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주역들③] 이현종 "6월항쟁 정신,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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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주역들③] 이현종 "6월항쟁 정신, 여전히 살아있다"
  • 송오미 기자
  • 승인 2017.06.18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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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
"건국대 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하루하루가 투쟁 연속"
"386 동지, 진보·보수 나뉘었지만 정치적으로 타락한 사람 없어"
"87년보다 더 커진 촛불광장, 열린 민주주의 무대로 진화"
"헌법은 우리 사회 기준, 30년 전 헌법 이제 업그레이드해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송오미 기자)

“그 당시에는 사회의 폭압적 상황들로 인해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느꼈다. ‘내 몸을 던져야 되겠다, 나만을 위한 삶은 살지 않겠다’라는 결심을 했다.”

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51)이 한 말이다. 이 위원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서강대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현재 문재인 정부 실세로 부상한 ‘386 운동권 세대’인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정책위의장, 이인영·우상호 의원, 최재성 전 의원,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등과 함께 학생운동 선봉에 서 있었다. 변화를 갈구하며 억압된 사회에 온몸으로 맞섰던 그는, 학내 시위 혐의와 전대협 주도 혐의로 수배를 당하며 도망자 신세를 겪기도 했다. 그로부터 30년 후, 20년 넘게 정치판을 누비며 ‘베테랑 정치부 기자’가 된 이 위원은 광화문 촛불광장에서 거대한 시민의 힘을 목격하게 된다. 6월 항쟁의 주역으로서, 민주주의 정권교체를 이뤄낸 촛불 집회 목격자이자 기록자로서, 두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궁금했다. 과거 학생운동을 함께했던 동지들에 대한 평가도 듣고 싶었다. 지난 6월 13일 선선한 바람이 불던 늦은 오후, 〈시사오늘〉은 서울 정동길 인근에서 이 위원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51)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서강대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현재 문재인 정부 실세로 부상한 ‘386 운동권 세대’인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정책위의장, 이인영·우상호 의원, 최재성 전 의원,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등과 함께 학생운동 선봉에 서 있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건국대 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

6월항쟁 당시 대부분의 시위투쟁을 이끌고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뭉친 그들은 독한 최루가스를 마셔가며 온몸으로 투쟁했다. 그때 보여준 희생과 헌신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6월항쟁 중심에 서 있었던 그에게 당시 분위기와 학생운동의 원동력을 물었다.

-1987년 6월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그때 주로 어떤 역할을 했나.

“그 당시 나는 학내 시위를 하다가 그해 5월 말에 수배된 상태였다. 그래서 6월 10일에 명동에는 못 가고 숨어서 도망 다니다가, 종로 쪽에서 시위만 촉발시키고 다시 바로 도망갔다. 6·29 선언 이후에는 (수배가) 잠시 풀렸었다. 그러다가 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대행을 맡고 있던 10월, 전대협 주도 혐의로 두 번째 수배가 됐다. 이때는 잡혔다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88년 4월에 출소했다.”

-직접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

“내가 ‘학원자율화조치’가 도입된 84년도에 입학을 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5·18 사진전이 열렸다. 그때 사진전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3학년이 됐을 때(1986년) 아주 친한 과 후배와 시위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후배가 제일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직사로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퍽’하고 쓰러졌다. 두개골이 다 깨졌다. 바로 세브란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머리에 쇠판을 씌우는 수술을 했다. 충격이 컸다.

뿐만 아니다. 건국대 사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그 당시에는 사회의 폭압적 상황들로 인해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느꼈다. ‘내 몸을 던져야 되겠다, 나만을 위한 삶은 살지 않겠다’라는 결심을 했다.”

-당시 유독 학생회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나.

“학생회 붐이 일어난 시기였다. 총학(총학생회) 선거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다. 현재 민주당 이인영 의원이 그 당시 고려대 회장, 우상호 의원이 연세대 회장,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가 서울대 회장을 맡았었다. 특히, 고려대가 학생운동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동원력, 조직력 등에서 서울대를 앞섰다. 그 당시 서울대는 파벌싸움이 매우 심했다. 그해 4월에는 나와 이인영, 우상호 등 각 대학 대표가 연대의 틀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한 자리에 모였다. 이게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시작이다. 이게 같은 해 8월 전대협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87년도는 학생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전환됐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운동권 몇몇 사람들의 선도 투쟁이 많았다. 그러다가 ‘우리만 해서는 안 되겠다, 일반 대중들도 할 수 있는 운동을 하자’는 움직임이 많이 생겼다.”

-86년도에 신민당 돌풍이 불었다. 신민당과 학생들은 어떻게 협력해서 정권에 대항했나.

“본격적인 연대의 틀을 제공해준 게 ‘87년 직선제 개헌’이었다. 이를 연결고리로 해서 6월항쟁 당시 구심점 역할을 했던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만들어졌고, 정당, 사회단체,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6월항쟁으로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인 6·29선언을 이끌어냈는데, 그 다음에 YS(김영삼)와 DJ(김대중)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 때 심정이 어땠나. 

“도망 다니다가 TV로 노태우 당선을 봤는데, 정말 절망감을 많이 느꼈다. 그렇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당시 상황을 많이 의식해서 그런지 북방정책, 한중수교 등 전향적인 조치들을 많이 취했다. 노태우가 죽으면 그에 대한 재평가가 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이 위원은 "지금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태년·이인영·임종석·양정철·우상호·최재성 등은 그 당시 ‘민주화’라는 공통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이다. 물론, 지금은 진보진영으로 간 친구, 보수진영으로 간 친구로 노선이 나뉘기는 했지만,‘그때 우리가 함께 했다’라는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아직 정치적으로 타락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386 동지, 진보·보수 나뉘었지만 정치적 타락자 없어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주요 인물들은 30년이 지난 지금, 제도권 정치에 입문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19대 대선 정국 때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우상호 의원은 6월항쟁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자 전대협 1기 부의장으로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이끌었다. 3선의 이인영 의원은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초대의장을 맡으며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했다. 한양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았던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도 정국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태년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경희대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전대협 1기로 활동했고, 문 대통령 최측근으로 꼽히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도 한국외대 재학시절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전력이 있다. 6월항쟁 당시 이들과 함께했던 그가, 이제 그들을 기록하는 ‘정치부 기자’가 되어 옛 동지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그 당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 항쟁을 함께 벌였던 동지들이 정계에 대거 진출해 있다. 그 분들은 그 때 가졌던 가치와 마음가짐을 여전히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보나.

“지금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태년·이인영·임종석·양정철·우상호·최재성 등은 그 당시 ‘민주화’라는 공통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이다. 물론, 지금은 진보진영으로 간 친구, 보수진영으로 간 친구로 노선이 나뉘기는 했지만, ‘그때 우리가 함께 했다’라는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아직 정치적으로 타락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물론 노선은 서로 다르지만, 여전히 그 친구들 나름대로 본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려고 하고 있다. 자신들의 토대가 6월항쟁이라는 국민의 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걸 못 벗어나는 거 같다.”

-정치적 노선이 왜 달라졌다고 보나.

“인영이나 상호형 같은 경우는 바로 재야(在野)로 뛰어든 경우다. 바로 재야로 간 친구들은 너무 한쪽으로만 편향됐다고 할까. 사실, 가끔 만나면 다투기도 한다. 나는 정책을 구상할 때 보수도 끌어안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너무 진보적인 가치만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당시에 가졌던 가치와 목표가 바뀐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가치의 범위가 확장됐다고 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대통령, 재벌총수부터 일반사람들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현실 정치판을 많이 경험했다. 그러다보니 좀 더 현실적인 부분을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DJ 정부 시절에 북한에 몇 번 갔는데, 북한 주민들의 실생활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다. 그 이후로 북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북한에 대해서 마냥 우리가 애정만을 가질 수 없고, 현실을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주사파(NL) 김영환 씨가 북한을 다녀온 다음에 전향을 했는데, 그게 이해가 되더라. 그런 면에서 남북관계와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나와 그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민주당 김태년 정책위의장과 가끔씩 만나면, 내가 ‘지금은 민주당이 인기가 많지만 결국 이 인기가 얼마나 갈 것인가, 국민 전체를 끌어안아야 된다’라고 조언한다. 최근에 만났을 때는 ‘최저임금 1만 원’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최저임금 1만 원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주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소상공인도 민주당 지지자고 아르바이트생도 민주당 지지자인데, 1만 원이라는 가치에만 매몰돼서는 안 된다. 줄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은 안 되는데 자꾸 주라고 하면, 아르바이트생을 해고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최저임금 1만 원이라는 이상적 가치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게 현실화됐을 때 피해를 보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인지까지 고민을 해야 한다. 즉, 정치를 너무 이상적으로 수요자 입장에서만 하다보면 한쪽으로 왜곡될 수 있다.

그래도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겪고 나서부터는 많이 나아졌다. 일각에서는 386 정치인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지만, 예전보다는 현실적인 능력을 갖추게 됐다고 본다.”

-6월항쟁 당시 아쉬웠던 점은 없나.

“정치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학생운동이 학교별로 편차가 크고 제대로 조직화 돼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게 아쉬웠다. 성숙도가 덜 했다. 또, PD(민중민주주의), NL(민족해방), CA(제헌의회) 간 노선 싸움이 많아서 내부 분열이 심했다.”

▲ 이 위원은 "6월항쟁은 제도적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계기였다. 다만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다 보니, 이제는 맞지 않는 옷이 돼버렸다는 생각이 든다"며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올해가 6월항쟁 30주년이다. 2017년에 생각하는 6월 항쟁의 의미는.

“6월항쟁은 제도적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계기였다.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담아낸 ‘87년 헌법’이 우리나라 첫 민주주의 헌법이지 않나. 응축적인 산업화에 이어서 응축적인 민주화를 이뤄낸 좋은 헌법이었다고 본다. 다만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다 보니, 이제는 맞지 않는 옷이 돼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87년보다 더 커진 촛불광장, 열린 민주주의 무대로 진화

작년 대한민국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분노했고, 그 분노는 국민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게 했다. 촛불집회 관찰자이자 6월 항쟁의 주역인 그에게,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물었다.

-6월항쟁과 촛불집회가 닮은 듯 다른 것 같다.

“우선 차이점은 6월항쟁 때는 경찰들이 최루탄 쏘고 바로 잡아가고 하니까 국민들이 많이 참여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광장’은 어린애부터 할아버지까지 누구나 나올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때의 명동, 시청 앞 광장은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만 나와서 시위를 했다면, 지금은 모든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민주주의 광장이 만들어졌다. 촛불집회 에너지는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에너지다. 민주적 의식의 발전이라고 본다.

공통점은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다. 6월항쟁과 촛불집회 모두 민주주의가 한계점에 도달한 상황에서 국민들 스스로 돌파구를 만들어낸 것이라 본다. 중동에서는 자스민 혁명으로, 프랑스는 선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우리에게는 촛불집회라는 질서정연한 투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질서를 유지하면서 투쟁을 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당시 ‘직선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제도적인 것을 얻었다면, 30년이 지난 지금은 ‘촛불집회’를 통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보나.

“실질적 민주주의는 지금부터다. 문재인 대통령이 잘할 거라고 보지만, 걱정스러운 대목도 몇 가지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보수와 안보에 대한 뿌리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수와 함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많이 고민해야 한다.

내년에 헌법 개정 작업을 할 텐데, 그 속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기본권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헌법 전문에 5·18을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 등이 제도적으로 결정되지 않겠나.”

▲ 이 위원은 "문 대통령은 이제부터 정책적·정치적으로도 정말 현실을 냉혹하게 봐야한다. 80% 지지율을 잊어버리고 정말 내 것을 내어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지 않으면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헌법은 우리 사회의 기준, 30년 전 헌법 이제 업그레이드해야

30년 전 대한민국은 ‘직선제 개헌’을, 2017년 대한민국은 ‘정권교체’라는 결과물을 쟁취했다. 그러나 이 위원은 이 성과가 지속가능하려면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취임 두 달 째로 접어드는 문 대통령에게 정책적·정치적으로 냉혹하게 현실을 봐야한다고 주문했다.

-촛불집회에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보나.

“그런 목소리가 있었다고 본다. 물론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촛불집회로 통해 얻은 성과가 지속가능해야 한다. 국민들이 매번 광장에 나와서 시위를 할 수는 없지 않나. 

헌법은 우리 사회의 하나의 기준이다. 30년 전 기준을 이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5년 단임 대통령제를 하게 됐는데, 지금 보니까 반대투쟁의 무한 반복 같다. 정권을 잡지 못한 세력들은 끊임없이 반대투쟁을 하고, 결국 정권을 뒤집고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다보니까 정치적으로 발전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개헌의 방향성은.

“고려해야 할 게 많지만, 핵심은 권력구조 개편이다. 내각제를 한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제 하에서는 일단 대통령이 당선되면 탄핵 외에는 국민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내각제는 유연하다. 언제든지 문제가 생기면 바꿀 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내각제가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을 더 잘 반영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가령,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경우에도, 내각제였다면 그냥 국회를 해산시켜서 바꿔버렸으면 됐을 거다. 탄핵을 하다보니까 사회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됐다. 일본 같은 경우는 문제 생기면 내각을 해산시키고, 다시 구성한다. 국민들의 여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원집정부제도 생각해볼만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대통령은 직접 뽑아야 된다는 의식이 있고, 남북대치 상황이니까 외교국방은 대통령에게 맡기고, 총리가 국내정치를 담당하게 할 수 있다.

선거구제 개편도 같이 해야 한다. 소선거구제에서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지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매일 돌아다니면서 인사해야 되는 시장, 구청장이랑 똑같은 처지다. 의원들의 역할은 좀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다. 구청장이나 이런 사람들은 지역 일을 보고, 의원들은 나라 전체 일을 돌봐야 한다. 그런데 지금 보면 의원들이 지역구에 매여가지고, 국정 운영에 대한 공부를 안 한다. 내가 예전에 한 방송국 라디오 토론 방송을 일 년 가까이 했는데, 그때 전체 국회의원 절반가량이 출연했다. 함께 방송을 해보면 토론이 되는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기본적으로 국회의원 수준이 외국 국회의원들과 차이가 많이 난다. 외국 의원들은 자기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다.”

-문재인 정부 출범 한 달이 지나고 있다. 중간평가와 개선할 부분은.

“문 대통령은 굉장히 영혼이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다. 문 대통령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을 갖고, 실천은 상인적 감각을 가져라’는 말이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다. 문 대통령은 서생적 문제의식은 굉장히 많은 사람이지만, 행동은 상인적이지 않고 서생적이다.

지금 문 대통령이 굉장히 소탈하고 소통도 잘하고, 서민적이고, 자기를 낮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좋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 왜 미국 시민들이 문제가 많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겠나. 국민들 입장에서는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까, 국민들 먹여살려주고, 직장 갖게 해주고, 잘 살게 해달라’고 해서 뽑은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문 대통령이 조금 걱정되기는 한다.

문 대통령은 정치를 오래한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타협을 하고,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는 미숙한 면이 있다. 지금 취임 한 달 정도 됐다. 지지율이 높고 잘 하는 것 같지만, 이제 국민들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확인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부터 대통령의 정책을 보고, 성과물을 보기 시작한다. 단기적으로 성과를 못 내면 바로 반박이 들어오기 시작할 거다.

자유한국당이 매우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데, 보듬으려면 문 대통령이 뭔가를 좀 줘야 한다. 한국당이 명분을 쌓을 수 있는 카드를 문 대통령이 만들어야 한다. 한국당이 주장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공약들을 문 대통령이 가져오거나, 보수층 인사들을 기용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 유능한 정치인은 선물을 준비한다. YS와 DJ는 상대방에게 뭘 줄 건지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로 거래를 하고 타협을 하고 명분을 살려줬다.

문 대통령은 이제부터 정책적·정치적으로도 정말 현실을 냉혹하게 봐야한다. 80% 지지율을 잊어버리고 정말 내 것을 내어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지 않으면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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