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되짚기③] 김현 “비폭력 평화투쟁 6월항쟁, 승리의 기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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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되짚기③] 김현 “비폭력 평화투쟁 6월항쟁, 승리의 기억은 계속된다”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9.07.25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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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
비폭력 평화 투쟁, 6월 승리의 기억
헌법 전문, 5·18, 6·10 항쟁 담겨야
2022 문재인 정부 4기 성공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시사오늘은 앞으로 시민사회의 힘으로 군부 퇴진 및 직선제 쟁취를 이뤄낸 6월 항쟁의 주역들을 만나 당시의 의미와 평가, 과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시사오늘은 앞으로 시민사회의 힘으로 군부 퇴진 및 직선제 쟁취를 이뤄낸 6월 항쟁의 주역들을 만나 당시의 의미와 평가, 과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김민석의 어머니도, 유시민의 누나에게도 꽃 한 송이씩 들려있었다. 예쁜 장미꽃이었다. 최루탄이 난무했고 쇠파이프가 번쩍거렸다. 갑옷처럼 중무장한 청년의 얼굴은 앳됐다. 고작해야 스물 셋 넷쯤 됐을까. 무시무시한 백골단이라고는 하지만, 엄마가 지어준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스한 밥 한 공기 내밀면 금세 누그러질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가슴팍 위로 장미꽃 한 송이를 달아줬다. 꽃일 뿐인데, 우는 청년도 있었다.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 굽이굽이 여성의 힘은 위대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주먹밥을 날랐던 손길들. 그 정신이 6월 한복판에서는 꽃으로 꽃이 돼 전달됐다.

"독재 타도 호헌철폐." 송이송이 직선제 쟁취의 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승리의 기억이 됐다. 평화 투쟁 비폭력 투쟁. 시민을 품은 거대한 용광로, 꽃의 바다가 됐다. 

87년 6월 항쟁은 정권교체의 시작점이었다. 또한 여성 사회 참여 확대의 동력이 됐다. 이들은 그 시절을 지나 광우병 때는 유모차를, 세월호 때는 나비 리본을, 박근혜 탄핵 국면 때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만났다. 장미로 뒤덮인 87년 6‧10 항쟁이 17년 5월 9일 장미 대선으로 이어졌다. 엄마들이 기억하는 공통된, 승리의 데자뷔였다.

6월 항쟁 되짚기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 정치평론가), 민주 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을 조명했다면, 이번엔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을 짚어본다.

전대협 총학생회 간부 중 국회의원 출신의 유일한 여성 정치인,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현 이해찬 당대표 사무부총장). 인터뷰는 지난 16일 여의도 국회에서 가졌다.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87년 6월 항쟁의 상징적 특징은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달아준, 비폭력 평화투쟁에 있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87년 6월 항쟁의 상징적 특징은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달아준, 비폭력 평화투쟁에 있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종철 고문치사,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
6월 항쟁의 불 댕겨…전국 공분 들끓어”

- 6월 항쟁 당시 무엇을 했나.

김 전 의원은 이 물음에 “한양대학교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맡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했다.

학번은 84학번. 1984년 한양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학과 특성상 일찍이 역사에 눈을 떴다.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 이 구절로 인해 현대사 공부에 관심이 갔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직접적 계기는 5‧18 광주 학살의 진상을 접하면서부터다. 고등학교 때는 알지 못했던 이야기. 정권의 만행에 분노했다. 1987년은 대학 4학년 때였다. 그해 2월 고문치사로 인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전국이 들끓었다. 김 전 의원은 이 사건을 비롯해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사가 6월 항쟁의 불을 댕긴 직접적 원인이라고 했다.

- 도화선으로 보는 이유는.

“무고한 대학생이 물고문으로 죽임을 당했다. 정권 차원에서는 이를 은폐했다. 서울 구치소를 통해 세상 밖으로 폭로되면서 걷잡을 수없이 공분이 일었다 ‘박종철 열사 살려내라’ 3월 학기 시작 전부터 종로, 명동 일대에서 대대적인 규탄 집회가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이 호헌을 하겠다면서 장기집권의 음모를 표출시킨 시점이었다. 서울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대학가에서 학사일정을 전면 거부했다. 우리 학교 역시 총학생회 특별위원회 투쟁기구가 만들어졌다.

학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전체 학생의 90%가 모였을 정도다. 날마다 가두집회가 있었다.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고 희생됐다. 6월 10일은 범국민적 저항운동의 분기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담장을 넘어 시민들이 쏟아졌다. 저마다 독재 타도, 호헌철폐,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외쳤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9일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가 항복 선언을 했다. 그것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6‧29 선언이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 열사는 스물두 살이던 1987년 1월 13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다음날까지 고문과 폭행을 받다 사망했다.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였지만,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사건을 축소 은폐 조작했다. 하지만 끝까지 쉬쉬할 수는 없었다. 감옥에서 우연히 실체적 진실을 알게 된 이부영 당시 민통령 사무처장은 쪽지를 작성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을 통해 온 천하에 알렸다. 이한열 열사는 연세대 경영학도로 학교 앞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 규명 시위를 하던 중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스무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자신을 가수 이선희로 착각한 전경들에 의해 잡혀간 적도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자신을 가수 이선희로 착각한 전경들에 의해 잡혀간 적도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6‧29 선언 직전 계엄령 발포 설도
이선희인 줄 알고 전경들 손에 잡혀가”

- 6‧29 선언을 받아내기까지 굉장히 긴박했을 것 같다.

“6‧29 직전에 계엄령 발포를 한다는 설이 돌았다. 6월 23, 24일쯤이었다. 적막강산이라는 표현이 맞을 거다. 우리 학교도 최소 인원만 남기고 학생들을 다 밖으로 내보냈다. 나는 학교 안에 있었다. 남아있는 학생들은 자칫 연행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끼리는 극단의 걱정까지는 안 했던 것 같다. ‘전두환이 80년대 광주 때처럼 설마 그렇게 하겠어’ ‘총학생회 간부니, 소재지 파악은 될 텐데,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야 하겠어.’ 그런 얘기도 하고….”

- 당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고마운 이들, 동지들과 얽힌 일화가 있나.

“한번은 가두시위 벌이다가 현장에서 잡힌 적이 있다. ‘박종철을 살려내라’ 외치던 중 백골단(전경)이 나를 끌고 갔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마를 때였다. 체구가 작고 더 왜소(당시 몸무게 38Kg)할 때다. 네 명이서 나를 바짝 들어 올려 닭장차(경찰차)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전경들이 뭐라고 했냐면 나보러 가수 이선희인줄 알았다더라. 이선희가 시위하는 줄 알고 눈여겨보다 잡아간 거였다. 당시 이선희는 조용필과 함께 우리 세대의 우상이었다. 훗날 청와대 춘추관에서 근무할 때 직접 이선희 씨를 만나 사인을 받았다. 물론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웃음)”

김 전 의원은 노무현 참여 정부 당시 역대 첫 여성춘추관장에 발탁된 바 있다. 이후 역대 최장기 춘추관장으로 있었다.

- 혹시 학교 때 별명이 이선희였나.

“아니다. 교내에서는 땅콩, 전대협 안에서는 행당산 산토끼로 불렸다.”

- 행당산 산토끼?

“우리 학교로 수배 중인 총학생회 간부들이 많이 와 있었다. 수배 중이니 먹을 거라도 제대로 먹었겠나. 이들을 위해 학교 앞 자장면 집에서 주로 도시락 배달을 해왔다. 추억의 도시락이라고, 양은 도시락에 자장밥과 달걀 프라이가 얹어있었다. 주로 내가 밖에 나갔다 왔다. 조그맣고 왜소하니, 대학생 같지가 않아, 감시망을 뚫기가 수월했다. 그런 나보고 우상호 의원(당시 연대 총학생회장)이 행당산 산토끼라고 불렀다. 한양대가 행당동에 있다. 산 이름도 행당산이었다. 그걸 따 지어준 거였다.”

같은 학교였던 임종석 전 비서실장 얘기도 나왔다. 임 전 실장은 김 전 의원보다 2년 후배였다. 87년 2월 한양대 총학생회에서 6월 항쟁을 준비하며 노래패를 만들었다. 임 전 실장도 거기서 활동했다. 이후 임 전 실장은 1989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고, 전대협 3기 의장으로 활약했다.

김 전 의원은 고마웠던 분들도 있다며, 명동성당 집회 때를 상기했다.

“6월 항쟁 전 학생, 재야, 시민 모두가 명동성당에 집결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가량 성당을 점거하고 철야 집회를 했다. 호헌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정권에서는 모두 다 연행하려고 했다. 천주교 신부는 그럴 수 없다며 막아섰다. 다행히 접점을 찾은 것이 안전한 귀가 조치였다. 6월 14일 경찰 쪽에서 이를 수용하면서 한양대 스쿨버스가 동원됐다. 우리 대학 학생처와 교수들이 협조해준 덕분이었다. 만약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수배 중이던 많은 학생들이 도중에 연행될 수도 있었다. 지금도 가끔 연락드리고 찾아뵙는다.”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6.29 선언 직전 계엄령이 발포된다는 설이 돌아 학교주변이 적막강산으로 흘렀다고 전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6.29 선언 직전 계엄령이 발포된다는 설이 돌아 학교주변이 적막강산으로 흘렀다고 전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비폭력, 평화투쟁으로 국민 결집 커져
전경들에게 장미꽃 달아준 어머니의 힘”

- 어떤 경험자 얘기로는 87년 6월 항쟁 당시 유혈사태가 나지 않았던 것은 88올림픽과 미국의 압력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참고로 그는 민주화운동가 출신으로 군에 끌려가 있을 당시 6월 항쟁을 겪었다고 했다.)

“우리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의 얘기일 수 있다. 그리되면 우리 선배들의 피땀,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던 희생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거다. 당시 군이 투입해 계엄을 내리려는 검토는 있었다. 만약 현실화됐다면 80년대와 같은 유혈사태가 발생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던 것이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난 시민 항쟁이었다. 경찰이 진압하는데 한계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랬기에 전두환이 항복하고 직선제 개헌을 통해 선거를 치르겠다고 한 것이다.”

- 12대 총선의 신민당 승리는 6월 항쟁 성공에 있어 어느 정도의 영향이 있다고 보여 지나.

“85년 총선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치른 선거였다. 개별적으로 재야인사들이 도전했던 선거였다. 국민들 뇌리에 깊이 조명 받지는 못했다.”

- 함운경 전 삼민투 위원장은 6월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대협 세대의 학생운동권들이 무장투쟁이 아닌 직선제 쟁취로의 방향 전환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공감하나.

“그렇다. 당시 총학생회 지도부 입장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집회를 해야 한다였다. 비폭력, 평화 투쟁이었다. 최루탄이 터져도 그 자리에서 구호를 외쳤다. 드러누우면서 끌려갔다. 자기를 희생해서 투쟁하는 방식이었다. 우리가 평화 투쟁을 할 수 있었기에 보다 많은 국민들이 광범위하게 동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어린 학생들이 동참했다. 노동자들이, 은행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주변에 상점을 했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나왔다. 넥타이 부대들이 참여하고, 시민들이 음료수를 건네주고…. 그만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학생운동권이 대중 친화적 양상으로 변모하는 것에도 영향이 있는 듯했다. 84년부터 총학생회장이 학생들에 의한 직선제로 선출됐다. 서울대는 이남주, 연대는 우상호, 고려대 이인영 등이 각각 총학생회장이 됐다. 또 이들이 모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발족했다. 1기 의장은 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다.

- 그 점이 이전과 다른 6월 항쟁의 특징인 건가.

“그전 유신독재에서의 투쟁은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탄압이 워낙에 심했던 때였다. 대중들을 설득해서 함께 현장으로 나갈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다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80년 5‧18을 거쳐 학생운동이 극렬하게 저항했다. 소위 제도권의 정치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뤄내자는 것부터 무장투쟁으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논리도 있었다. 87년은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국민이 분노했다. 하나둘 거리로 나왔고, 우리와 함께였다. 전국적 동참의 물결이 일면서 평화 투쟁으로 나아갔다.”

- 평화 투쟁으로의 전환에 있어 또 다르게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면.

“우리보다 1년 앞서 있었던 필리핀 2월 혁명이었다. 필리핀 국민들은 부정선거로 얼룩진 마르코스 독재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뤘다. 그 점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큰 자극이 돼줬다. 이를 연구하고자 총학생회 학술부장 당시 5개 대학과 공동으로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 비폭력, 평화 투쟁에서 두드러진 모습이랄까. 상징적으로 어떤 활동이 있었나. 

“쇠파이로 중무장한 전경들에게 꽃을 달아주는 일이었다.  장미꽃을 건네줬다. 이 무도한 정권이 국민들을 탄압하는데 도구가 되지 마라. 전경들 나이가 고작해야 스물넷 다섯이었다. 가슴팍에 꽃을 달아주자 우는 청년도 있었다. 그 일을 한 게 구속자 가족협의회 엄마들이었다. 거기에는 민주화 운동하다 잡혀들어간 김민석 전 의원의 어머니부터 유시민의 누나 유시춘(전 EBS 사장) 씨 등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87년 6월 항쟁 당시 구속자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이 전경들에게 꽃을 달아줬고 당시 6월 항쟁이 비폭력 평화투쟁이었기에 더 많은 대중들과 함께할수있었다고 밝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87년 6월 항쟁 당시 구속자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이 전경들에게 꽃을 달아줬고 당시 6월 항쟁이 비폭력 평화투쟁이었기에 더 많은 대중들과 함께할수있었다고 밝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라고 할까. 역사성을 정의 내림에 있어 하나의 큰 특징적 요소 같기도 하다.

“꽃은 평화의 상징이지 않나. 여성들의 방식으로 비폭력 평화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게 6월 항쟁의 성공을 가져온 대표적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넥타이 부대를 응원하고 현장에 나온 학생들에게 음료수를 주던 엄마들, 그처럼 모성애를 간직한 여성들은 굵직한 역사의 현장을 늘 지키고 있었다.

5‧18 때는 주먹밥을 싸서 시민군들에게 나눠주던 엄마들이 있었다. 광우병 촛불 집회 때는 유모차를 끌고 광장에 나온 엄마들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때는 팔 걷어붙이고 특별법에 서명했던 엄마들이 있었다. 노란색 나비 리본을 만들고, 한겨울 엄동설한에도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지켜주던 엄마들이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 활동에서도 엄마들의 역할은 컸다. 아빠들이 생활현장에 가 있는 동안 엄마들은 4‧16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를 주도했다.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은 아픔을 합창단, 가족극단을 통해 승화했다. 현장에서의 국조위 활동 모두 엄마들이 열심이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6월 항쟁과 연관돼 있다. 평화 투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 동참이 확대됐다. 6월 항쟁 때 평화투쟁을 했던 이들의 면면이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타고 오늘날까지 여성 참여로 이어져오는 것이 아닐까.” 

김 전 의원도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온 인물이다. 6월 항쟁, 광우병 촛불에 이어 2014년부터는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매진해왔다. 안철수 김한길 지도부 체제의 새정치국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시 세월호 진상 규명 특별위 상황실장을 맡았다. 줄곧 세월호 유가족들과 일상을 함께해왔다. 사는 곳도 안산시다. 아파트 단지에는 세월호 유가족 스무 가족, 건너편에도 스무 가족이 살고 있다. 안산시가 제 몸의 일부로 기억하듯 세월호 추모 공원 건립을 위해 유가족들과 함께 노력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87년 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에서 학술부장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87년 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에서 학술부장을 맡았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DJ 후보단일화 실패로 돌아가
재야인사 제도권 진출 계기되기도”

- 화제를 돌려 6‧29 선언 이후에 주목해본다. 이후 전대협 학생운동권들의 정치적 목소리도 점차 두드러진 것 같다.

“6‧29 항복 선언을 받아내자마자 12월 16일 13대 대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게는‘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후보 이렇게 나왔다. ‘김종필 백기완’까지 선거를 치렀다.

그때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야권 후보 단일화였다. 소위 전두환의 아바타라고 얘기되는 ‘노태우’를 상대로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요청이 컸다.

전대협에서도 대선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김대중(DJ) 대통령을 지지하는 쪽과 재야의 백기완 선생(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지지하는 그룹이 있었다. 공개적으로 김영삼(YS) 대통령을 지지하는 그룹은 없었다. 후보 단일화에 대한 시국토론회가 고려대에서 치열하게 진행된 적도 있다.”

- 당시 어느 쪽이었나.

“나는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남은 것은 어느 후보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통일을 가져올 것인가의 문제였다. 토론회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 그런데 단일화에 실패했다. 당시 학생들 반응은 어땠나.

“후보 단일화를 해야지만 ‘노태우’를 이길 수 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실패했고, 대학가의 실망은 컸다. 그 책임은 온전히 김대중 후보한테 전가됐다.”

YS와 DJ는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후보 단일화를 논의했다. 하지만 합의가 뜻대로 되지 않자 DJ는 탈당 후 평화민주당을 창당, 독자 출마의 길을 걸었다. 

- 이유는 뭔가. DJ가 약속을 파기해서인가?

“YS는 단일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우리들한테 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지율에 따라서 단일화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파기됐으니, 책임은 거의 90프로가 DJ한테 지워졌다. 이후 선거에서 패한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뒤이어 총재는 작고하신 여성운동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박영숙 선생님이 맡았다. 그분이 평민당 총선을 이끌었다.”

6월 항쟁은 성공했지만 정권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2월 16일 13대 대선에서 보통 사람입니다를 강조했던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36.6%로 당선됐다. 2위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 28%, 3위는 김대중 평민당 후보 27% 순으로 집계됐다.

- 6월 항쟁 이후 김 전 의원도 평민당에 입당했던데, 어떤 이유에서였나.

“DJ는 대선에서 진 후 재야운동권 인사들에게 정당으로 들어와 줄 것을 요구했다. 당신은 비록 정계 은퇴했지만, 이듬해 있을 88년 총선에서 소위 민주개혁진영이 교두보를 마련해주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군부독재 세력이 집권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심사숙고 끝에 국민운동본부를 비롯해 노동운동, 농민운동, 문화, 학생운동 등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던 재야인사 98명이 평민당에 입당했다. 그때 나는 학생대표 1인으로 입당했다. 학생운동권내로 보면 전반적으로 제도권으로 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팽배할 때였다. 그렇지만 이후 대선에서 이기려면 좋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김 전 의원은 평민당 입당 후 평화민주통일연구회 총무간사사를 맡았다. 20대 초반 학생대표로 정계에 입문했으니, 어느덧 30여년이 지났다.

- 어찌 보면 87년 야권 단일화 실패가 제도권 진입의 기폭제가 된 것 아닌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 제도권에 들어온 것에 대한 평가는. 후회하지 않나.

“탁월한 선택이었다.(웃음) 당시 평민당에 입당한 분들 중 문익환 목사 동생인 문동환 박사, 이해찬 당대표, 임채정 전 국회의장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이 많았다. 원래 5대 5지분을 받았지만 사람이 적어 출마자 수는 적었다. 그런데도 16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이해찬’ ‘노무현’ 등 청문회 스타도 많이 나왔다. 물론 노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은 영남을 기반으로 한 YS의 통일민주당에 입당한 경우라 다른 출발 선상이었다. 차치하고서라도 호남을 기반으로 평민당에 입당한 분들로 인해 5공 청문회 역시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 보내고,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히는 국정조사를 실시할 수 있었다. 경제 청문회를 통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권력과 결탁한 것도 밝혀냈다. 이 모두가 제도권 진출을 통해 얻어낸 성과였다. 또 그 힘으로 김대중 대통령으로의 정권교체를 이뤄낼 수 있었다. 다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되고 문재인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그 시작점이 87년도였다라고 나는 감히 자부한다. 만약 이 조직적 힘이 없었다면 정권교체, 정권연장인 1997년, 2002년은 좀 더 늦게 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이명박 대통령 이후 9년 간 회귀됐고 장미 대선을 통해 대통령이 된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바로잡는 중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더불어민주당 김현 전 의원(당대표 사무부총장)은 이명박 대통령 이후 9년 간 회귀됐고 장미 대선을 통해 대통령이 된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바로잡는 중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명박 후 9년간 회귀했던 것들
문 대통령이 바로잡으려는 중”

- 6월 항쟁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인가.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일차적인 목표는 성공했다.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민간 정부로 이양됐다. 하나회를 없애고 금융실명제를 한 점은 좋았다. 그러나 3당 합당, 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킨 것은 나쁜 정치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97년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으로 온전하게 민주 정부 1기가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참여 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 타파, 정치개혁, 언론개혁, 복지의 확대 등이 성과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이후 9년 동안 우리 사회가 과거로 돌아갔다. 독재 권력이 장악한 때로 회귀한 거다. 이 때문에 나라를 바로 세우는 노력들을 문재인 대통령이 하고 있는 거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뒷받침하고 있고….”

- 그런데 지역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이유로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DJ를 비판한 적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역주의를 조장했다고 노무현 대통령은 얘기하지 않았다. 전국적 지지를 받기 위해서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씀했다. 지방자치 영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 분이다. 그래서 지방자치 실무연구소를 93년에 만든 거다.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나 대통령 되고서도 김대중 대통령을 깍듯하게 모셨다. 당신은 노 대통령 서거 때 ‘내 몸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라고 토로하기까지 했다. 전생에 당신이 형이었고 노 대통령이 동생이었다, 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유언과 같이 말했던 게 나쁜 정당에 표 주지 말고, 나쁜 신문보지 말고 담벼락에 대고라도 소리를 질러라 하지 않았나. 지역주의 조장은 박정희, 박근혜 정권이 했다. 영남 우월주의로 호남 사람들은 등용하지도 않았다. 가장 큰 피해자가 DJ었다. 빨갱이로 몰리고, 호남은 색깔론으로 차별 받았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의 기억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은 95년 지방선거 직후 <한겨례21>기고를 통해 DJ가 지역대결구도를 부활시켰다고 성토한 바 있다.

- 6월 항쟁이 남긴 과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헌법 전문에 3‧1운동과 임시정부 정신을 이어서 4‧19까지만 기록돼있다. 4‧19에 이어 전 국민이 정권 타도 투쟁을 한 게 6월 항쟁이다. 그 중간에 5‧18이 있었다. 이 모두가 역사적 흐름으로 연결돼 있다. 그것이 최근에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 당시의 촛불로 이어졌다. 6월 항쟁과 5‧18정신이 헌법 전문에 실릴 때 어쩌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정의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 그전까지는 미완의 기록이라고 보는 건가. 

“미완이고 계속 해결해야 할 과제다. 대통령은 2017년도 대선을 통해 교체됐지만 2016년 총선 체제는 잔존해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분단 세력, 독재에 부역했던 세력이 있다. 공정하지 못한 재벌권력, 국민의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언론적폐, 검찰 개혁 등 해결 과제가 산더미다. 여전히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못하고 일본 편에 선 세력이 있다. 그렇기에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을 부정하고 경제 보복에만 혈안인 일본의 아베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대신 문 대통령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내년 총선을 통해 이들을 다시 심판하고 뿌리를 제대로 드러내야 한다. 임시정부와 3‧1운동 만세 100주년을 계승해야 한다.”
 
- 6월 항쟁 이후의 시대정신은 뭐라고 생각하나.

“국민을 보호하는 사회 각 제도가 민주적으로 안정화되는 거다. 민주주의와 인권, 분단 극복의 통일, 양극화 해소의 경제 정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애인과 소외계층이 차별받지 않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OECD 국가 12위이다. 4만 불 시대가 되면 7위 정도 된다. 그때 되면 적어도 남북 간 교류 협력이 시기와 간섭의 대상은 아니지 않을까. 앞으로 반세기는 더 가야 할 것으로 본다.”

김 전 의원은 시대적 과제를 위해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앞으로 20여 년은 단단히 고삐를 쥘 각오였다. 그러면서 꺼낸 게 승리의 기억이었다. <6월 항쟁 서른 즈음에> 책을 통해 그가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인생의 좌표를 새로 잡아야 할 때, 그때마다 김 전 의원은 6월 항쟁을 떠올린다고 했다. 누구는 승리의 기억을 통해 힘을 얻고, 누구는 패배의 학습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저마다 다시 일어설 때 필요한 돌파구인 것이다. 김 전 의원에게 6월 항쟁은 승리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것은 어떤 서슬 퍼런 권력도 결국은 국민을 이길 수는 없다는 진리를 일깨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한일 경제 전쟁 국면 속 그는 집단지성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끝으로 한 말은 이거였다.

“승리의 기억은 계속된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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