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6)]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 사장“民山 살아있다면 박사모·노사모 능가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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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6)]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 사장“民山 살아있다면 박사모·노사모 능가했을 것”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1.07.26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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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한국문제연구소’, ‘민주동우회’, ‘민주산악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등 김영삼(YS)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비선조직의 선봉에는 늘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현 아리랑 TV) 사장이 있었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YS 오른팔이었던 최형우는 학생 운동권을 규합하기 위한 ‘민주동우회’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이 때 실무는 ‘백영기’가 맡았다. 당시 핵심멤버는 서훈 서동전 정용택 씨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인사다. 이 조직결성으로 백영기는 5·17후 합수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YS 단식투쟁 1주년인 84년 5월 18일 탄생한 민추협의 활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은 서울 종로 일대 건물주들에게 민추협 사무실을 내주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해 6월 우여곡절 끝에 홍인길의 이름을 내세워 연구단체라고 속이고 서울 관철동 13층에 어렵사리 사무실을 계약했다. 하지만 민추협 정체를 확인한 건물주가 해약을 통보, 책상 의자 전화기 등 모든 집기를 들어내고 출입문을 폐쇄시켜버렸다.

이때도 ‘백영기’ 등이 주축이 돼 자물통을 뜯어내고 집기를 찾아 사무실내에 다시 옮겨놓은 일화가 있다.
백 전 사장은 왜 ‘민주화’와 ‘YS 대통령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였을까? 백 전 사장은 지도자는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인터뷰는 2011년 7월 20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사오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 사장 ⓒ권희정 사진기자


“70년 40대 기수론 당시 YS와 인연”

 

-YS를 어떻게 만나시게 됐습니까.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학년 재학 중에 6대 총선이 시작됐는데, 당시 시흥 지역에 있었던 유세에서 공화당 윤주영 장관과 신민당 유진산 의원이 맞붙었는데 유진산 의원에 대한 테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민주화가 돼야 겠다'라는 생각에서 유진산 의원을 만나 지원유세를 했습니다. 이후 3학년이 돼 제가 법정대 학생회장 등을 하면서 정치 현실에 계속 관심을 가졌고 졸업 후 당시 유진산 총재의 권유로 신민당에 입당을 해서 영등포 조직부 차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백 전 사장이 ‘김영삼계’의 일원이 된 것은 1970년 40대 기수론을 전후해서다.

"그 무렵 정치적 사건이 많았는데, 당시(1970년) 신민당 총무였던 YS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YS와 자주 만났습니다. 그 때 YS와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가 7대 대통령 신민당 후보를 놓고 경쟁했는데 저는 당 공보부장, 업무국장, 인권 부위원장 등을 맡으며 YS를 지원했습니다. 이후 유진산 총재가 서거 한 뒤에 상도동계에 정식 입문하게 됐습니다."

-YS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가 YS를 존경하는 것은 정(情)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산 활동을 하면서 매주 목요일 산에 올랐는데, 저는 민산 초기 멤버입니다. 민산 초기 때부터 YS는 산에 오를 때 절대 앉아 쉬지 않았습니다. 나무나 바위에 잠깐 기대어 서 있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면서 '백 국장, 어머님께서 편찮으시다는데 괜찮아'라면서 관심을 보이고는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정이 녹아있는 농담을 잘 던졌습니다."

그러면서 백 전 사장은 YS가 시간관념이 투철했다고 강조했다.

"제가 YS를 옆에서 모시고 많이 다녔는데 YS는 꼭 10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상도동 사람들이 새벽에 YS 집을 찾아가고는 했는데 아침 6시 정도로 일찍 안가면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만큼 YS가 부지런하고 시간관념이 철저했습니다. 시간관념을 책임성으로 봤습니다. 최형우 김동영 김덕룡 서석재 등이 약속을 정말 잘 지켰는데 다 YS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YS 집을 새벽에 찾아가면 시래기 국이 나오는데, 정말 유명합니다."

“김영삼, 최루탄 가장 많이 마신 대통령”

-YS가 일반정치인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YS는 돈이 들어오면 자기 주머니에 안 넣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 줍니다. 봉투에 넣지 않고 손에 쥐어줍니다. 자기 것 챙기는 것은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 줍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따뜻한 손으로 줬습니다. 황명수 전 의원이 제게 'YS에게 눈물 나도록 고맙다'라며 '돈이 없어서 전세방을 못 얻고 있는데 YS가 전세금을 줬다'라고 말한 게 생각납니다."

황명수 전 의원은 진산계 정치인이다. YS가 연금 중이던 80년대 초 민한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11대에 당선 된 황 전 의원은 수시로 상도동에 전화, 김영삼을 위로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황명수는 이때부터 YS의 철저한 신임을 받았다. 문민정부 후반기 국회 때 ‘YS는 국회의장으로 황명수를 생각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하지만 15대 국회에 황 전 의원이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자민련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김종필(JP)바람'이 거세, 그는 낙선했다.

"YS가 깨끗하지 않다면 하나회를 척결할 수 있었겠습니까. 본인이 깨끗하지 못하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금융실명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IMF 사태가 터진 책임을 YS에게만 묻는데 그 건 옳지 않습니다. IMF 사태는 시대적 흐름 성격이 강합니다. YS의 책임이 아닙니다. YS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이 최루탄을 마신 대통령입니다. 그 만큼 몸소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동교동계가 주먹은 셌지만 상도동계는 정신력 강해”

-YS의 최대 정치적 라이벌인 DJ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저는 민추협 대외국장 등을 하면서 '민정당 당사 점거' '건국대 점거' 등의 사건 현장에 항상 있었습니다. DJ가 '상도동에는 김덕룡 백영기 밖에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미문화원 사건(1985년) 재판 중에 DJ가 미국에서 귀국, 동교동에 집을 짓고 집들이를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미문화원 사건에 참여한 함운경 김민석 허인회 등의 부모님들에게 민주화가족협의회(민가협)를 만들도록 했는데, DJ와 이희호 여사가 저를 불러놓고는 민가협 부모들을 저녁에 집으로 초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초대한 날이 미문화원 사건 재판이 있던 날입니다. 그러다보니 70~80여명의 부모님들이 찾아갔고 DJ와 이희호 여사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특히, 이희호 여사가 '백 국장, 사람 많이 온다는 것을 얘기했어야 할 게 아니오'라면서 제게 호통을 쳤습니다."

-DJ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 같습니다.

"저는 DJ로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한국방송영상주식회사 사장이 되고 첫해에 동교동에 세배를 드리러 갔더니 이미 그런 내용을 다 알고 관심을 보여주더라구요. DJ가 응접실에서 귤을 손에 쥐고는 '어이, 백국장 먹어'라면서 '자네가 간 방송회사가 뭐하는 곳이야'라고 묻는 것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관심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동교동계 내부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겠습니다.

"동교동계 권노갑이 저보고 3선 의원이라고 해요. 동교동에 왔으면 3선이나 4선을 했을 거라는 겁니다. 민추협 국장단이 동교동 집들이에 갔을 때 제가 DJ에게 '의장님 부탁이 있습니다'라면서 평생 야당 생활 한 동교동계 국장들에게 비례대표를 많이 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DJ가 '백 국장 자네나 해'라고 말하더라구요."

“상도동계 DJ에게 세배 많이 갔지만 동교동계는 오지 않아”

"그런데, 제가 13대 총선 때 통일민주당 비례대표 17번을 받아서 모두 국회의원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DJ가 평민당을 만드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이 대목에서 백 전 사장은 허허 웃었다). 통일민주당에서는 비례대표 13번까지만 국회의원이 됐고 평민당에서는 비례대표 17번까지 됐습니다. 당시 DJ는 비례대표 1번이나 2번이 아닌 한참 후순위인 15번으로 나서는 방법으로 평민당이 긴장 속에서 선거를 치르도록 했습니다.  DJ가 평민당을 만들지 않았으면 저는 국회의원이 됐을 것입니다."

-많은 상도동계 인사들이 DJ에 대해 좋은 소리를 하지 않는데 백 전 사장은 안 그러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DJ가 약속을 안 지키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일례로 당시 동교동계에 유홍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부인이 가수 김상희 입니다. DJ가 평민당을 만들 때 유홍근과 감상희가 많이 도와줬다고 해요. 유홍근 아버지도 정치권의 대 원로였고 DJ를 도왔습니다. 그래서 DJ가 유홍근에게 전주에 사무실까지 차리라고 했다고 해요. 하지만 결국에는 공천을 주지 않았어요. 유홍근이 나중에 저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서운함을 토로했어요."

-동교동 측도 상도동 측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 듯 싶습니다.

"상도동 사람들은 DJ에게 세배하러 많이 갔습니다. 하지만 동교동 사람들은 YS에게 세배하러 많이 가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DJ를 의장님이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동교동 사람들은 저희들을 '삼돌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YS도 '영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울 중구 중림동에 통일민주당 당사가 있을 때입니다. DJ가 평민당을 만들기 직전입니다. 그 때 이용희가 총재인 YS를 비하하는 발언을 한 일이 있습니다. 아마 'YS는 기초 지식도 모른다'라고 했을 겁니다. 그래서 상도동계에 비상이 걸렸고 당사 정문에서 이용희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 주먹은 동교동계가 강했습니다. 대신 상도동계는 정신력이 강했습니다. 결국은 당사 앞에서 소란이 있었는데, 나중에 YS를 찾아 갔더니 '백 국장, 너 깡패야'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그런데 정이 녹아 있는 호통이었습니다. 제가 YS를 위해서 한 행동이니 속으로는 좋아했을 겁니다."

“YS, DJ에 측은지심 느껴”

-YS는 DJ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YS와 DJ가 단일화 협상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는 신라호텔이었습니다. 그 때 YS가 협상장을 나오면서 제게 이런 말을 전하더라구요. 'DJ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 파이프를 떨어뜨렸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이 테이블 아래로 머리를 숙여 파이프를 다시 줏는 모습을 보니 안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YS가 DJ에 대해 측은함 같은 것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YS는 'DJ와 단일화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면 정말 뭔가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DJ가 문 밖에 나오면 다른 얘기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YS와 DJ가 함께 만든 민추협 활동 당시 일화가 있습니까.
 

저는 민추협 발기인 입니다. 민추협 결성 때 65명 정도가 참여했습니다. YS 김상현 이민우 복진풍 등이 참여했는데 저는 초대 인권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 때(1985년) 美문화원 사건이 터졌습니다. 제가 아침에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박찬종 인권위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미문화원에 대학생이 들어갔다'라면서 '가족들이 연세대에 모인다고 하니 연세대 정문에서 만나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연세대 정문으로 갔는데 당시 거의 준 계엄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장 경찰들이 정문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깐 박찬종 위원장과 주변 다방에서 차를 마셨는데 박 위원장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연세대에 안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대신 저보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시 박 위원장의 신분증(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연세대에 들어갔습니다."

김영삼의 단식투쟁 1주년을 기념해 탄생한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추협은 민주산악회라는 굳건한 뿌리와 YS의 단식투쟁이라는 밑거름, 그리고 동교동계와의 연합을 통해 이뤄졌다. 민추협이 결성되기까지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괴롭힘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다. 이와는 별개로 민추협이 만들어지기까지 가장 큰 어려움은 상도동(YS)과 동교동(DJ)의 연대였다. 이들이 하나의 합작품(민추협)을 만들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동교동쪽은 ‘선장(DJ)’이 없다며 민추협 참여를 놓고 내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박영록 김종완 박종태 등은 “선장이 없는 상태에서 김영삼에게 붙으면 조직이 와해된다”며 YS와의 연대를 결사반대했다. 반면 김상현 조연하 김녹영 박종률 등은 공동전선 구축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견 때문에 몇 개월간 논란이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체류 중 이었던 DJ는 “동교동계만의 독자노선을 만들라”며 YS와 연대를 반대했다. 하지만 DJ의 이러한 메시지는 제대로 먹혀들지 못했다. YS와의 연대를 강력히 주장한 김상현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 때문이었는지 열댓 명 정도의 대학생 부모님들만 와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민추협이 결성됐고 YS와 DJ가 의장에 추대된 사실 등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학생들을 만날 수 있도록 이와 관련해서는 우리에게 위임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별로 호응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민추협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이후 무교동 사무실에서 김민석 어머니 등 대학생 부모님들을 설득해서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러다가 미문화원 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데 제가 어머님들에게 속치마를 입고 재판정에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이 진행될 때 그 속치마를 찢어 머리띠와 어깨띠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대학생 부모들이 민주화 문구가 적힌 머리띠와 어깨띠를 재판정에서 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사건 때문에 재판정이 뒤집혔습니다. 큰 사건이었습니다."

상도동계, 여전히 살아있는 유일한 조직

 

-민산은 YS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움직였나요.

"3당 합당 직후에 민산이 활발히 움직이게 됩니다. YS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이죠. 3당 합당 이후에 민산 회장은 최형우가 맡았고 본부장은 박태권이었습니다. 제1본부장은 제가, 제2본부장은 박정태가 맡았습니다. 연수원장은 노병구 선생이 맡았고, 여성위원장은 오사순 이었습니다. 그 때 전국에서 유세가 있을 때면 전국 민산 지부로 하여금 민산 깃발을 흔들게 했습니다. 유세장에서 민산 깃발이 출렁거리게 한 것입니다. YS가 유세차를 타면 그 옆에 민산 지부장을 앉혔고 유세 단상에서는 지부장 손을 잡아들어 올리고는 했습니다. 민정계는 민산 깃발을 흔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민산 지부장을 단상에 올리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최형우는 제게 '백영기, 밀어 붙여라'라고 했고 YS는 모른 채했습니다. 3당 합당이후 민산 지부장들은 힘 있는 사람들이 맡았습니다. 유세장에서 민산 붐이 일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민정계도 YS에게로 기울었을 겁니다."

-YS가 부산·경남 뿐 만 아니라 대구·경북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
 

"YS가 대구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유성환 전 의원이 대구에서 출마했을 때입니다. 당시 연금돼 있는 YS 지시로 제가 손명순 여사와 YS의 막내 딸 혜숙 양과 함께 유세 지원을 갔습니다. 한 초등학교 운동장이 사람들로 꽉 찼는데 '제가 손 여사가 왔습니다'라고 얘기하니까 청중들이 열광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손 여사와 악수를 하려고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제가 그걸 말리다보니 입고 있던 바바리코트 단추가 다 떨어져 나갔을 정도입니다. 그 때 혜숙 양이 '아버지가 대구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혜숙 양은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어머니를 모시는 차원에서 따라왔던 것입니다. YS 자제들 중에 김현철을 빼고는 어느 누구도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대구·경북에는 아직도 YS 정서가 남아있습니다."

29세 때 경북 도의원에 당선된 뒤 25년간 야당에서 잔뼈가 굵은 유성환은 당시 4선 관록의 민정당 한병채와 국민당 이만섭을 압도하며 1위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당시 대구에서 YS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손명순 여사가 유성환 후보의 지원유세를 한 후 유세장을 나가자, 다급해진 국민당의 이만섭 후보는 손 여사를 향해 “사모님, 저 동아일보 출신입니다. 예전에 기자로 있을 때 YS를 뵈었는데 안부 좀 전해 주십시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유성환 얘기가 나오니까 기억이 나는데, 5공 청문회 스타로 노무현과 김동주가 뜰 때입니다. 그 때 유성환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교도소에 있는 대학생들이나 민주화 운동가들을 면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가운데 가장 적게 면회를 간 사람이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자기 혼자 잘났다'라는 그런 것이 느껴졌습니다."

박근혜, YS 직접 찾아가 관계 풀어야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민산을 해체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YS가 깨끗하게 대통령이 됐기에 민산을 해체했는데 지부장들이 서운하게 생각했습니다. 민산을 해체하지 않고 순수한 민간단체로 놔두었다면 요즘의 박사모나 노사모 보다 훨씬 큰 조직이 되었을 겁니다. 민주화를 위해 공을 세우고 정이 참 많은 조직이었습니다. 박사모와 노사모는 대통령을 만드는 조직에 불과하지만 민산은 대통령을 만든 것은 물론, 독재에 항거한 조직입니다."

-현재 차기 대권주자로 가장 유력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YS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이회창과 박근혜만 YS에게 세배하러 오지 않습니다. 박근혜가 직접 풀어야 합니다. (YS가 박 전 대표의 부친인 故박정희 전 대통령을 쿠데타 주역으로 비판하더라도) 박 전 대표가 대통령과 같은 큰 사람이 되려면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게 예의입니다. 누가 뭐래도 YS가 대선배 정치인입니다. 그리고 YS가 무슨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전직 대통령을 형무소에 보낸 건 본인이 깨끗해서 그런 게 아닙니까. (참고로) YS가 서청원이 친박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문제를 삼고 있지 않습니다. 요즘도 서청원이 YS를 자주 찾아뵙고 하니까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YS가 차기 대선에 관여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저는 YS가 어느 정도 관여는 해야 한다고 봅니다. YS는 국민과 나라를 제일 걱정하는 분입니다. 그런 만큼 크게 관여하는 건 그렇지만 지도자로서 중심을 잡아주는 모습은 보여줘야 한다고 봅니다."

-YS계의 정치적 영향력은 아직 유효한가요.

"동교동계에는 특별한 모임이 없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과 관련해 살아있는 조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동지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 김봉조 전 의원이 회장을 맡고 있는데 오늘도 문정수 심완구 등 30여명의 이사들이 나와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습니다. 신년 전체모임에는 YS도 모십니다. 옛날 조직을 이어서 계속 활동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 저희는 봉사활동을 하러 다니기도 합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 힘들었던 점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전두환 정권 때 제가 자주 연금을 당했습니다. 그 때 초등학생인 막내아들이 '아빠 죄 지었어'라고 묻는 겁니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저보고 빨갱이라고 의심했습니다. 한 번은 중학생인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유리를 깼는데 어느 선생님이 '이 놈의 새끼 너도 야당하냐'라고 했다고 해서 제가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백 전 사장은 마지막으로 전두환 정권 때의 일화를 풀어놨다.

"전두환 정권 때입니다. 강원도 민산 지부가 하계 단합대회를 화진포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한 회원이 저한테 와서 '민한당 이원범 의원이 왔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이원범이 있다는 곳으로 가보니 텐트에 현성일과 함께 나란히 앉아 있더라구요. 제가 주먹으로 이원범을 한 방 때렸습니다. '민산에서 행사를 하고 있으면 인사하러 와야 되는 게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고성 경찰서 정보과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고성 경찰서장도 이런 사실을 다 알았죠. 사건이 커졌는데 제가 이원범을 불러서 '내가 구속되면 너는 서울에 못 온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말해서 결국은 조용히 넘어가게 됐습니다. 나중에 전두환이 '백영기가 어떤 놈이냐'라면서 물어봤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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