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30년 전쟁史…민자당에서 한국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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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30년 전쟁史…민자당에서 한국당까지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2.22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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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합당으로 시작된 군부세력과 민주세력의 ‘불편한 동거’
‘호랑이굴’서 ‘호랑이’ 쫓아낸 YS…민주세력 보수 주류로
민정계 부활시킨 이회창…IMF 외환위기로 ‘박정희 향수’까지
바른정당 실패로 무너진 민주계…신보수 복원 가능할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3당합당으로 시작된 군부세력과 민주세력의 ‘불편한 동거’는 3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시사오늘 그래픽=김승종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민주 발전과 국민 대화합, 민족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새로운 정당으로 합당한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

1990년 1월 22일,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여당이자 원내 제1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제3당 통일민주당, 제4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으로 재탄생했기 때문이다. 원내 제1·3·4당이 단행한 ‘정계 대개편’ 결과는 국회 전체 의석의 2/3가 넘는 218석짜리 ‘공룡 정당’의 출현이었다.

그러나 흔히 ‘3당 합당’으로 명명(命名)되는 이 사건은, 보수 내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군부독재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불편한 동거는 끊임없는 내전(內戰)의 원인이 됐고, 당 정체성을 흔들어 놨다. 목숨을 건 혈투(血鬪)를 벌였던 박정희와 김영삼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자유한국당의 아이러니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시사오늘>이 ‘보수 30년 전쟁’의 역사를 따라가 봤다.

▲ DJ와의 야권 통합에 실패한 YS는 3당 합당을 통해 ‘호랑이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쪽을 택했다. ⓒ김영삼민주센터

YS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 들어가”

1987년, 대한민국에는 민주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군부독재 세력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의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이에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1987년 9월 29일 제13대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담판을 벌였다.

결과는 단일화 실패였다. 호남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던 DJ는 노태우와 YS가 영남 표를 나눠 갖고 김종필이 충청 표를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우세한 자신이 결국 대권을 거머쥘 것으로 봤다. 이른바 ‘4자 필승론’이었다. 이러자 YS는 같은 해 10월 22일 DJ와 다시 만나 동교동계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로 했지만, DJ는 ‘너무 늦었다’며 독자 출마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노태우는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제13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군부정권은 연장됐다.

YS는 2009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일방적으로 후보를 양보할 수는 없었다. 경선을 치르든 합의를 하든 뭔가 방법을 통해 후보를 정하는 게 정당정치고 의회민주주의 아닌가”라며 “어찌됐건 단일화가 되지 않은 건 아쉬운 대목이다.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대권은 내줬지만, 민주화 세력의 단일화 논의는 계속됐다. YS와 DJ는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민정당에게 승리하려면 야권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던 까닭이다. 난항을 거듭하던 단일화 협상은 두 사람이 모두 총재직에서 사퇴하고, YS가 ‘소선거구제 도입 후 야권 통합’이라는 DJ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통합 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른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한겨레민주당이 통합 협상을 갖기로 한 1988년 3월 19일, 회의 장소인 서울시 마포구 서교호텔에 평민당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폭력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이 일로 야권 통합은 없던 일이 됐고, YS와 DJ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김대중 씨의 3·17 평민당 총재직 사퇴 선언으로 재개된 민주·평민·한겨레 민주당의 야권 통합 협상은 다시 좌초되고 말았다.
통합 협상을 결렬로 이끈 직접적 원인은 외형상 19일 하오의 3차 협상 개시에 앞서 있었던 최형우 민주당 대표에 대한 폭력 사태이다.
민주당은 폭력을 휘두른 주체가 평민당원이라고 주장하면서 협상 계속의 조건으로 공식 사과를 요구했으나 평민당은 야권 통합을 바라는 대학생들의 우국충정대열에 잠입한 불순분자의 소행이라며 민주당 측의 협상 테이블 무조건 복귀를 촉구했다. (후략)
1988년 3월 21일자 <경향신문> ‘역시 결렬로 끝난 야권통합’」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 치러진 제13대 총선은 민정당이 125석, 평화민주당이 70석, 통일민주당이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얻으며 마무리됐다. 민정당도 민주당도 만족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국 국정 운영을 위해 의석 과반수가 필요했던 노태우와 군정 종식을 위한 야권 통합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YS는 전격적으로 3당 합당을 결행,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한다.

YS는 같은 인터뷰에서 3당 합당에 대해 “야권 통합을 왜 추진 안 했겠나. 동교동계가 야권 통합을 전제로 소선거구제를 해야 한다고 해서 그것도 수용했지만 무산됐다”면서 “3당 합당은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한 차선이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굴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 대통령 자리에 오른 YS는 하나회를 척결하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키는 등 군부독재 세력을 축출했다. ⓒ김영삼민주센터

‘호랑이굴’서 ‘호랑이’ 쫓아낸 YS

3당 합당을 통해 ‘호랑이굴’로 들어간 YS는 ‘호랑이 사냥’을 시작했다. 노태우의 민정계가 주류를 형성했던 민자당에서, YS는 특유의 투쟁력을 앞세워 당내 헤게모니를 장악해나갔다. YS는 노태우의 후계자가 마땅치 않았던 민정계의 약점을 활용해 자신을 대선 후보로 밀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노태우를 압박했다. 결국 YS는 대선 경선에서 민정계 대표로 나선 이종찬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민자당 대선 후보로 선출,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YS는 본격적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우선 취임 직후 군정(軍政)의 상징이었던 하나회를 청산하며 군부독재 세력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3당 합당으로 손을 잡았던 노태우가 하나회 출신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하나회 축출은 사실상 YS가 ‘호랑이 잡기’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다.

1993년에는 5·18 특별담화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 명예회복을 선언하고, 1995년에는 5·18 특별법을 제정·통과시켜 ‘폭동’이라는 오명을 썼던 광주민주화운동을 제자리로 돌려놨다. 또 전두환·노태우를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주범으로 지목해 구속시키면서 당명까지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YS와 갈등을 빚은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군부독재 잔존 세력인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를 이끌고 탈당, 자유민주연합을 세웠다. 즉, 신한국당의 탄생은 호랑이굴로 들어간 YS가 호랑이 사냥에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징표나 다름없었다.

‘호랑이 축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제15대 총선 공천 작업이었다. YS는 군부독재 세력의 후신(後身)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던 신한국당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제도권 밖에서 참신한 인물들을 대거 영입, 지금까지도 회자(膾炙)되는 개혁 공천을 실시했다. 이 시기 신한국당에 영입된 인물들이 소위 ‘YS 키즈’로 불리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재오 전 의원, 안상수 전 창원시장, 홍준표 전 대표,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이다. 반면 민정계는 대거 공천에서 배제되면서, 민정계가 주류를 형성했던 신한국당 내 역학구도는 민주계 중심에 민정계가 일부 잔존하는 형태로 전환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부독재 세력은 조용히 소멸되는 듯했다.

「신한국당 내 민정계는 불안하다. 민주계를 축으로 한 신주류가 확고부동한 입지를 확보해 나가는 것과 비례해 민정계의 불안감과 소외감도 커지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과 이홍구 대표의 잇단 탈계파선언 때문에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탈계파, 계보파괴는 곧 민정계 배제와 고사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우선 민정계의 불안감은 당의 의사결정구조에서 소외되는 데서 나온다. 유일한 민정계 고위당직자회의 멤버인 이상득 정책위의장의 역할은 사실상 기능적 측면에 한정되고 있다. 당의 의사결정은 철저히 신주류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민정계 실세중진이 당대표(김윤환)와 국회부의장(이한동)을 양분하고 있을 때와 비교하면 분위기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한 민정계 중진은 “정책결정에의 참여는 고사하고 당사에서 잠시 들러 얘기를 나눌 곳조차 없다”고 토로했다. (중략)
김윤환 전 대표나 이한동 국회부의장 등 계파중진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식의 하소연을 민정계 의원들로부터 자주 듣고 있다는 후문이다. 총선 직후 김 전 대표와 이 부의장은 이미 두 차례의 만남을 통해 동병상련의 대화를 나눴을 것으로 보인다. (후략)
1996년 5월 26일자 <경향신문> ‘힘 잃은 민정계 앞날 불안감’」

▲ 이회창은 민정계의 지지를 등에 업고 신한국당 대권 후보로 선출, 민정계 부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뉴시스

민정계, 이회창 손잡고 ‘부활’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탄탄한 기반을 구축해 놓은 데다 수적으로도 부족할 것이 없었던 민정계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총선을 기점으로 점차 쇠락하던 이들은, 대선이 다가오자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 민정계의 눈에 띄었던 인물이 바로 이회창이었다.

‘대쪽 총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이회창은 일찌감치 당내 유력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혔다. 하지만 치열한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아닌 ‘세력’이 필요했다. 이 같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이회창과 민정계는 한 배를 타고 대권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민정계가 이회창이라는 부활의 날개를 다는 순간이었다.

「신한국당 김덕룡 의원이 이회창 대표 지지세력을 ‘복고세력’이라고 연일 비난하는 데 이어 이수성 고문도 28일 이 대표와 김윤환 고문의 연대를 ‘수구연합’이라고 공격하며 가세했다.
이 고문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지향적인 수구연합을 주도하는 사람은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고 있으며 그 사람에게 의지해 집권하겠다는 ‘멋대로’ 정치인이 있다”며 이 대표와 김 고문을 한 묶음으로 공격했다.
이 고문의 발언은 지난 23일부터 “이번 경선은 ‘이회창’ 간판을 달고 있는 복고세력 대 신정치 주체세력의 대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온 김 의원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중략)
그러나 내심으로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기색이다. 실제로 정발협 내에서는 이 대표가 처음부터 김 고문을 중심으로 한 대구·경북지역의 민정계와 연대한 뒤 민정계 중심의 나라를 위한 모임(나라회)까지 사실상 흡수하자 ‘보수 회귀’로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이 대표가 집권할 경우 이 대표의 성향과는 별도로 주변의 구 여권 인사들이 ‘개혁의 계승’에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정발협 내에서 나온다. (후략)
1997년 6월 29일자 <동아일보> ‘여, 이번엔 보혁 논쟁’」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허주 김윤환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 지지를 등에 업은 이회창은 김덕룡·이인제·이수성 등이 결합하지 못한 민주계 후보들을 제치고 신한국당 대선 후보에 선출된다. 그리고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청산’을 전면에 내걸고 YS와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YS가 DJ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미루면서 극에 달했다. 이회창은 아들의 병역 의혹으로 폭락한 지지율을 복구하기 위해 DJ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DJ가 처조카 이형택을 통해 670억 원대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YS는 대선 전에 DJ 비자금 수사를 강행할 경우 대선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안정적인 국정 관리를 위해 DJ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미룬다고 발표했다.

이러자 이회창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YS에게 당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경북 포항에서 열린 필승 결의대회에서는 YS 인형을 만들어 몽둥이로 때리고 화형식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분노한 YS는 ‘대선 중립’을 선언하며 자신이 일구다시피 한 신한국당을 떠났다. 민정계를 몰아내고 개혁 세력을 중심으로 당을 일신(一新)했던 YS가, 구(舊)세력 민정계와 손을 잡은 이회창에 의해 밀려난 모양새였다. 이때부터 민정계는 다시 신한국당 주류로 올라섰고, 민주계는 비주류로 주저앉게 된다. 말 그대로 ‘민정계의 부활’이었다.

「신한국당에 옛 민정당의 색채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가 11일 새로 임명한 9명의 당무위원은 민주계인 강삼재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옛 민정당에서 내로라하던 인사들로 채워졌다. 이날 오전 임명장 수여식이 열린 이한동 대표실에서는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린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이날 당무위원으로 임명된 이자헌·고귀남 전 의원은 옛 민정당 중앙집행위원을, 안기부 출신의 김영광 전 의원은 민자당 당무위원을 지냈다. 지난해 신한국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했다 최근 돌아온 곽정출 전 의원이나 이치호 전 의원도 5공 시절 부산시 지부장과 대구·경북 지부장을 각각 역임하면서 대표적인 강경파로 꼽혔던 인물이다. 이들 외에 이날 당무위원으로 임명된 김기배·정시채 전 의원도 5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내에서는 옛 민정계의 득세를 최근 이 총재 주변의 개혁성향 초선의원 집단이 결속력을 잃어가는 경향과 비교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당의 급속한 보수화가 아니냐는 것이다. (후략)
1997년 11월 12일자 <한겨레> ‘신한국 당무위원 ‘민정당 부활’’」

▲ 민정계의 부활, 경제 불황 등은 혹평 속에 묻혀 있던 박정희를 신(神)으로 만들었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신(神)이 된 박정희…소멸한 신(新)보수

민정계의 부활은 신한국당이 ‘군부독재 세력’의 영향력 하에 편입됨을 뜻했다. 3당 합당으로 정권을 잡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YS는 박정희-전두환과 사투(死鬪)를 벌였던 민주화 투사였고, 실제로 대권을 쥔 후에는 민자당에서 민정계를 축출하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키기까지 했다. 반면 민정계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세력의 후예였다. 이런 이유로 YS의 탈당은 신한국당이 민주화 대신 산업화를 추종하게 되는 핵심 원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때마침 경제 침체와 IMF 외환위기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사태가 겹치면서, 신한국당은 박정희의 뜻을 잇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후예인 민정계가 신한국당 주류로 도약하고, 경제 불황으로 ‘박정희 신드롬’이 일어나며 YS가 보수정당에 심어놓은 민주화 유산은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추락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 시대의 ‘구원자’인가. 박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징후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말 고려대생들이 ‘복제하고 싶은 인물’ 설문조사에서 박 대통령을 3위로 꼽은 데 이어, 주부들은 1위로 뽑았다. 사랑의 전화가 발행하는 ‘BI-세상 사람들’ 4월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60대 주부 115명 중 35명이 ‘복제를 원하는 사람’으로 박 대통령을 꼽았다.
박 대통령에 대한 추모열도 높아지고 있다. 경북 구미시 모동 박 대통령 생가의 내방객은 하루 평균 300명 선. 생가보존회장 김재학 씨는 “초등학생에서 공무원·촌로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이 몰려든다”고 말한다.
‘박정희 신드롬’이라 불릴 만한 이 같은 형상은 최근 경제 불황에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가난과 절망에 빠진 한 민족을 번영으로 이끌었다(이인화 씨·소설 영원한 제국의 저자)’, ‘우리들의 가난을 풀어주신 어른(생가 방명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략)
‘군사쿠데타의 원조’, ‘개발독재의 원흉’이라 평가되던 박 대통령이 경제난국을 기회로 부활하는 형국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997년 4월 12일자 <경향신문> ‘불황 타고 박 전 대통령 ‘부활’’」

민정계의 부활, IMF 외환위기 발발, 박정희 신드롬. 이로써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권력구도는 민정계 우위로 정리됐다. 이에 민주계는 당을 떠나거나(이인제·손학규·김영춘·김부겸 등), ‘보수정권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사실상 백기투항(서청원·김무성 등)했다. 김문수처럼 아예 스스로의 성향을 바꾼 사람도 있었다.

2017년, 이 구도가 크게 요동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탄핵’이었다. 박근혜 탄핵은 오랜 기간 잠복(潛伏)해 있던 민정계와 민주계의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산업화와 경제 발전으로 대표되는 박정희를 추종했던 세력은 박근혜 탄핵을 막아선 반면, 민주화를 상징하는 YS의 뜻을 이어받은 세력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은 민주계 대다수가 바른정당으로 탈당하면서 분당(分黨)으로 귀결됐다.

바른미래당 이준석 최고위원은 2월 13일 KBS <오늘밤 김제동>에 출연해 “새누리당까지만 해도 5·18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전두환의 민정계 세력과 그들을 처단한 YS의 상도동계, 민주계가 공존한 당이었기 때문에 (극우 목소리가) 제어가 됐다”며 “지금 한국당은 민주계 인사들이 거의 다 바른정당으로 탈당을 했다가 돌아간 상태라 발언권이 굉장히 약해진 상태고, 그러다 보니 당이 이념적으로 경도(傾倒)됐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반기문 카드’가 무산되면서 바른정당의 ‘신(新)보수 실험’은 맥없이 무산됐다. 바른정당으로 떠났던 민주계 인사들도 패잔병(敗殘兵)처럼 조용히 한국당에 복당했다. 이후 ‘탈당파’라는 멍에를 뒤집어 쓴 이들은 발언권을 상실하고 존재감도 잃어버렸다. ‘5·18 망언’은 민주계 몰락으로 극우화(極右化)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당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드러낸 사건인 셈이다.

▲ 대대적으로 YS 3주기 추모식을 개최하는 등 자유한국당 내에서도 민주계의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많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보수의 미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쪼그라든 민주계의 미래는 불투명 그 자체다. 물론 당 안팎에서는 신보수 복원을 위한 움직임도 일부 포착된다. 한국당은 지난해 12월 당 차원의 대대적인 YS 3주기 추모식을 개최했다. 김용태 사무총장이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이 행사는, 구보수 이미지를 벗고 신보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한국당의 의지로 풀이됐다.

범(凡)보수로 분류되는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당 밖에서 한국당의 ‘역주행’을 겨냥했다. 원 지사는 5·18 망언 사건 직후인 2월 15일 BBS <전영신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5·18은 군사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광주시민과 관련자들이 희생된 사건”이라며 “지금에 와서 역사적인 의미, 성격 자체를 뒤집으려는 것은 역사 인식에 있어서 대다수 국민들의 상식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그는 “(5·18 망언은) 희생자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분들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고 솔선수범해 명확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른미래당 이언주 의원은 조금 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이 의원은 2월 13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5·18 망언이나 ‘박근혜의 옥중 정치 논란’ 등이 나오는 구조로는 여당의 대항마가 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한국당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한국당에도 친박과 비박을 가리지 않고 헌법 가치가 훼손되는 부분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고 본다”고 답했다.

다만 정치권에서는 한국당 내에서 신보수가 과거 입지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2·27 전당대회에 출마한 후보들이 하나같이 수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력 당권 주자로 꼽히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 씨의 태블릿PC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고, 청년최고위원에 출마한 김준교 씨도 “문재인은 지금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 문재인을 민족 반역자로 처단하자”는 극언을 쏟아냈다.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후보들이 극우적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이미 극우 세력이 한국당의 주류로 올라섰다는 사실을 방증한다는 분석이다.

이를 반영하듯, YS 차남인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는 2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당의 5·18 망언 사태는 한국당의 실체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면서 “친박 논란, 5·18 망언 등으로 얼룩진 한국당의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개혁보수가 설 땅은 그곳에는 없어 보인다”고 썼다. 민정계에 뿌리를 둔 구보수와 민주계를 계승한 신보수의 ‘30년 전쟁’은 과연 누구의 승리로 끝나게 될까.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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