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창을 아직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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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창을 아직도 꿈꾸는가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09.18 17:3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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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두왕' 반복창과 LG 일가 주식 대박
반복창은 일제시대에 지금의 주식에 해당하는 ‘미두(米豆)’로 조선 최고 갑부가 됐다가 순식간에 몰락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반복창의 대 성공을 꿈꾸며 일확천금을 노리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파산하고 또 파산했다.

반복창이 강화도 이방(吏房)의 아들로 태어난 해는 1900년으로 인천에 미두시장이 개설된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아버지가 지방 관아의 실무책임자여서 어린 시절 반복창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아버지가 직장을 잃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사업에 손을 댔지만 큰 손해만 보다 반복창이 12살 되던 해 큰 빚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반복창은 당장 먹고 살기 위해 배를 타고 인천으로 건너가 미두시장에서 명성을 날리던 일본인 아라키의 집에서 아이 돌보는 일을 하게 됐다. 아이를 돌보며 2년을 지낸 반복창은 14살에 아라키 중매점(오늘날의 증권거래소)의 ‘요비코’가 됐다. 반복창의 주 임무는 중매점에 모인 미두꾼들에게 인천과 오사카의 미두 시세를 소리 질러 전달하는 일이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미두꾼들에게 시세를 외치고 다니면서 반복창도 언젠가는 자신도 미두로 큰 돈을 벌겠다는 포부를 키워갔다. 세상에 눈을 뜨면서 보고 들은 것이 미두뿐이어서 반복창에게 미두는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반복창은 조선 최고의 미두왕
 
아라키는 반복창을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월급으로 6원씩 줬다. 박봉이었지만 반복창은 미래의 미두 밑천이라 생각하고 착착 모아뒀다. 그는 돈만 모은 것이 아니었다. 하루 일이 끝나면 그래프를 그려가며 밤을 새워 그날 시세를 연구했고 학교 문 앞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독학으로 일본어를 깨우쳤으며 해박한 경제 지식까지 쌓아갔다.

드디어 1918년 아라키는 19살 반복창을 ‘바다지’(場立, 중매점의 시장 대리인)로 전격 발탁하면서 축하의 의미로 ‘지로(次郞)’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줬다. 반복창이 아이돌보는 하인에서 반지로로 미두시장에 데뷔한 것이다.
 
▲ 일제시대 취인소(지금의 주식 시장) 거래 광경    


1919년 아라키가 인천 미두시장에서 거액을 챙겨 일본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라키의 180만 원을 포함한 300만 여 원의 부도수표를 떠안은 인천 미두시장은 1919년 3월 영업정지를 당했다. 방만한 경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총독부로서는 잘 나가던 미두시장을 폐쇄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1919년 6월 영업정지 석 달만에 미두시장은 자본금을 100만 원으로 늘려 다시 개장했다. 고향으로 돌아갔던 팔도의 미두꾼들은 파리떼처럼 다시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반복창이 미두 시장에 뛰어든 것도 이 때다. 그에게는 밑천은 부족했지만 어릴 적부터 미두 시장을 맴돌았던 경험이 풍부했다.
 
제2의 반복창 꿈꾸는 조선인들 파리떼 같이 인천 미두시장으로
 
일찍이 없었던 초유의 현상이 미두시장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복창이 찍는 대로 미두 시장이 움직여 단 1년 만에 40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했다. 현재 화폐가치로 약 4백억 원 정도였지만 국민의 80%가 농업에 종사하던 조선의 빈약한 경제구조 하에서는 4천억 원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반복창이 미두로 거부가 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선 일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미두에 미쳐 불에 뛰어들어 타죽는 불나방처럼, 파탄 나는 사례가 속출했다.

1921년 5월 반복창은 금력을 바탕으로 조선 최고의 미인이라던 ‘원동 큰 재킷’ 김후동과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유럽의 왕실 결혼식을 방불케 했으며 하객들을 위해 기차를 통째로 대절하기도 했다. 결혼식 당일 비용만 3만 원이 들었는데 지금 돈으로 30억 원에 해당한다.
 
반복창은 인천에 대저택을 짓고 호화생활을 했고 총독부의 거물들과도 친분을 과시했지만 독립자금이나 교육사업에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총독부 농간에 놀아난 반복창 3년만에 거지 신세
 
반복창이 ‘미두왕’을 넘어 ‘미두신’으로 불린지 3년쯤 되던 1922년부터 갑자기 찍는 시세마다 빗나가기 시작해 순식간에 전재산이 날아갔다. 가정도 이혼으로 깨졌으며 대저택도 빼앗기고 사기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다가 정신까지 돌아 1939년 10월 18일 나이 40에 초라하게 죽고 말았다.

반복창은 죽기 직전까지도 푼돈을 걸고 쌀값의 등락을 알아맞추는 도박인 ‘합백’에 빠졌다고 전한다. 반복창의 흥망성쇠의 무대였던 미두시장도 그가 죽고 20일이 지난 1939년 11월 7일 조선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반복창이 ‘미두왕’이 된 이면에는 총독부의 간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미두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총독부이고 시세를 결정하는 곳은 인천이 아닌 일본 오사카였다. 총독부가 미두 시장에서 조선인의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 반복창을 미끼로 활용했다.
 
파리 떼 같이 모여든 조선인들은 제2의 반복창을 꿈꾸며 미두시장에 돈을 쏟아부었고 그 돈을 총독부가 쓸어 담아갔다. 나중에는 반복창의 돈까지 다 가져간 꼴이 된 것이다.

미두가 주식으로 바뀐 지금도 제2, 제3의 반복창을 꿈꾸며 주식 시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주식에서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도 잊혀질 만하면 한 번씩 들리곤 한다.
 
LG그룹 일가의 주식 대박 소식을 접하며 ‘개미’들을 울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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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2018-01-17 03:37:56
비트코인에 부나방들이 몰려들고 타죽고 몇몇은 날아오르는 요즈음 다시금 와닿는 기사입니다

ㅇㅇ 2017-12-15 15:09:00
재밌는 기사 감사합니다! 그런데 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네요. 총독부가 반복창의 성공을 미끼로 조선인들의 돈을 긁어모았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사카에서 시세가 결정된다 하더라도 총독부가 수수료 외에 어떻게 돈을 긁어모을 수 있나요? 선물은 제로섬이라 손실을 보는 자가 있으면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복창이 손실을 보면 다른 투자자는 이익을 봅니다.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6081/8 반복창을 다룬 다른 기사와 내용이 많이 다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