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추경, 문재인 정부의 알리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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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경, 문재인 정부의 알리바이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8.03 0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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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나는 죄가 없어요”… 알리바이만을 좇는 정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여야 지도부가 합의한 추경 총액 규모는 5조 8269억 원으로, 당초 정부안인 6조 7000억 원보다 약 8700억 원 줄었다. 자유한국당의 요구로 1조 3800억 원 규모의 정부 사업 예산이 삭감됐으며, 적자 국채 발행 금액도 3000억 원 정도 감소했다. ⓒ뉴시스
여야 지도부가 합의한 추경 총액 규모는 5조 8269억 원으로, 당초 정부안인 6조 7000억 원보다 약 8700억 원 줄었다. 자유한국당의 요구로 1조 3800억 원 규모의 정부 사업 예산이 삭감됐으며, 적자 국채 발행 금액도 3000억 원 정도 감소했다. ⓒ뉴시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결정이 번복된다. 1일 오전에서 오후로, 다시 2일 오전에서 오후로 국회 본회의 시작은 계속 미뤄졌다.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당마다 긴급 의원총회가 소집됐고, 의원들의 일정도 여러 차례 연기되다가 대부분 취소됐다. 

문자 메시지를 보고 “또 엎어졌느냐”며 짜증내는 사람과 “그냥 무작정 기다려야지 뭘 어떡하겠느냐”며 착잡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우글거리던 8월의 시작. 다음날(2일) 새벽이 밝아서야 여야는 ‘물밑 협상’을 통해 추가경정예산(추경) 심사를 겨우 끝마칠 수 있었다. 

여야 지도부가 합의한 추경 총액 규모는 5조 8269억 원으로, 당초 정부안인 6조 7000억 원보다 약 8700억 원 줄었다. 자유한국당의 요구로 1조 3800억 원 규모의 정부 사업 예산이 삭감됐으며, 적자 국채 발행 금액도 3000억 원 정도 감소했다. 

유치하고 진부하지만, 정치는 결국 ‘명분 싸움’이다. “우리는 내년 총선에서 의석을 얻으려고 싸웁니다”라고 말하는 미친 용자(勇者)는 없다. 

국가 예산으로 일자리를 늘려야 하는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부 전환시키는 것이 맞는지,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이 옳은지. 격렬한 찬반(贊反) 대결을 펼치는 도중에 눈에 불을 켜고 상대방의 꼬투리를 잡아내는 자가 승리하는 정글. 씁쓸하지만 그 곳이 대한민국 국회의 현주소다. 

다시 말해 여야 싸움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보세요. 나는 선(善)이고 저 자는 악(惡)입니다. 고로 내가 펼치는 주장에 진정한 명분이 있습니다. 제 편을 들어주세요.’ 

이 ‘명분 싸움’에서 최근 청와대와 민주당이 한 발 앞서 나가는 듯하다. 추경안에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 배제에 대응하기 위한 1조 8000억 원의 목적 예비비, 일명 ‘일본 추경’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합의가 지연되고 추경안이 정부안대로 통과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자, 청와대와 민주당은 야당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민주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일본 경제침략이 점점 노골적이고 장기화되고 있는 비상상황에서 제대로 협력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인영 원내대표도 “야당이 추경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경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야당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일삼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까지 열고 추경 처리를 압박했다.

너희(한국당)가 ‘일본 추경’을 볼모로 잡고 협박해서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공격. 그리고 우리(정부여당)는 삿된 일본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적자까지 내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수비. 이렇게 정부와 여당은 공수(攻守)를 합쳐 “문재인 정부는 한일 문제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위정자의 무지는 알리바이가 있어도 유죄다

알리바이란 피고인이 범행 당시 그 범행 이외의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무죄를 입증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한 자국 피해에 정부는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정부 무죄론’을 증명하기 위해, 정부와 여당은 알리바이를 쌓는 데만 열중하는 것이다. 총선 승리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정부는 무죄가 맞는가? 이들이 내세우는 알리바이는 ‘사후(事後)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이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의 일, ‘사전 알리바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외교 분야에서 전적으로 무지(無知)했다는 소리다.

한일 문제가 불거지자,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지난달 17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일본의 조치에는 여러 목적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엔 다목적이 깔려 있다. 첫째, 한일 청구권 협정을 무효화시킨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발이다. 다만 이는 가장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해석이다. 두 번째로, 한국의 경제적 성장에 제동을 걸어야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을 수 있다. 1985년에 미국과의 플라자합의(미국의 달러화 강세 완화 내용) 이후 일본 경기가 20년 침체됐다. 이걸 일본이 미국에게 배워서 그대로 우리에게 활용한 거다. 한국이 수출 시장에서 일본을 점점 앞서 나가는 것을 견제한 ‘경제 전쟁’이다.”

강 대표는 일본의 이런 행위가 미국의 묵인(黙認) 하에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추론했다. 

“대(對)중국 포위 전략에서 한·미·일 동맹관계가 중요한 ‘키 역할’을 했었는데, 최근 대북 문제로 사이가 벌어졌다. 그리고 미·일 G20정상회담, 트럼프 미국 대통령 한국 방문이 끝나자마자 이런 일이 발생했다. 한국 제재와 관련해서 경제뿐만 아니라 안보 문제도 (일본이) 언급하는 걸 보면, 한국에 대한 견제구를 날려야 할 필요성에 대해 아베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 간 대화가 오갔다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청와대 안보차장이 백악관을 방문했지만 명확한 답안을 받지 못한 것이 그 증거다.”

청와대가 이 사달이 나기까지 손을 놓고 방관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부랴부랴 명확한 추산 근거도 없는 ‘일본 추경’을 내놓은 것을 보아하니, 일본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을 확률이 더 높다.

그러나 권력자의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면피용 사후 알리바이를 쌓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알리바이를 쌓고 명분을 가공해 총선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다. 문재인 정부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겠다"고 했다. 친일 정치와의 결별을 선언한 셈이다. 이제 우린 알리바이만을 위한 정치, 명분만을 따지는 정치와는 언제쯤 결별할 수 있을까.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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