후 5공정권에 항거하며 민주화투쟁을 이끌었고, 마침내 87년 노태우의 6·29 항복을 만들어낸 1등 공신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민추협을 향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집요하고 혹독했다. 특히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완전 무시한 행위로 비춰져 어려움이 많았다.

YS는 자서전에서 민추협 결성과 관련해 이렇게 회고했다.

“민추협을 만들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전두환 정권의 핍박으로 곤욕을 치르거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를 만나서 민추협 동참서명을 받으면 그 사람은 당장 어딘가로 불려갔다. 서명하기로 약속하고 해외로 나간 인물도 있었다. 내가 약속을 하고 찾아갔는데 어디론가 나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민추협 발기인 서명용지를 보면 먹으로 지운 명단이 상당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서명용지가 걸레가 되다시피 했을까.”

민추협은 사무실을 얻어 입주하는데도 파란이 많았다.

전두환 정권이 민추협의 활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서울 종로일대의 건물주들에게 사무실을 주지 말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84년 5월 말.

민추협 사무실을 구하기 위해 김명윤이 나섰다. 종로의 모빌딩 4층에 50평정도 쓸 수 있는 사무실이 있다는 말을 들은 김명윤.

“여기 사무실을 쓸 수 있소.”

“뭐하시게요. 우리는 사무용도로만 임대합니다.”

관리인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키가 큰 한 신사의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답했다.

“아, 사무실 용도입니다. 계약금은 얼마나 필요하죠.”

“가계약 하실 게 아니라면, 계약금 80만원입니다.”

김명윤은 그 자리에서 80만원을 내고 계약을 했다.

하지만 그날 밤 관리인이 직접 김명윤 집에 찾아와, “살려달라, 집에 처자식이 있다. 당신을 받으면 당장 나가라는 건물주의 명이 떨어졌다”며 애걸복걸했다.

결국 김명윤은 계약을 해지해 줄 수밖에 없었다.

최형우, 사무실 지키며 경비원 육탄전 벌이다 경찰에 연행

그 후 김명윤 이름으로는 계약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인권변호사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계약이 안된 것.

대타로 나선 인물이 상도동 금고지기 역할을 했던 홍인길이다.

84년 6월 초 민추협 사무실을 구하기 위해 홍인길은 관철동 일대를 뒤지고 다녔다.

서울 관철동 대왕빌딩 앞에 ‘임대문의’란 글귀를 보고 무작정 관리실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용도로 쓰시게요.”

“아, 예 연구단체를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조용한 사무실이 필요한데, 이  곳이 적합한 것 같아서요….”

“13층인데 괜찮겠습니까.”

홍인길은 연구단체를 만든다고 건물주를 속여, 이처럼 어렵사리 사무실을 얻었다.
사무실이라고는 하지만 12층 빌딩 옥상에 지어진 가건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건물주가 알아버렸다. 건물주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책상 의자 전화 등을 들어내고 사무실 출입문을 폐쇄시켜버렸다.

물론 이런 조치는 건물주의 뜻이 아니라 정보부의 뜻이었던 것.

민추협은 그해 7월 12일 민추협 사무실 개소식을 위해 출입문 자물쇠를 뜯어내고 들어가야 했다.

최형우는 별동대를 조직하고, 건물주가 집기를 감춰놓은 곳을 알아내, 김용각 백영기 박정태 등과 함께 사무실 내로 집기를 옮겨놓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야간에 건물주가 집기를 다시 들어내 치워버리고, 엘리베이터도 정지시키는 등 입주를 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를 했다.

이에 최형우는 아예 건물 사무실 자물쇠를 뜯고 들어가, 48시간 동안 진을 치고 있었다. 건물주가 다시 자물쇠를 못 걸어 잠그게 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최형우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건물주가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켰다. 집기는 지하에 쌓아 놓았는데 그걸 들고 사무실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별동대를 조직해 집기별로 담당자를 분담해 1층부터 13층까지 들고 뛰었다. 하지만 이를 제지하는 경비원과 경찰들과 육탄전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까지 됐다.”

이로 인해 민추협은 출범초기 약 두 달 동안은 텅 빈 사무실 바닥에 비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회의를 진행해야 해, 일명 ‘돗자리 회의’라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계속>
 
 
[민주화추진협의회 탄생하기까지는……]

“참여말라” DJ 메시지 묵살한 김상현 ‘일등공신’
 
김영삼의 단식투쟁 1주년을 기해 탄생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민추협은 민주산악회라는 굳건한 뿌리와 YS의 단식투쟁이라는 밑거름, 그리고 동교동계와의 연합을 통해 이뤄졌다.

민추협이 결성되기까지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괴롭힘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다. 이와는 별개로 민추협이 만들어지기까지 가장 큰 어려움은 상도동(YS)과 동교동(DJ)의 연대였다. 이들이 하나의 합작품(민추협)을 만들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민주화 추진협의회 개소식에 참석한 김영삼

특히 동교동쪽은 ‘선장(DJ)’이 없다며 민추협 참여를 놓고 내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박영록 김종완 박종태 등은 “선장이 없는 상태에서 김영삼에게 붙으면 조직이 와해된다”며 YS와의 연대를 결사반대했다. 반면 김상현 조연하 김녹영 박종률 등은 공동전선 구축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견 때문에 몇 개월간 논란이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체류 중 이었던 DJ는 “동교동계만의 독자노선을 만들라”며 YS와 연대를 반대했다.

하지만 DJ의 이러한 메시지는 제대로 먹혀들지 못했다. YS와의 연대를 강력히 주장한 김상현 때문이었다.

김상현은 오랜 정치경력을 통해 누구보다도 DJ를 위해 헌신해 온 정치인이다. 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했을 때나 80년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에도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갖은 악형과 고문을 당했다.

그런 김상현이 DJ 뜻에 따르지 않으면서 민추협을 만드는데 앞장선 것은 ‘민주화를 위한 신념’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그는 동교동 내부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민추협을 통한 민주세력의 결집이 시대의 대세라고 판단해 성심성의를 다했다.

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DJ가 ‘대통령 출마’를 위해 통일민주당을 뛰쳐나가 평화민주당을 만들었을 때도 김상현은 쫓아가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군정종식을 위한 ‘야권통합’에 온힘을 기울였다.

YS는 이에 대해 “그가 김대중과 나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야당의 정통성을 깨지 않으려는 정치인으로서의 충정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김상현도 “야권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연만으로 DJ를 따라갈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민추협’이 탄생하기까지 명칭 문제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김상현이 얼마나 민추협에 애정을 쏟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YS는 강력한 투쟁의사를 표출하면서 ‘민주구국투쟁 동지회’를 주장했다. 하지만 김상현은 “명칭에서부터 너무 강경하면 아무 것도 안된다. 행동은 확실히 하되 대외적인 것은 좀 온건해야 한다면서 ‘민주화 추진 간담회’로 명칭을 제의했다.

이에 YS의 최측근이었던 고(故) 김동영은 “목숨을 걸고 투쟁하자는데 무슨 간담회”고 이의를 제기, 결국 논란 끝에 채택한 명칭이 바로 ‘민주화추진협의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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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옥 2015-11-24 20:48:55
우리는 민추협에서 월간다리 윤형두사장그리고 오적사건과 민주전선 김용성 유정회의원 그리고 목요상변호사 신선호고흥 장인,감사원장한승헌변호사 그리고 부이장인 이협의원 그리고 월간다리 오연호기자 많은사람들과 민주산학회가 있다.민추협은 권노갑 김대중 후광선생의 방해는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우리는 민주대학을 설립했다.우리는 민주당 여의도 대하빌딩을 사무실을 계약하여 그깨 후광선생님고 9층에서 조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