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내란음모사건②] “1980년 서울의 봄은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②] “1980년 서울의 봄은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 한설희 기자·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5.17 07:4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통령이 본 정치史〉 사형수 김대중, 25년만에 무죄를 선고받다
김대중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내 마지막 유언"
노태우 "어떤 일이 있어도 전두환에게 독재자라는 말 듣게 할 수 없어"
김종필 "3金, 신군부에 의해 각개격파 당해…서울의 봄 무자비하게 짓밟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조서영 기자]

이 ‘대통령 회고사’는 〈시사오늘〉이 대통령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다. 우리의 첫 번째 재생은 현재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다.

2004년 1월,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의 선고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은 25년만에 완전 종료되는 듯 했다. ⓒ시사오늘 김유종
2004년 1월,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의 선고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은 25년만에 완전 종료되는 듯 했다. ⓒ시사오늘 김유종

1980.08.14. 오전

1980년 8월 14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첫 군사재판이 열렸다. 내란 음모의 주동자로 지목된 24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김대중은 연행된 지 90일 만에 공개 법정에 섰다. 피고인에 대한 공소장의 분량은 무척 방대해서, 검찰관 6명이 7시간 동안 번갈아가면서 읽어야만 겨우 낭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8월 14일 오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한 첫 번째 계엄보통 군법 회의가 열렸다. 육군본부 법정은 살벌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연루된 24명은 비로소 한자리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와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 씨 등은 내란 음모 혐의로 육군교도소에, 다른 사람들은 계엄법 위반 혐의로 서울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저들은 내게 내란 음모, 내란 선동, 계엄법 위반, 계엄법 위반 교사,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를 씌워 기소했다.

-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414-415페이지 中


다시 운명의 시작점, 1980.09.17

9월 17일, 19차 공판 시점으로 돌아가자. 김대중은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피고 김대중의 최후 진술 차례가 시작됐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죄와 벌을 받아도 잘못이 있다고 납득이 가야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거짓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나는 죽더라도 이 땅에서 정치 보복을 없애 달라”는 최후 진술은 이후 세계 각국에 전달되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나는 아마도 사형 판결을 받고 또 틀림없이 처형당하겠지만 내가 처형당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이 기회를 빌려 공동 피고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 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421-422페이지 中

 

1981.01.23.

대법원이 ‘김대중 사형’이라는 최종 확정판결을 내렸다. 이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레이건 행정부, 심지어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대법원의 결정에 반발을 표했다. 

이와 관련해 노태우는 자신 역시 대법원의 결정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뜻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등 사형 만류에 힘을 쏟았다고 주장한다.

1981년 1월 23일 내란음모죄로 재판을 받아 온 김대중(金大中)씨의 사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자 군 내부에서는 법대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나는 국내외적으로 볼 때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독재란 무엇인가. 정적(政敵)을 죽이고 장기집권을 하면 독재라는 ‘레터르(레토릭)’가 붙게 되는 것이다. 만일 김대중 씨를 사형집행 한다면 내 동기(同期)이자 친구인 전 대통령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고 독재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전 대통령은 7년 단임으로 그만둘 사람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그에게 독재자라는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전 대통령에게 했더니 그 역시 공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략) 김대중 씨를 사형집행하지 않음으로써, 전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 취임한지 며칠 되지 않은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頂上)회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권 264페이지 中

각계각층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전두환은 몇 시간 후 국무회의를 통해 김대중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킨다. 

 

1982.03.02.~1982.12.23.

3·1절 특별 사면으로 인해 김대중은 무기징역형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된다.

그가 기결수로 복역 생활을 하던 12월 10일, 노신영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청주교도소를 찾아왔다. 그는 김대중에게 미국 망명을 권유하며, 2~3년간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치료에 전념할 것을 권고한다.

12월 23일,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된 김대중은 결국 2년 7개월의 옥고 끝에 형 집행정지와 미국 강제 망명을 택한다. 안기부 직원은 “다시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할 것을 원했고, 김대중 이 같은 내용을 담아 다시는 정치판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친필 편지를 작성해 전달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의 편지 中

결국 나를 포함한 3김은 신군부에 의해 각개격파各個擊破를 당했다. 역사의 대전환을 꿈꾸던 1980년 서울의 봄은 이렇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증언록> 93페이지 中 

1987년 6월29일,김대중 대통령의 사면 복권이 실린 신문ⓒ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87년 6월29일,김대중 대통령의 사면 복권이 실린 신문ⓒ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04.01.29.

1995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내란음모 사건 및 광주 민주화운동의 피해자들에 대한 정치·법률적 구제가 가능해졌다. 이미 사면을 받았거나 형이 실효된 경우여도 유죄 또는 무죄에 대한 판단을 재차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대중은 대통령 재임 중이라는 이유로 재심을 미뤄오다 2003년 10월경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2004년 1월,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12.12사태 때부터 계엄 해지까지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신군부에 저항하는 정당행위에 대해서는, 사면 결정이 내려졌다고 해도 재심하도록 한 ‘5.18특별법’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내란음모죄와 계엄법위반죄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김대중, 내란음모죄 무죄. 

이렇게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은 완전 종료되었다. 25년 만의 일이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적 사실에서 유리한 것만 취하면 안 돼"

이렇듯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역사는 광주에 핏방울이 뿌려지고 억울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던 시기의 ‘투쟁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 역사가 현재 유시민 이사장과 심재철 의원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김학량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장은 지난 14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만한 ‘팩트’는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며 “문제는 알면서도 무시하고, 또 유리한 부분만 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이러한 현상을 ‘스핀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스핀’은 ‘돌리거나 비틀어 왜곡한다’는 뜻으로, 정치학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여론을 조작하고 비틀어버리는 일을 ‘스핀 전략’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여론을 조작하거나 유리한 것만 취해서 시민을 속이는 기술을 양 측에서 행하고 있다”며 “근거 자료를 통해 객관적 분석을 하는 것은 이제 대중매체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시사오늘〉의 ‘대통령이 본 정치史’는 대통령이라는 인물을 통해 시대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시대를 스쳐간 역사적 인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미화하거나 흑백논리로 재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정치인의 업적뿐만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역사, 고난과 역경 등을 종합해서 다루는 것이 김 원장의 말대로 우리에게 남겨진 역할이자 숙제다. 

이에 본지는 1948년 3월 작성된 노벨문학상 수상작,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 서문을 남기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마무리한다. 

“내가 말하는 것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고, 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을 썼다고 할 수도 없다. 내가 행동의 지표로 삼았던 시각에 따른 증언을 남길 뿐이다. 사실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다했다. 그러나 포획했던 각종 문서의 공개 또는 폭로 등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짐으로 인해서, 여기서 내가 내린 결론과 다른 견해가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누리꾼 2019-05-17 19:57:09
기사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