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김중위 “3당 합당 때부터 ‘포스트 노태우’는 Y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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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散策] 김중위 “3당 합당 때부터 ‘포스트 노태우’는 YS였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7.09.17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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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김대중·김종필 리더십은 3人3色
1992년 대선, YS는 TV토론 어려워 해
사드·전술핵, 필요하면 배치하는 것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김중위/정리=김병묵 기자 정진호 기자)

대한민국 현대정치사는 파란만장(波瀾萬丈) 그 자체였다. 군부독재(軍部獨裁)와 민주화투쟁(民主化鬪爭)이 낳은 수많은 영웅들, 그리고 그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은 유례없이 역동적인 정치사를 만들어냈다. 나 역시 영욕(榮辱)의 현대사에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함께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아무쪼록 내 회고(回顧)가 격동(激動)의 현대사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9월 14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시사오늘〉과 만났다.

▲ 〈사상계〉로 갔던 것이나 유 박사 보좌관 일을 했던 것, 민정당에 입당한 것은 모두 ‘사람’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 시사오늘 윤지원

“사상계에서 민정당으로…사람과의 인연 때문”

사람들은 〈사상계〉 편집장과 유진오 박사 보좌관을 지낸 내가 어떻게 민정당에 가게 됐는지 궁금해 한다. 혹자는 나를 ‘변절자’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사상계〉로 갔던 것이나 유 박사 보좌관 일을 했던 것, 민정당에 입당한 것은 모두 ‘사람’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한일 협정을 체결하려고 했을 때, 야당은 이에 반대하며 모두 의원직을 내놓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쪽과, 국회로 들어가서 싸우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다. 끝내 야당이 둘로 쪼개졌다. 사퇴를 주장한 쪽이 윤보선의 신한당, 국회로 돌아간 쪽이 박순천의 민중당이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와중이라 그랬는지, 민중당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광고를 냈다. 전문위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정치에 뜻이 있었던 나도 자연스럽게 시험에 응시하게 됐다. 그 시험관 중 한 사람이 바로 장준하 선생이었다. 그렇게 선생을 만나 〈사상계〉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유진오 박사 보좌관으로 가게 된 이유도 비슷하다. 유 박사는 고려대 총장 출신이다. 그런 그가 대통령 후보로 민중당에 입당하면서, 고려대 후배 중 보좌관을 할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내가 고려대 출신이니까, 학교 선배들이 나를 추천해 유 박사 보좌관으로 들어가게 됐다.

민정당 입당은 이재형 대표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정초에 세배를 갔더니, 대뜸 ‘내일 나하고 지방 같이 가 보자’고 했다. 그날이 민정당 광주지부 창당대회를 하던 날이었다. 그래서 같이 내려가는 길에, 이 대표가 ‘광주 창당대회에서는 무슨 말을 하면 좋겠나’ 물었다. 내가 ‘역사의 흐름에 동참했을 때 발전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얘기하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는데, 정말 그대로 연설을 하는 거다. 그러고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자네, 학교 강의는 그대로 하더라도 당에 와서 나를 좀 도와줄 수 없겠어?’라고 권유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민정당 정무위원으로 가게 됐다.

입당할 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총무국장이 김충휘라는 사람이었는데, 내 임명장을 갖고 권정달 사무총장에게 가니까 사인을 안 해줬다. 아마 〈사상계〉 편집장을 하고, 유진오 박사 보좌관도 했으니까 ‘우리 당이랑 안 맞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김 국장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이 대표는 왜 임명이 안 되냐고 닦달하고, 권 총장은 사인을 안 해주니까. 결국 김 국장이 권 총장 화장실까지 쫓아가서 사인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렇게 〈사상계〉와 유진오 박사, 민정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 원래 나는 YS와 상당히 먼 사이였다. 시작부터가 좋지 않았다 ⓒ 시사오늘 윤지원

“YS가 나를 왜 불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원래 나는 YS와 상당히 먼 사이였다. 시작부터가 좋지 않았다. 3당 합당 직후 있었던 시당위원장 선거에서 승리한 뒤, 내가 YS를 직격했기 때문이다. 신임위원장 당선 후 ‘YS가 내각제를 하기로 합의했다고 들었는데, 그것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대통령만 노리느냐. 시도도 안 해보고 손쉽게 지도자가 되려고 하느냐’ 이렇게 일갈했다. 언론에서 ‘YS가 얼굴에 3도 화상을 입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당연히 YS가 불쾌하게 생각했고, 당에서도 난리가 났다. 결국 내가 시도위원장을 그만뒀다. 나 때문에 노태우 대통령이 굉장히 궁지에 몰렸던 모양이다.

그때 YS는 사실상 차기 대선 후보로 낙점을 받은 상태였다. 머릿수는 민정계가 많았지만, ‘포스트 노태우’로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었다. 박태준 의원이 욕심을 냈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시에는 다들 ‘노태우 다음은 YS다’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이종찬 의원을 도왔지만, 정말 그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YS 다음을 노리라는 거였지. 대부분 이런 생각에 다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YS는 군부독재를 했던 당과 손을 잡았으니 자꾸 다른 명분을 찾지만, 이미 합당을 하면서부터 YS에게 당을 실질적으로 맡긴 것이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일로 YS와 굉장히 소원해져 있었다. 대통령 후보 경선 때도 다른 사람을 도와줬으니. 그런데 YS가 대통령 후보로 선임되자마자 비서실장이었던 최창윤에게 연락이 왔다. 저녁을 먹자는 거였다. 그래서 레스토랑에서 최 실장을 만났는데, 식사 후 ‘YS가 김 선배 오라는데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묻는 거다. 정말 의외였다. 나는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어쨌든 대통령 후보가 오라는 데 어쩌겠나. 그래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튿날 아침에 YS가 직접 전화를 했다. ‘김 의원, 난데. 어제 말 들었제? 온나’ 이게 전부였다.

그렇게 YS와 함께 일하게 됐다. YS와도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그는 TV토론을 제일 꺼려했다. 한 번은 나한테 같이 갈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조그만 2층 빌딩으로 올라갔다. 거기가 TV토론 연습실이었다. 김현철 씨, 이성헌 씨와 TV 몇 개를 놓고 연습을 하는데, 잘 안 됐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DJ는 말을 잘 하니까. 게다가 당시 영국 수상이 마가렛 대처였는데, 대처가 YS랑 통화를 하면서 ‘이기는 선거에서 왜 토론을 하나’라는 식으로 말을 했던 모양이다. 이 선거는 분명히 내가 이기는 선거니까 토론을 해서 점수를 깎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게 YS가 ‘어떻게 좀 TV토론을 파투 낼 수 없겠나’ 하기에 내가 뭉그적거리면서 이리핑계 저리핑계 대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TV토론 없이 대선을 치렀다.

YS 당선 후에는 내가 정부조직개편을 했다. YS를 만나서 ‘새 집에 들어가려면 도배도 하고 집수리도 하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YS가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래서 ‘장관을 임명하고 나면 정부조직 개편을 못 한다, 이미 지시해 놓으셨겠지만 제가 의견을 하나 드릴까요’ 물었더니 그러라고 했다. 그래서 혼자 아무도 모르게 체육부랑 동자부(동력자원부) 없애는 작업을 했다.

또 ‘정부각료를 다 마련하셨습니까’ 물었더니 ‘한 번 가져와 봐’ 하더라. 그래서 도표에 몇 사람 이름을 넣어서 줬다. 당시에는 실제로 내각에 들어간 사람이 없었는데, 나중에는 그 명단에 있던 사람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강경식 장관이다. 사실 강 장관은 좀 아깝다. 내가 강 장관을 경제부처장으로 추천했는데, IMF 나기 직전에야 임명했다. 강 장관은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지 수습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썼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 DJ가 저항권적 차원에서 낙천·낙선운동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낙천·낙선운동은 선거법 위반이다. 저항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 시사오늘 윤지원

“박원순 낙선운동이 내 정치인생에 마침표 찍어”

내 정치인생은 제16대 총선으로 마감됐다. 제16대 총선은 DJ 집권 기간이었다. 그때 낙천·낙선운동이 한창이었다. DJ가 저항권적 차원에서 낙천·낙선운동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낙천·낙선운동은 선거법 위반이다. 저항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박원순이 내 선거구에 와서 캠프를 차리고 낙천·낙선운동을 했다. 내가 원래 성당을 나가는데, 아침에 가보니까 의자 뒤에 ‘바꾸자 바꾸자’ 스티커를 쫙 붙여놓은 거다. 자전거 부대까지 동원해서 온 동네를 누비는데, 도저히 커버가 안 됐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아, 이번 선거는 안 되는 거구나’ 생각했다.

박원순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던 것 같다. 우선 내가 정치자금법 위반에 걸려 있었다. 내가 5000만 원을 받고 이부영 의원이 3000만 원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그건 지금도 왜 그렇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나한테 돈을 줬다는 사람이 출소한 뒤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빌었다. 수사관이 뒷짐을 지고 손가락 다섯 개를 펴면서 신호를 보내더라는 거다. 온 몸에 옴은 걸렸지, 감옥에서 나가고는 싶지, 그래서 수사관 말대로 했다고 고백했다. 결국 고등법원에서 무효 판결이 났다. 당시 내가 검사한테 그랬다. ‘이봐, 너희들 소원대로 내가 선거 떨어졌잖아, 공소 취하해!’ 그러니까 판사가 웃으면서 ‘검사도 다 자기 직무상 하는 건데 그냥 놔두세요, 자기 직분대로 하는 겁니다’ 하더라.

또 하나는 권인숙 사건이었다. 권인숙 사건이 났을 때 내가 법사위원이었다. 법사위는 정치투쟁의 최전선이다. 법률논쟁, 정치논쟁을 하는 곳이 법사위다. 법관출신도 아닌 내가 법사위에 들어갔던 이유는 대야(對野) 공격과 방어를 위해서였다. 권인숙 사건도 그런 맥락이었다. 야당과 시민사회에서 비난이 엄청나게 크다 보니, 여당 입장에서는 ‘이거 잘못 다뤘다가는 정권이 무너지겠다’ 하는 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입씨름 전사로 내가 발탁됐다.

나는 유리창이 있는 취조실에서 성고문을 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야당과 재야세력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다만 문귀동이 폭력을 휘두른 것은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문귀동에게 폭행죄를 주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야당이 문귀동 정신감정을 하자 했을 때 ‘왜 문귀동만 하냐, 권인숙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실제로 법사위가 끝나고 나서 법사위원장이 나를 불러 ‘문귀동 처벌하라고 하면 당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나 책임 안 집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법사위원장이 벌벌 떨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문귀동을 구속하라고 주장하려면 권인숙 이야기를 같이 할 필요가 있었다.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박원순이 반인권적 발언이라고 하면서 낚아챈 것이다. 

▲ 지금은 강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다. 정치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시사오늘 윤지원

“민주성보다 효율성 중시하는 강력한 리더십 필요”

3김 시대를 거쳐 온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까도 말했듯이, YS는 시원시원한 면이 있었다. ‘말 들었제? 온나’ 이게 전부였으니까. 1970년 대선을 앞두고 이철승 대표가 직접 나를 영입하려고 한 적이 있다. 해외에 나갔다가 7년 만에 돌아와서 비서를 찾던 때였다. 후배들이 나를 추천하니까, 이 대표가 전화를 해서 ‘내일 6시까지 차를 무교동 어디 앞에 대놓을 테니까 그걸 타고 우리집으로 와 줘요’ 부탁했다. 그렇게 혜화동 집으로 갔더니, 저녁밥상 앞에서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네, 죽으나 사나 나하고 같이 정치하세’ 하면서 나를 설득했다. 이것이 이 대표 스타일이었다.

DJ 좀 달랐다. 이철승 대표와 DJ는 라이벌 관계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이 대표하고 만난 날 저녁 동교동에서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선생님이 아침을 같이 먹자고 하신다고. 그래서 DJ 집에 갔더니, 대뜸 ‘자네 요즘 월급 얼마 받지’ 물었다. 그때 국회의원 보좌관 월급이 3만5000원인가 그랬다. ‘3만5000원 받습니다’ 했더니 ‘내가 5만 원 주면 나하고 같이 일을 할 수 있겠나’ 묻는 거다. 얼마나 극명히 비교가 되나.

당시 생각을 하면서 요즘을 보면, 걱정스러운 점이 많다. 지금 이 시대는 남북 긴장이 엄청나게 고조된 동시에 경제는 침체된 시기다. 긴장과 경각심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국회나 정부나 모두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줘야 하는데 너무 방만하다. 사드 문제를 보자. 국회와 정부가 판단해서 사드가 필요하다 싶으면 배치하는 거고, 필요 없으면 안 하는 거다. 환경영향평가가 대체 무슨 소리냐. 필요성 여부로 판단해야지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데 총을 쏴야 되는지 물어가면서 하는 게 말이 되나. 전술핵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면 하고 필요없으면 안 하는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민주성보다 효율성이 강조돼야 한다. 민주성은 평화 시대의 이야기다. 전쟁은 민주성으로 치르는 게 아니다. 효율성으로 치른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허리끈을 조이자’ 말하고 대북 관계가 위기면 ‘북한 문제가 간단치 않다, 합심해 다오’ 요구해야 한다. 민주주의만 찾으면서 아무 요구도 하지 않는다. 지금은 강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다. 정치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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