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권 2인자 "5년후 모습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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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권 2인자 "5년후 모습은 어떨까"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8.04.30 1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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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최측근 '안희정' 금품수수 연루돼 단죄
DJ때 최고 실세 '박지원 권노갑'은 옥살이
이승만땐 이기붕 곽영주는 사망까지

2007년 대선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승리로 끝나면서 세인들을 가장 궁금하게 만들었던 것은 ‘이명박의 최측근은 누구냐’였다. 전 정권에서도 그랬듯이 향후 5년을 좌지우지할 인물이기 때문이다.

언론 등은 이명박 당선자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거치던 6인회의를 주목했다. 이상득 국회부의장, 박희태 김덕룡 이재오 의원과 최시중 고문 등이 멤버였다. 박희태 김덕룡 의원은 5선으로 당의 핵심인물이지만, 이번 총선에서 공천조차 받지 못함으로써 주목으로 끌지 못하고 있다 

이상득 부의장은 이 당선자의 형이고, 최시중 고문은 이 부의장의 죽마고우로 이 당선자와는 한 가족처럼 지낸 사이다. 따라서 ‘이들이 이명박 정권의 2인자가 되는 게 아니냐’는 말들이 나돌았다.

하지만 이 부의장은 이 당선자의 친형이고 최 고문은 현역의원도 아닐뿐더러 이미 일흔을 넘긴 나이어서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 당선자의 최측근, 다시 말하자면 ‘2인자’일까. 이에 대해 당 안팎에선 주저 없이 ‘정두언’을 꼽았다.

정두언 의원은 비록 초선이지만 이 당선자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정 의원을 꼽는 이유에 대해 ‘보고’때문이라는 의견이 가장 많다.

정 의원은 평소 주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일들을 깨알같이 자신의 수첩에 적은 후 이 당선자와 만날 때 이에 대해 보고를 한다는 것.

이와 더불어 재선고지에 오른 공성진 의원도 정권의 2인자 반열에 오른다. 공 의원은 지난 2년간 이명박 후보의 서울시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경선에서 승리하는데 일조했고, 대선 때는 서울에서 압도적 표차로 승리하는데 한몫했다.

또한 친이계의 좌장이라고 불리는 이재오 이방호 의원 등이 이번 총선에서 낙선함에 따라 새로운 친이계의 대표주자로 ‘공성진’을 지목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상황이 이쯤 되니 ‘새로운 권력이 정두언과 공성진한테 쏠린다’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역대 정권을 되돌아보면 정권의 2인자들이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정권이 끝나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거나 ‘영어’의 몸이 된 인사가 다수다. 때문에 정권의 2인자로 불리는 이들은 이 같은 점을 늘 되새겨해야 할 것이다.

역대 정권을 되돌아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안희정’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노 대통령 스스로도 “나는 안씨와 정치적 동업자다”고 표현했을 만큼 안씨를 신뢰했다. 하지만 안씨는 참여정부를 만들어 놓은 1등 공신임에도 제도권으로 입성하지 못하고 야인으로 끝났다. 금품 수수사건으로 법의 단죄를 받은 이유 때문이다.

참여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 대통령에게 ‘올인’했던 안씨에게 참여정부 5년은 너무 허무하게 흘러간 시간일 것이다. 참여정부의 2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초 ‘영어’의 몸이 돼 헤게모니를 쥘 수 없었다.

▲     © 운영자


박지원과 권노갑, 국민의정부 실세


DJ 정권의 대표적 2인자는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과 권노갑 고문이다. 이들은 DJ라는 군주 밑에서 정권의 실세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권 고문은 DJ 정부시절 터진 진승현게이트에 연루돼 영어의 몸이 됐다. 박 실장 또한 불법 대북송금 등으로 ‘감방’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됐다.

재미있는 점은 권 고문이 자신의 위치가 추락하게 될지를 알았는지 정권 말기에 접어들어서는 ‘동교동 라인’과 접촉을 일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필자는 권 고문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때 권 고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제 (DJ)퇴임이 얼마 안 남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DJ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는 것이다.”

필자는 “무슨 말입니까, 정권 재창출하시고 고문님도 좋은 날이 다시 와야지요”라고 물었다. 이때 권 고문은 “누가 정권을 잡든지 칼날은 우리를 향하게 돼 있어, 그걸 누가 막겠어, 다 피할테지”라고 답했다.

YS의 가신 홍인길도 감방행

김영삼 정부의 2인자를 꼽는다면 최형우 전 의원이다. 하지만 YS의 특별한 신임이 있었던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도 빼놓을 수 없다. 때문에 홍 수석을 문민정부 2인자로 지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홍 수석이 YS의 특별한 신임을 얻게 된 이유는 83년 전두환 정권시절 YS가 단식투쟁에 돌입했을 때다. 전 정권은 처음에는 YS의 단식을 ‘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YS의 생명이 위급할 수도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 정권은 YS를 서울대병원에 강제 이송시켰다.

이때 ‘홍인길’은 갑자기 YS가 상도동에서 사라지자 이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홍인길은 YS가 없어지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인근 정육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정육점에서 경찰간부가 전화를 걸며 ‘상황끝’이라고 보고하는 것을 보고 홍일길은 눈이 뒤집혔다

홍인길은 정육점에 있던 칼을 잡고 그 간부의 목에 들이대며 “밖으로 나와,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경찰간부가 “YS를 병원으로 모셨다”고 하자, 그때서야 경찰간부을 풀어줬다. 이 같은 일이 있은 후 YS는 홍 수석 얘기만 나오면, “무덤에 갈 때까지 같이 갈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홍 수석도 문민정부가 출범한 후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입성한 게 ‘화’를 불렀다.

당시 한보회장이었던 정태수씨와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산업은행에 한보에 대출해 주라는 압력을 행사해 결국,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문민정부 말기에 터진 이 사건으로 홍 수석은 사법 당국의 처벌을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2인자는 자신의 처고종사촌이었던 박철언 장관이었다. 박 장관은 LP(Little President)로 불렸을 정도로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박 장관도 YS 정부 출범 후 ‘철창’ 신세를 지는 몸이 됐다.

전두환 정권의 2인자는 장세동 안기부장이다. 장 부장을 ‘영원한 전두환맨’이라고 부를 정도로 역대 대통령의 측근들 중 충성심이 가장 강했다. 장 부장은 잔악한 고문과 정치공작을 한 혐의로 세번의 옥고를 치렀다.

차지철과 이기붕·곽영주는 죽음

박정희 이승만 정권의 2인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권력이 주는 허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박 정권의 2인자를 누구라고 딱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도 그 중 한사람일 것이다.

차 실장은 대통령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른바 ‘멧돼지’ 같은 저돌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동안에 대통령이 찾을 것을 염려해 화장실에도 전화기를 설치했으며, 박 대통령 전용 전화기에서 벨이 울리자 다이빙을 해서 수화기를 잡다가 허리를 다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그는 대통령과 함께 10·26의 총탄 속에 운명을 같이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두 명의 최측근이 있었다. 한명은 이기붕 부통령이고, 또 한명은 경무대경찰서장(대통령경호실장역)인 곽영주다.

두 사람 모두 3·15 부정선거와 4·19의거에 의해 몰락했다. 이 부통령은 경무대 한켠의 작은 방에서 아들 이강석의 총탄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기붕의 죽음이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인 선택이었다면, 곽영주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다.

곽영주는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깡패일소정책’에 따라 이정재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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