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3)] 복진풍 전환경관리공단 이사장“민산의 태동은 모내기가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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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3)] 복진풍 전환경관리공단 이사장“민산의 태동은 모내기가 시발”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1.06.02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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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우연히 YS집으로 피신, 운명적 관계…5공 정권 회유에도 불구하고 'YS 맨으로’"YS는 순수하고 물욕 없어, 아직도 신뢰…내년 총선과 대선, YS 발언이 운명 좌우할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주산악회는 김영삼(YS)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런 민산은 우리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일까? 민산이 태동할 때부터 함께 했던 복진풍 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윤곽을 조금이라도 잡아 보려 했다. 복 전 이사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최연소 국회의원 YS와 맞물리는 청년정신,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 그리고, 김대중(DJ)에 대한 불신이 그려졌다. 또, 여전히 살아있는 민산의 정치적 영향력도 느껴졌다. 인터뷰는 2011년 5월 2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김영삼 민주센터'에서 진행됐다.

4·19 당시, YS 집에서 일주일간 기거하며 ‘인연’ 맺어

 

▲ 복진풍 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


-YS를 처음 만날 당시 정치 상황은 어떠했나요.

"YS와 만나게 된 계기는 4 ·19 혁명이었는데, 그 당시에 신문사가 폐간으로 문 닫는가 하면 조봉암 선생이 사형을 당했어. 또, 장택상 대통령 후보 등록 추천서가 테러범들에 의해 강탈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 내무장관이라는 사람이 '백주에 한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고 말해서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지. 사실, 4·19는 선거혁명이었어. 그 때 국민들 대부분은 '보통 평등 비밀 직접'이라는 선거 원칙을 알고 있었는데 이게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고 분노한 거야. 그리고 4·19는 '촌놈혁명'이야.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온 학생들이 주로 참여했어."

-당시 YS의 위상은 어떠했나요.

"4·19 혁명이 있기 전에 YS를 몇 번 만났어. 그 때 YS와 이철승 의원이 제일 인기 있는 의원이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초록이 동색이라고 대학생들은 젊은 의원들을 좋아했지. YS가 이철승 의원 보다 5살 더 젊었어. 25살 최연소로 국회의원이 됐지. YS는 술집과 다방에서 인기가 너무 좋았고 여자들이 길에서 YS를 보면 쫓아가서 악수를 하고 그랬어. 그런데 나와 몇몇 대학생들은 '우리도 응분의 대한민국 주인 역할을 해야 하므로 투쟁할 용의가 있다'라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자'라는 뜻을 YS에게 전달했어. 그래서 지금 태평로에 있는 서울시 의회에서 차를 얻어 마시며 면담하면서 알게 됐지."

-결정적으로 YS와 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4월 19일 계엄이 선포되고 계엄사령부에서 '내란을 모의하고 선동한 주모자를 잡으라'라고 했는데, 그 때 광화문 광장에서 효자동까지 시민들로 꽉 찼고 오후 5시에 서울신문사에 불이 났어. 나는 그 것을 보고 '우리를 잡아갈 것'이라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성북동 쪽 산으로 도망갔어. 그 뒤에 밤 12시가 되어서 산에서 내려와 대학로 뒤, 인화장 뒤로해서 창신동까지 성곽을 따라서 보문동 길로 내려가는데, 눈앞에 있는 파출소에 누가 불을 질렀고 소방차도 와 있는거야. 그래서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어떤 한옥 집 문패에 '김영삼'이라고 적혀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고대 정치과 다니는 친구 이만규에게 '설마 우리를 안도와 주겠냐'라면서 들어가자고 했어. 내가 초인종을 누르니까 손명순 여사가 누구냐고 묻길래 '나는 학생운동 하는 사람인데 쫓기다가 배가 고파서 그러니 먹을 것을 좀 달라'라고 부탁했어. 손명순 여사가 문을 열고 우리에게 상을 차려 주셨지. 그러다가 손 여사가 YS의 전화를 받고 이런 사실을 전하니 YS가 나를 바꿔달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건국대학 복진풍이라고 말하니까 YS가 '복진풍이 네가 살려니까 운명이 희한하구나. 꼼짝 말고 계엄 해제 때까지 계속 문간방에서 묵어라. 네가 지금 나가서 잡히면 죽어. 복진풍이 하고 다섯 명한테 체포령이 내려져 있어. 절대 나가지 마. 똥두간에 빠지는 한이 있어도 나오지 마'라고 말했어. 그래서 일주일간 거기서 먹고 자고 했어."

-YS 집을 나온 뒤에 좋지 않은 소식을 접했다고요.

"26일인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YS 집을 나와서 신설동-동대문-종로를 거쳐 무교동에 있는 귀공자 다방으로 갔어. 귀공자 다방은 그 당시 여야 거물 정치인들이 모이는 장소야. 내가 다방에 들어가서 앉아 있으니까 다른 자리에서 '저 학생이 복진풍이야'라는 소리가 들렸지. 그러다가 몇몇 의원들이 내 손을 잡으면서 '학생들이 운동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라고 말하더니 '놀라지 말라'라며 신문을 보여줬어. 그 신문에 우리 집이 불타버렸다는 기사가 실려있더군."

 

"군정연장 반대 운동하다 YS와 감방 의형제"

-5·16 당시 YS와 함께 감옥에 간 사실이 있지요.

"5·16이 터졌는데 그 때 김종필과 면담을 하게 됐어. 그런데 김종필이 '3군 사관학교 학생들이 지지 퍼레이드를 벌였으니 일반 대학생들도 같이 하자'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말도 안 된다. 일반 대학은 그렇게 못 한다'라고 퇴장했어.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군정연장반대 운동을 위한 '위장결혼식 사건'이 있었어. 그 때 내가 YS 수행비서를 했는데 시청 앞에서 (경찰들이) YS를 트럭에 실으려고 하는 거야. 나는 YS 허리띠를 잡고 발목을 잡고 악을 쓰면서 막았지만 결국은 같이 트럭에 실려서 서대문 형무소로 가게 됐어. 그래서 YS와 감방 의형제가 됐지. 내가 그 때 YS보고 '내가 감방 경험은 먼저 했으니 형무소에서는 내가 선배'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어. 그렇게 22일 정도 감방 생활을 했는데, 당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압력을 가해서 우리가 풀려나게 됐지."

-전두환 정권 때 회유 받은 일이 있다면서요.

"12·12 사태가 나고 나를 전두환이 11번이나 만나자고 했어. 육군 중령처럼 보이는 사람을 나한테 보냈지. 그 때 허삼수·허화평 사무실에서 면담하자고 했을거야. 내가 그 때 신민당 충남 홍성·청양 위원장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나한테 “사령관님(전두환)이 야당 위원장 분들에게 잘 할려고한다'라는 거야. 그래도 나는 그런 의리 없는 정치는 안한다고 거부했지. 알고 보니 민정당 비밀 창당 발기인에 나를 넣으려고 한 거야. 내가 YS측근 중 1번이니까 나를 창당 발기인에 넣으면 '김영삼 최측근 복진풍이도 민정당에 가입했다'라며 선전하기 좋다고 생각한 거야. 만약 내가 민정당이 싫다고 했으면 민정당 2중대인 민한당에라도 들어가게 하려고 한 거야."

-그 때 일과 관련해서 고(故)서석재 전 의원에게 쓴 소리를 한 적이 있다면서요.

"서석재는 나로부터 정보를 얻어서 민한당 국회의원이 된 거야. 나에게서 전두환 계엄사령관 비서실장 전화번호를 알아갔지. 나 때문에 서석재는 공짜로 국회의원이 된 셈이야. 그런데 서석재가 고맙다고 나한테 밥 한번 안사는 거야. (그런데) 나중에 서석재가 YS 비서실장도 하고 총무처 장관도 했지."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군부세력은 김영삼 계의 정치인들을 빼내려고 갖은 수를 썼다. YS비서실장을 지낸 박권흠은 민정당, 서석재는 당시 집권여당인 민정당 2중대로 불렸던 민한당행(行)을 택했다. 

-전두환 정권 때 재산을 빼앗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나는 전두환 정권 때 '옛골 양어장·낚시터'를 빼앗겼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허가를 받은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공사중지·출입금지가 돼버렸어. 청계산에 있던 '옛골 양어장·낚시터'에서 민산과 민주화추진협의회의 활발한 모임이 자주 있었어. 비밀회동도 가지고 했지.

안기부에서 이런 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그 근처에 미8군 사령부가 있었는데 갑자기 공사중지·출입금지가 돼버렸어. 그럼 개인재산에 대한 손해를 끼친 만큼 국가가 보상을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사거나 해야 되는 데 아무런 조치도 없었어. 

그 바람에 채권자들이 경매를 붙였고 결국에는 헐값에 넘어가 버렸지. 그 때 시가가 35억이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액수지. 이제 민주화가 됐으니 재산상 피해도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봐."

민추협 선전국장이던 복진풍은 당시 성남시 상적동에 시가 30억원에 달하는 양어장을 갖고 있었는데 김영삼과 함께 직선제 개헌투쟁을 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안기부의 요구를 거부하다 끝내 양어장을 빼앗겼다.

 

정형근 "당신이 복진풍이야"…아직도 생생 

-전두환 정권 때 안기부로부터 사찰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나중에 내가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이 되어서 국회 국정감사에 나가게 됐어. 그 때 안기부 차장을 지내며 정치탄압을 한 정형근 의원이 나에게 '당신이 복진풍이야'라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짐작했지. 내가 전두환 정권에 어떻게 비쳤는지. 얼마나 악명 높게 나에 대해 보고받았으면 '당신이 복진풍이야'라고 말했겠어."

-인간적으로 느낀 YS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입니까?

"최근에도 YS를 자주 만났어. YS는 순수하고 물욕이 없어. 그 점 때문에 내가 YS를 따르고 믿는 거야. 내가 수행비서할 때 정보부장이 5천만원, 지금으로 따지면 50억 보다 많은 돈인데, 그 돈을 측근을 통해 YS에게 전달하려고 했다는 거야. YS는 보나마나 안 받을게 뻔하니까 그렇게 한거지. 그런데 이 사람도 YS가 안 받을 걸 뻔히 알고 나에게 얘기를 해달라고 한 거야. 그 만큼 YS가 부정한 돈은 받지 않았어. 그런데 그 돈 받았으면 죽었지. 그 놈들이 그냥 돈을 주겠어? 그 정도로 YS는 돈 문제에서는 깨끗했어. YS는 부당한 돈 만들려고 하지 않았어. 재임 중에 절대 정치자금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을 지켰어."

"YS는 고집이 세지. 그래서 전두환·노태우도 감옥에 가게 했지. 그렇지만 YS는 고집이 세도 여러 사람들의 반대가 많고 틀렸다고 생각하면 자기 생각을 얼른 자연스럽게 바꾸는 스타일이야. 달리 말해서 융통성이 있는 거지. 굳이 단점이라고 한다면 사전에 행정 관리나 집행 등을 계획적으로 멀리 내다보고 챙기는 점이 부족하다고 할까. 그런데 임기 후반부에 그런 점도 보완이 됐지."

-새마을 운동과 관련해서 YS에게 제안한 게 있다면서요.

"YS 임기 말에 나보고 도로공사사장을 맡으라는 거야. 그런데 나는 맡지 않겠다고 했지. 대신 새마을 운동 사무총장을 맡겠다고 했어. 내가 박정희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새마을 운동은 정말 잘했다고 말했었어. 박정희가 나를 동생 삼으려고도 했었어. 그런데,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조그만 동네에서도 부녀회장 등이 나왔어. 사실 시골 아낙네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벼슬길이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조그만 동네까지 조직화가 되는거야. 돈 안드는 조직이지. 그래서 내가 YS에게 나를 사무총장으로 보내주면 1년 내에 지도자 동의를 받아서 ‘새나라 운동본부'를 만들겠다고 말했어. 그 때 YS도 동의했지.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YS는 외국으로 나갔고 나는 병을 얻어서 더 이상 얘기가 없었지."

"DJ, 임기응변 능하고 계산이 너무 빨라"

-YS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지는 DJ입니다. DJ에 대한 평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DJ는 임기응변에 능해. 계산이 너무 빠르지. 사탕발림 소리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어. 내가 지구당위원장으로 상경해서 인사하면 '복 위원장이 옥고도 많이 치렀으니 제일 먼저 금배지 달아야 해' 그런 식이었어. 하지만, 자기 계보 아닌 사람에 대한 차별이 심했어. 또 말을 자주 뒤집었어. 개인적 감정은 없어. 민추협 때 하루에 두 번씩 회의를 하는데 '절대 대통령 출마 안한다. 그렇게 믿어 달라'라고 했단 말이야. 우리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러더니 말을 뒤집어 결국에는 노태우가 공짜로 대통령 되게 한 거야. 그 뒤로는 세배도 자주 안 갔어. 그런 배신이 어딨어. 나는 정말 순수하게 DJ 말을 꿀떡처럼 믿었는데 말이야."

-YS가 차기 대선에서 누구를 밀까요?

"YS가 지금 누구를 민다고 하면 적이 바로 생기게 돼. 정치는 명분이고 인물이야.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인물을 마음속에 갖고 계신지 모르겠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으셔. 원래 YS가 입이 천금이야. 또, YS는 비밀보장을 안하는 사람은 절대 신뢰 안 해. 그런데 나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YS 발언이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그렇게 봐. YS를 만나서 'YS가 안한다고 하면 우리가 50명 100명이라도 모여서 YS의 역할을 대신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예정이야. 이스라엘에는 노인 정당이 있어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 내가 얼마 전에 아무개 장관 축사에서 백발혁명을 얘기했었어."

"민주산악회 태동은 모내기" 

-민주산악회의 시발점을 언제로 보는 게 옳은가요.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81년 6월 9일 고(故) 김동영과 김덕룡, 그리고 이사장님 등이 산에 오른 것을 시발로 봅니다. 하지만 유성환 전 의원의 경우 경민산악회를, 또는 김종순씨의 경우는 부산에서의 거산산악회를 시초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그 때(1981년 6월 9일)가 민산 시발점이라고 해도 될거야. 하지만, 그 보다 앞서서 그해 모내기 철 즈음인데 YS가 연금이 풀린 것을 계기로 청계산 근처에서 최형우, 명화섭, 김태룡 등과 모내기를 했었어.

그 때 김동영이가 보신탕을 준비해왔어. 거기서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고 YS도 좋다고 말했어. 민산이 태동한 것은 그 때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아. 그러다가 그 때(1981년 6월 9일) 산행을 하면서 본격적인 조직 등을 갖추기 시작했어.

유성환 전 의원은 경민산악회를 시발로 보고 또, 거산산악회를 시발로 보는데, 활동을 열심히 한 것은 맞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런데 아마 '누구 공로가 더 큰가'를 놓고 다투는 거 아니겠어."

복진풍은 81년 당시 성남시 상적동에 5천평이 넘는 농장을 갖고 있었다. YS는 측근들과 함께 이곳에 자주 들러 모심기를 하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무렵 YS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고, 고(故) 김동영이 산행을 권유해 그해 6월 9일 삼각산에 오른 것을 민주산악회의 시발로 본다. 김동영은 이미 정채권 등 지인 3~4명과 등산을 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유성환이 대구경북에서 ‘경민산악회’, 김종순이 부산에서 ‘거산산악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본 YS가 민주산악회를 만들었을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YS가 민산 해체명령을 내렸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YS가 대통령 되는데 민산이 일등공신인 건 사실이지만, 마치 상이군경 비슷하게 행세할까봐 염려가 돼서 해체한 것 같은데 잘된 일이라고 봐. 하지만 해체를 하더라도 밥이라도 먹으면서 정중하게 해체 식을 갖고 이해를 구해야 했었는데…, 아마 많은 회원들이 서운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민산은 해체하더라도 다른 건전한 제3의 단체를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있어."

-민산의 실무는 총무와 산행대장이 맡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초대 총무인 김병환과 초대 산행대장인 정채권 목사가 중간에 그만 뒀다는데 이유가 뭔가요.

"나는 인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초대 총무인 김병환이 재주를 부렸겠지. 그 진위는 모르겠고 뒷말이 많았어. 본인이 상도동 출입을 하지 않아서…, 정채권 목사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회원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뭔가 구린데가 있어서 그런지…, 정권의 회유도 있었을 수도 있겠지…."

민주산악회는 산행대장과 총무가 실무를 맡아 움직였다. 하지만 5공의 와해공작으로 초대총무였던 김병환은 선경 이사로, 초대 산행대장인 정채권은 그 이전인 가을에 산행대장직을 사퇴했다. 2대 총무는 최형우 국회비서관 출신인 박정태가 맡았고, 2대 산행대장은 홍사일과 이우태가 이어 받았다. 이후 박정태는 신한민주당 선전국장으로 들어가, 그 바통을 김진억에게 넘겼고, 3대 산행대장은 이우태가 단독으로 맡았다. 김진억은 총무를 7년여 동안이나 맡으며 민주산악회를 김영삼 최대 사조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의 일화를 소개해주시죠.

"아버지가 4·19 전에 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에서 연탄공장을 하셨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중소기업이지. 그런데 경찰에서 복동규 사장 입당원서를 받으려고 회유를 계속하다 안 되니까 보복으로 단전·단수를 했어. 우리 집을 거쳐야 인근의 20가구에 공급이 되는데 그 걸 끊은 거야. 동네가 뒤숭숭했지. 내가 그 때 고3이었는데 동아일보에 투서를 했고 그 때 이만섭을 만났지. 나중에 경찰이 찾아와서 잡아가려고 해, 그래서 '영장'을 제시하라며 강하게 나오니까 '문제가 있으면 경찰인 우리한테 말해야지 신문사부터 찾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자세를 낮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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