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납치사건] “살려주십시오,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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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납치사건] “살려주십시오,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6.27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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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네 번째 이야기, 1973년 그 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이희호의 회고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1971년 동교동 자택에서 찍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족 사진ⓒ김대중평화센터
1971년 동교동 자택에서 찍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족 사진ⓒ김대중평화센터

‘대통령 회고사’는 <시사오늘>이 대통령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다. 우리의 네 번째 재생은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1973.08.08.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이었다. 도쿄의 아침은 덥고 습했다. 김대중은 비서와 함께 민주통일당 양일동 총재를 만나기 위해 묵고 있던 도쿄 힐튼 호텔 방을 나섰다. 그는 김군부 비서에게는 호텔에 남아 있으라고 한 뒤, 김강수 비서와 함께 택시를 타고 오전 11시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도착했다.

“똑똑-”

양 총재가 묵고 있는 2211호실 문을 두드렸다. 양 총재가 김대중을 반갑게 맞았다. 양 총재와 김대중은 한국의 정치 상황과 시국에 대해서 여러 얘기를 나눴다.

“이제 그만 한국에 들어오면 어떻겠소.”
“나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모두 어용(御用) 야당질을 하는데 내가 들어가 무얼 하겠습니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도중 또 한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민주통일당 김경인 의원이었다. 셋이서 함께 점심을 먹은 뒤, 김대중은 오후 1시 쯤 자민당 기무라 토시오(木村俊夫) 의원을 만나기 위해 김 의원과 호텔 방을 나섰다. 

그때 어디선가 건장한 사내 대여섯 명이 뛰쳐나왔다. 그중 3-4명이 김대중을 옆방 2210호로, 남은 두 명은 소리 지르는 김 의원을 양 총재가 있는 2211호로 밀어 넣었다.

“뭐하는 짓이냐? 어디서 왔느냐?”
“양일동 선생, 우리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국내 문제니까 조용히 처리합시다. 곧 끝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시각 2210호, 사내들은 김대중을 침대 위에 팽개친 후 손수건을 코에 두고 눌렀다. 김대중은 한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깼다. 같은 시각 2211호, 김 의원은 걱정이 돼 2210호 앞을 갔지만 사내들이 계속해서 일이 끝나지 않았다며 저지했다.

이후 그들은 김대중을 승용차 뒷자석에 앉히고 다리로 머리를 눌렀다. 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은 삽시간에 22층 호텔 방에서 멀어졌다. 

마침 호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강수 비서는 김대중이 약속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22층으로 올라갔다. 분위기가 심상찮다고 느낀 김 비서는 빈 객실을 정돈하던 종업원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다그쳤고, 이미 김대중이 떠난 2210호엔 약품 냄새가 풍겼다. 복도로 나오니 건너편 2215호실 문이 열려 있었다.

오후 2시 5분, 김 비서는 조활준 수석비서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렸다. 실종 소식이 처음으로 호텔 바깥으로 알려졌다. 2시 40분, 조 비서는 경찰에 신고했다. 비슷한 시각 경찰과 기자들이 호텔 범행 현장에 도착했다.  

집에 돌아와서 조금 지났을 때다. 일본 방송 기자들이 우르르 들이닥치더니 집 안 여기저기에 카메라를 돌렸다. 유신 선포 후 10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로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중략) 영문을 모른 채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김대중 씨가 도쿄 호텔에서 행방불명된 것을 아느냐?” 목소리는 이 한마디를 툭 던지고 이내 끊어졌다. (중략) 극심한 불안이 덮쳐왔다. 간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초조함이 엄습했다. 퇴근한 큰아들은 “아버지!” 하고 부르며 통곡을 했다.
- 이희호 자서전 <동행> p.134

8일 늦은 오후, 부산에 머무르고 있는데 황인성 총리실 비서실장이 전화를 했다. “김대중 씨가 일본 도쿄에서 누군가에게 납치됐다”는 보고였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으 돌아다니며 유신 반대 운동을 하고 한민통(한국민주통일연합)이라는 반정부 조직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오후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최초 보고를 받았다. (중략) 자칫하면 국교 단절과 같은 심각한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사안이었다.
- 김종필 증언록 p.440-442

기가 막힌 일이었다. (중략) 김대중이 비록 대통령 후보 경쟁에서 나의 경쟁자이긴 했지만 납치사건은 개인의 사건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에 대한 투쟁은 야당의 의무였고 나의 신념이기도 했다.
- 김영삼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p.27

이윽고 어느 빌딩 주차장에 김대중을 실은 차가 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끌려 간 방에서 사내들은 김대중을 묶고 있던 끈을 풀고 옷을 벗겼다.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히고는 다시 끈으로 몸을 묶고, 강력 테이프로 얼굴을 제외한 몸 전체를 둘둘 감았다. 

두 손과 두 다리를 모두 묶인 김대중을 실은 차는 30분 간 달렸다. 도착한 곳은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해안이었다. 보트 위에서 사내들은 머리에 보자기 같은 것을 씌우고 계속해서 때렸다.

나는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매일 기도를 올렸고, 납치되어 이동 중에도 하느님을 찾았다. 그런데 이 마지막 순간에는 기도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바닷속에서 맞이 할 최후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중략) 그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살려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 주십시오.” 나는 세례를 받은 후 처음으로 예수님께 살려 달라, 구해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자 순간 눈에 붉은 빛이 번쩍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엔진 소리가 폭음처럼 요란하더니 배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내달렸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p.312-313

“비행기다!”

사내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모든 일이 긴박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보자기에 가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김대중 선생님 아니십니까?”
“(끄덕)”
“선생님은 이제 살았습니다.”

당시 그 비행기에 대해 논란이 있다.

내가 극적으로 생환한 것은 미국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브 대사는 한국 내의 모든 정보 팀을 소집했다. 거기에는 한국에 부임한 지 한 달 남짓 되는 도널드 그레그 CIA 한국 책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비브 대사는 긴박하게 지시했다. “김대중 씨가 납치되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것 같으니 빨리 정보를 수집하라. 그를 살려야 한다.” (중략) 하비브 대사가 나를 살렸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p.323-325

이후락은 정보부에서 파견 나간 김재권(본명 김기완) 주일공사에게 도쿄에 머무르고 있는 김대중 납치를 지휘하라고 지시했다. 아예 김대중 손과 발에 쇠뭉치를 달아서 바다에 집어던지라고 했다는 말도 있었다. 배 위에 현장에서는 공작원들이 차마 김대중을 죽일 수 없어서인지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해탄을 건널 때는 중앙정보부의 대북 공작선 용금호가 동원됐다. 김대중 씨는 자기가 태운 배가 바다를 건너는데 미군 비행기가 빙빙 돌면서 보호해 주는 바람에 살아나게 됐다고 회상했는데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이다. 깜깜한 한밤중 현해탄에 갑자기 비행기 한 대가 1000t짜리 배 한 척을 찾아내 그 위에서 빙빙 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김종필 증언록 p.440-442

수장의 위기는 당시 하비브 주한 미국 대사와 도널드 그레그 한국 정보 책임자의 공조가 이뤄낸 구출 작전이었다. 김대중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온 하비브 대사는 3시쯤 납치 보고를 받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 청와대에 박 대통령에게 직접 강력히 항의했다고 한다. 너무 긴박한 나머지 본국 훈령을 기다릴 수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수장 직전 나타난 비행기를 미국 헬리콥터라고 믿었는데, 후에 한국 주재 대사를 역임한 그레그는 일본 영토이므로 미국 비행기는 아니라고 정정해주었다.
- 이희호 자서전 <동행> p.138-140

1973.08.11.

이후 배는 9일과 10일 이틀 간 바다에 떠 있었다. 11일 새벽이 돼서야 배가 한국의 어느 항구에 정박했다. 사내들은 더 이상 김대중을 묶지는 않았지만 대신 입을 막고 눈을 가렸다. 항구에는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구급차로 보이는 차가 내달린 곳에서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김대중에게 영양제라며 작은 알약 두 개를 줬다. 그걸 먹자마자 김대중은 졸음이 쏟아졌다. 수면제였다.

1973.08.12.

김대중이 눈을 뜨니 8월 12일 아침이었다. 잠든 사이에 다시 장소가 옮겨져 있었다. 머리가 짧은 사내들이 지키고 있는, 어딘지 모를 장소에서 김대중은 또 하루를 보냈다.

1973.08.13.

납치 엿새째였다. 오후가 되자 사내 하나가 김대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김대중 선생, 얘기 좀 합시다.”
“왜 선생은 해외에서 국가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겁니까?”
“그런게 아니오. 내가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반공 체제를 부인하거나 반대한 일은 없소. 나는 대한민국에 대해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소. 내가 반대하는 것은 독재 정권이지 국가가 아니오.”
“국가가 정권이지, 국가와 정권이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이오.”

김대중은 말을 멈췄다. 그러자 사내가 화제를 바꿨다.

“김대중 선생, 협상 좀 합시다.”
“말해 보시오.”
“지금부터 선생을 차에 태워 자택 근처에다 풀어드릴 작정입니다. 상부 명령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지만 차에서 내리면 거기서 소변을 봐 주십시오. 그 사이에 붕대를 풀어도 안 되고, 소리를 내도 안 됩니다. 소변을 다 본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어떻습니까?”

김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은 다시 김대중을 차에 태우고 달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국동맹행동대’라고 말했다. 무엇하는 단체냐 물었지만 말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한참을 있다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반공하는 단체”라고 설명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라고 짐작되는 곳을 지났을 때 신분증과 명함을 돌려주었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p.316 

납치에서 풀려난 후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김대중평화센터
납치에서 풀려난 후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김대중평화센터

김대중은 동교동 집 근처 골목에 서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누구세요.”
“나다, 나야.”

나는 처음부터 정보부 소행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일본 정부도 적극적으로 수사하는 것 같지 않고, 정권의 바람잡이로 전락한 야당은 눈치를 보며 우물거렸다. 반면에 미국과 일본 등 국제사회에서는 뜨거운 이슈였다. 행방불명 6일째 되던 날인 13일 저녁 (중략) 김한림 여사와 안순덕 씨, 김정례 씨와 안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응접실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오셨어요!”, “의원님이 오셨어요!”
- 이희호 자서전 <동행> p.133-137

김대중이 돌아온 지 10분 쯤 지나자 내외신 기자들이 거실로 들이닥쳤다. 기자회견은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30분까지 계속됐다.

사건 추이를 따라가면서 수시로 내게 보고하던 황인성 실장이었다. “8일 행방불명 됐던 김대중 씨가 서울 동교동 자택에 나타나 지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서울로 올라가 오후에 박정희 대통령을 뵈었다. 박 대통령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대뜸 “임자는 몰랐어?”하고 물었다. (중략) 박 대통령은 “아 글쎄, 이후락 그자가 서울에 김대중을 데려다놓은 후에 나한테 보고를 하잖아. 나한테 한마디도 않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라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그제야 나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박 대통령이 지시했거나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했다. 김대중 납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이 또 일을 저질렀구나”하고 탄식했다.
- 김종필 증언록 p.440-442

“1969년 6월 20일 이 사람은 초산 테러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략) 이번 김대중씨 사건도 역시 지금까지 있었던 정치테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번 이 김대중씨 사건은 지난날의 어떠한 정치테러보다도 훨씬 규모가 크고 국제성을 띤 엄청난 정치적인 ‘테러’입니다.”
- 김영삼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편 p.27-38 본회의 질의 中

1973.09.05.

“범행 현장에서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지문이 나왔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일본 수사본부는 그간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김 서기관의 출두를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 대사관은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일본 정부는 가을로 예정된 한일 각료회의를 무기한 연장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최대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중략) 10월 31일 오후 청와대로 올라갔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사안이 중대하니 아무래도 도쿄에 직접 가서 일본 총리를 만나 사과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이후락 부장이 “거기는 갈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가라앉을 겁니다”라고 끼어들었다. 화가 불같이 솟았다. (중략)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박 대통령은 나에게 “임자 말이 옳아. 다녀오시오”라고 말했다.
- 김종필 증언록 p.443-447

한편 김대중은 박정희의 승인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1998년 6월 10일 미국의 비밀 문건이 공개됐다. 이 문건에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한 정보부원의 소행이며 박정희 대통령이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지시한 것은 확실하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p.323-325

1973.11.02.

결국 납치사건 발생 석 달 만에 김종필은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다나카 총리에게 박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일로 인해 일본 국민, 정부에 대해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대한민국 총리가 직접 와서 유감을 표하고 진상을 철저히 밝힌다고 확인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한 데 높이 평가한다. 이걸로 됐다.”

내가 이후락에게 “일본으로 사과하러 가는 마당에 사건 경위와 진상이라도 알고 가야 할 것 아니오”라며 구체적인 사건 경위를 물어봤다. 이후락은 “나는 잘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 김종필 증언록 p.443-447

김 총리를 다음 날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에게 박 대통령 친서를 건네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납치극의 추태를 씻어 보려는 비루한 작태였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p.327-330

1973.12.03.

그해 말 박정희는 납치사건과 한일 외교적 파장의 책임을 물어 이후락을 해임했다. 해임으로 사건이 수습됐는지 여부에 대해 김대중과 김종필은 확실한 입장 차를 보였다.

박 대통령은 12월 3일 납치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경질했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유임시켰다. 하지만 각료 몇 명을 바꾸는 것으로 민심은 결코 수습될 수 없었다. 
- 김대중 자서전 1편 p.332

그렇게 김대중 납치 사건은 간신히 수습됐다. 그해 말 박 대통령은 납치사건과 외교적 파장의 책임을 물어 이후락을 해임했다. 
- 김종필 증언록 p.443-447

하나의 사건, 두 가지 팩트

2019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치 테러와는 거리가 먼 세상에 있다. 1969년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산 테러도, 1973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사건도 그저 ‘옛날 옛적의 먼 이야기’가 됐다.

이름밝히기를 거부한 모 대학의 한 교수는 27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그저 ‘독재 나쁘다’는 것 말고는 현대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회고록은 하나의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그 시대를 풍미(風靡)한 사람들이 살아온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같은 날 “이 사건은 50-60대만 알지, 30-40대도 과정은 잘 모를 것”이라며 “그럼에도 시간이 지난 뒤 평가하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평가가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이어 강 대표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하나의 사건에 대해 두 개의 팩트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전제한 뒤, “가해자는 그저 경고의 의미를 보내려고 하지만, 피해자는 죽인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통해 극단적 대립을 하는 정치적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느끼는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달리 해석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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