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동 국립극장] 육영수 피격사건 일어난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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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국립극장] 육영수 피격사건 일어난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8.10.23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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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완공된 국립극장…1년 만에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발생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1973년 8월 완공된 남산 국립극장의 개관 당시 모습. ⓒ국립극장 60년사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8·15 광복절 기념식이 시작됐다. 오전 10시 6분. 단상에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축사를 읽어 내려갔다. 이날 박 전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을 밝히기로 돼있었다.

15분 쯤 흘렀을까. 갑자기 식장 뒤편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경축사를 이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려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쾅!’

두 번째 총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한 남자가 아래층 중앙 뒷줄에서 단상을 향해 뛰어나왔다. 그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장내를 뒤덮은 틈을 타 단상 바로 아래까지 접근했다. 경축사를 낭독하는 박 전 대통령까지의 거리는 불과 10미터 남짓. 그는 권총 사격 자세로 세 발을 더 발사했다.

박 전 대통령은 빠르게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경호원들도 박 전 대통령을 둘러쌌다. 그 사이 다른 경호원들이 범인을 제압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기에는 너무 많은 총알이 발사된 상태였다.

단상 한쪽에서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쓰러진 탓이었다. 육 여사는 곧바로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호송됐다. 상황이 진정되자, 박 전 대통령은 조금 뒤 다시 연단에 올랐다. 그러고는 “여러분,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라며 경축사를 계속 낭독했다.

「괴청년 한 명이 15일 상오 국립극장에서 거행 중인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경축사를 낭독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으나 좌절되었으며 저격범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다고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했다.
이날 상오 경축식 전의 앞줄 좌석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이 저격범은 10시 20분 좌석에서 갑자기 일어서서 경축사를 낭독 중이던 박 대통령에 대해 저격했다.
제1탄은 불발이 되었으며 제2탄은 박 대통령이 사용 중이던 연설대 우측에 맞고 빗나갔으며 저격범은 곧이어 단상에 앉아있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다.
육 여사는 두부에 총상을 입었으며 경호원들과 장내에 있던 여자합창단 1명의 자발적인 부축을 받고 퇴장하여 서울대학 부속병원에 입원, 수술가료 중에 있다.
박 대통령은 저격범이 체포된 뒤 즉각 태연하게 경축사를 계속했으며 광복절 경축식전은 예정대로 모두 끝냈다.
박 대통령이 경축식장을 퇴장할 때 장내의 경축인사들은 박 대통령에 대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으며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 정중히 답례했다.
경호원들에 의해 현장에서 즉각 체포된 저격범은 현재 경찰당국에 의해 조사를 받고 있는데 이 저격범은 일본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김 청와대 대변인은 박 대통령 저격사건 전모를 이 같이 발표하고 앞으로 조사가 진전되는 대로 계속 사건 내용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치안국은 저격사건을 계기로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령을 내리고 초경계태세에 들어갔다.
1974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박 대통령 피격 모면’」

▲ 1973년 10월 열린 남산 국립극장 개관식.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 ⓒ국립극장 60년사

사건 발생 10여분 만에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진 육 여사는 오전 11시 20분경부터 5시간여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1974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날 육 여사에게 수혈된 피는 무려 74병에 달했다. 인근 병원과 적십자 혈액원의 모든 혈액을 쏟아 부었고, 경호원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수백 명의 시민들이 헌혈한 피도 동원됐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육 여사는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가족·친지들 앞에서 오후 7시경 눈을 감았다.

「15일 육영수 여사가 서울대 부속병원에 입원한 것은 총상을 입은 지 10여 분 뒤인 오전 10시 32분경. 육 여사는 입원하자 곧 응급처치에 이어 5시간 40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으며 투병했으나 오후 7시경 수술의 보람도 없이 운명했다. (중략)
육 여사가 수술실 침대에 옮겨져 김진복 박사 팀 집도에 의해 수술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오전 11시 20분경. 박정희 대통령이 병원에 찾아온 때는 육 여사의 상처부위수술이 시작된 조금 뒤인 12시 5분께였다. 박 대통령은 혼수상태로 수술을 받고 있는 육 여사를 지켜보며 ‘최선을 다해달라’고 부탁하고 돌아갔다. 근영 양, 지만 군도 달려와 수술실 주변을 서성댔다. (중략)
뇌정맥을 다친 육 여사는 워낙 출혈이 심해 수술 과정에서 계속 수혈이 필요했다. 인근 고려대 우석병원, 을지병원, 적십자 혈액원 등에서 50여 병의 혈액이 운반됐다. 경호원들과 수백 명의 시민들이 헌혈을 자청했다. 육 여사의 혈액이 AB형이라는 보도가 있자, 경기도 강화에서 100리길을 버스로 달려온 고교 학생이 있는가 하면 ‘마이클’ 양이라는 외국인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날 육 여사에게 수혈된 피는 모두 74병이나 됐다.
박 대통령이 오후 4시 5분께 다시 병원을 찾아왔다. 육 여사가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로 나온 것은 오후 4시 반께였다.
오후 4시 35분경엔 김종필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 전원이 도착했고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은 처음부터 줄곧 병원에 있었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가족 및 친척들이 육 여사의 최후 투병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육 여사는 오후 7시경 운명했다.
1974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 ‘육 여사 총상 입고 운명하기까지 응급수술 5시간 40분’」

이 사건의 범인은 문세광이라는 인물이었다. 22세의 재일한국인 2세였던 그는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던 만경봉호에서 박 전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그는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쳐 국내에 잠입, 박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총을 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체포된 문세광은 같은 해 10월 19일 사형 선고를 받은 후 항소했으나 기각됐고,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뒤 12월 20일 사형 당했다. 

▲ 지금도 국립극장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으며, 여러 차례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시사오늘

한편, 이 사건이 있었던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29일 설립된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이다. 당초 국립극장은 現 서울시의회 의사당 건물인 부민관에서 개관했으나, 6·25 발발로 대구로 이전한 뒤 서울로 돌아와서는 現 명동예술극장 건물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박 전 대통령 지시로 장충동에 새 건물을 지어 1973년부터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다. 육 여사가 저격당한 것은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옮긴 지 불과 1년 후의 일이었다.

지금도 국립극장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으며, 여러 차례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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