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춘, ‘대권 돌풍’ 이끌까
스크롤 이동 상태바
김영춘, ‘대권 돌풍’ 이끌까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0.10.20 0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손학규 삼고초려…민주 지역당 색깔 바꿀까 초미의 관심
재선출신의 원외인사인 김영춘 전 의원이 민주당 최고위원에 지명됐다. 김 전 의원이 민주당 최고위원이 됨으로써 당내 갈등을 불러왔다.
 
6·2 지방선거 때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나섰던 김정길 전 의원은 “하필이면 3당합당에 동참하는 등 영남 개혁 세력의 정서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사람을 ‘제2의 노무현’ 운운하며 영남지역 대표주자로 세웠다”며 “이는 3당합당에 반대하고 20년 넘게 민주당의 정체성을 지키며 지역주의와 싸워 온 고(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과 나의 정치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민주당 내부의 비판과는 달리 국민여론은 정반대를 달리고 있다. 지난 7일 한 여론 조사 기관이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손 대표의 지지율은 야권주자 중 1위를 차지했다. 손 대표는 37%의 지지율로 정동영(11.9%), 유시민(11.7%) 등을 제치로 선두를 내달렸다. 손 대표의 지지율 상승은 김 전 의원의 최고위원 지명에 대한 지지로 볼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렇다면 국민여론은 김 전 의원의 최고위원 지명에 대해 왜 지지를 보내는 것일까. 이유는 민주당 내부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호남당’이기 때문이다. 40여년간을 지탱해온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국민의 바람이 김 전 의원의 최고위원직 지명에 찬성을 보내고 있고, 결국 이는 손 대표의 지지율 상승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것.

김영춘 전 의원의 최고위원 등극이 민주당의 지역당 색채를 바꿀 수 있을까? 김영춘 최고위원의 지난 온 정치행보를 볼 때 가능하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평가다.
 
 
끝없는 정치실험자 ‘김영춘’


김 최고위원 내정자의 정치시작은 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덕룡(DR) 현 대통령 국민특보의 추천을 받아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실 비서로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그는 정치사에 첫 대통령을 만든 ‘상도동 사단’의 주역이 돼 , 정치권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런 정치 입문과정으로 인해, 그는 확실한 자신의 보스가 있었다. 그의 보스는 DR이었다.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과 함께 DR의 ‘오른팔’ 혹은 ‘왼팔’로 불렸다.

김 내정자는 2003년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보스를 버렸다.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그의 탈당시점은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 받기 이전 일이다. 그의 지역구는 서울 광진 갑구다. ‘한나라당’ 간판 없이는 총선에서 승리가 힘들어 보였다.

때문에 그의 탈당을 놓고 ‘왜’라는 의문부호가 따랐다. 그는 탈당을 선택함으로써 당선을 가능케 할 거대야당의 꼬리표를 떼버린 것이다. 때문에 그를 정치권에선 ‘정치실험자’라고 불렀다.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 그의 첫 번째 ‘정치실험’이었던 것.

이부영 이우재 김부겸 안영근 등과 함께 동반 탈당해 한때 이들을 ‘독수리 5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김 내정자의 선택은 이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김 내정자를 제외한 이들은 한나라당 내 계파나 계보가 없어 탈당에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김 내정자는 그렇지 못하다. 확실한 자신의 ‘보스’와 ‘계파’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사에서 확실한 계보를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 그에 대한 기득권을 버리고 탈당한 예는 거의 없다. 그의 첫 번째 정치실험은 한국정치의 ‘계보정치’를 끊자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성공적이었다. 김 내정자는 재선배지를 달았다.

그가 선택하고 만든 열린우리당 구성원의 주류는 호남인맥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당내에서 ‘홀로서기’가 불가능하다는 평가였다. 때문에 그가 열린우리당 최대주주였던 정동영 의장 당시,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이력 때문에 ‘정동영 사람’으로 분류됐다.

2006년 2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김 최고위원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당 의장에 도전했다. 정동영 전 장관은 전대를 앞두고 당시 김 의원에게 ‘SOS’를 보냈다. 정 전 장관은 “도와 달라”며 김 의원에게 부탁했다. 
 


김 내정자는 거절했다. ‘떨어지려고 작정했냐’는 물음에 “힘센 사람잡고 지도부에 입성한 들 무슨 소리를 낼 수 있겠냐. 이건 내가 말하는 40대 기수론이 아니다”고 역설했다. 그는 전당대회에서도 홀로서기를 감행했다. 전당대회에 출마한 다른 40대 주자들이 합종연횡의 틀을 짜 표를 늘리려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결국 8명 중 7위로 낙선했다. 그의 두 번째 정치실험이었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실패와 함께 열린우리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후에 김 최고위원은 열린우리당의 실패에 대해 이렇게 역설한 적이 있다.

“열린우리당이 실패한 원인은 두 가지다. 열린우리당 스스로가 정체성이 결여돼 있었다. 정치를 하는 선상에서 특히, 집권당이고 집권세력이라면 지역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이지 나라전체를 경영하고 ‘발전시킨다’,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라는 목적에서 보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지역주의를 극복했다는 것에 다른 모든 것을 정당화 시킬 수는 없다. 그 평가는 국민들이 더 냉정하게 하는 것이다.”

김 내정자는 대선을 앞두고 ‘문국현 캠프’로 갔다. 세 번째 정치실험을 감행했다. ‘김민석 학습효과’로 인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문국현과 함께 새로운 정치마당을 열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실패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는 당시 열린우리당으로부터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았지만 민주개혁세력 통합을 끝내 거부, 135만8428표(5.8%)의 지지율을 얻는데 그쳤다. 이후 창조한국당은 대선 비용을 둘러싼 극심한 내홍에 휩싸였고 김 내정자와 창조한국당 창당 멤버인 정범구 당시 최고위원 등이 집단 반발하며 사실상 사면초가에 빠졌다.

김 내정자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할 당시 “열린우리당은 실패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며 “이벤트 정치가 아닌 책임정치를 위해 18대 총선 때 불출마 할 것”이라고 밝혔던 것처럼 그는 스스로의 기득권을 포기했다.

김 내정자는 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면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여러분 곁에서 더 채우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적당히 저 자신을 속이고 입에 발린 소리로 세상을 속여 국회의원이라는 권력적 직업을 유지해 본들 그것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것이 제 내면으로부터의 소리였다”며 “하늘의 도를 깨우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수도자처럼 이 엄혹한 세계화시대, 큰 나라들 틈바구니 속에서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우리나라 국민들이 존엄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략을 찾아 궁구의 길을 떠나고자 한다. 언젠가 그 해답을 발견했을 때 정치인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라고 말하며 자전거 일주를 통한 민심 챙기기에 나섰다.

그런 그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민주당에 복귀하며 2년여 동안 발견한 해답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려고 정치권 전면에 나섰다. 과연 김 내정자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시장우월주의와 경쟁 일변도인 한국 사회에 정치적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까.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과거에 대한 반성과 희생의 번제물로 삼아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겠다던 김영춘 민주당 최고위원 내정자. 그의 네 번째 정치실험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까. 이제 김영춘 최고위원 내정자가 답할 차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