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조선총독부] 일제 치욕의 역사…YS가 철거한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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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총독부] 일제 치욕의 역사…YS가 철거한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8.08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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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정기 말살 위해 경복궁에 설치…해방 후에도 정부 청사·박물관으로 활용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치욕의 상징인 조선총독부는 1995년 YS가 철거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정부 청사로, 또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사용됐다. ⓒ국가기록원
치욕의 상징인 조선총독부는 1995년 YS가 철거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정부 청사로, 또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사용됐다. ⓒ국가기록원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려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바삐 오가는 자동차들 너머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광화문을 발견할 수 있다. 형형색색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과 붉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수문장(守門將)을 지나 광화문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공터와 저 멀리 흥례문(興禮門)이 보인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 종로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광경이다.

그러나 25년 전만 해도, 조선과 대한민국이 함께 호흡하는 이 공간에는 ‘불청객(不請客)’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광화문 뒤편으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설돼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제가 주인인양 광화문 뒤에, 그리고 경복궁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상기시켰다.

‘민족 말살’ 목적으로 경복궁에 지어진 총독부…해방 후 정부 청사로 사용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넓은 행정 청사가 필요해진 조선총독부는 신청사 부지(敷地)를 물색했다. 일제가 선택한 신청사 부지는 경복궁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궁궐이었던 경복궁 앞뜰에 청사를 올릴 경우 조선인들에게 정신적·심리적 타격까지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흥례문을 비롯한 주위의 행각(行閣)을 철거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경복궁을 완전히 가리는 방식으로 철근 콘크리트 더미를 쌓아올렸다. 또 완공 후에는, 청사를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까지 동쪽으로 해체·이전해버렸다.

조선의 궁궐터에 세워진 이질적(異質的)인 건물이었지만,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 후에도 중앙청으로 이름만 바꿔 계속 정부 청사로 활용됐다. 심지어 해방이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탓에 따로 준비를 할 여유가 없었던 우리나라는, 1948년 5월 10일 중앙청 중앙홀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 국회를 개의했다.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중앙청 메인홀에서 헌법을 공포했으며, 8월 15일에는 중앙청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거행했다. 일제가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지은 건물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이 공포되고 정부가 수립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에도 이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는지, 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청사를 지어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신청사 건립 계획은 좌절되고, 서울정부청사와 정부과천청사가 완공돼 행정 기능이 완전히 이양된 1982년까지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흥례문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 과정에서 철거됐다가,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다시 세워진 것이다. ⓒ시사오늘
흥례문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 과정에서 철거됐다가,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다시 세워진 것이다. ⓒ시사오늘

“철거해야” vs “아픈 역사도 역사” 논란…결단 내린 YS

정부 청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중앙청은 개·보수 작업을 거쳐 19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이용됐다. 이 과정에서 철거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높은 철거 비용과 대체 건물을 마련해야 한다는 경제적 문제,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유야무야(有耶無耶)되고 만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주장이 힘을 받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과 문민정부 수립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과의 결별을 의미했고, 구 조선총독부 청사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대표적 건물 중 하나였던 까닭이다.

더욱이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상황에서, 우리의 유물(遺物)을 조선총독부 건물에 전시한다는 국민적 반감(反感)도 고려해야 했다.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YS는 1993년 8월 9일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해체하기로 결정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건설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 해체된다. 이에 따라 문화체육부는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을 서울 용산가족공원에 신축할 방침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9일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능한 한 조속히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박관용 비서실장에게 건물의 해체와 새로운 박물관의 건설 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지시를 통해 “광복절을 앞두고, 그리고 민주공화정의 법통을 최초로 세운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봉환에 즈음하여 심사숙고한 결과 우리 조상의 빛나는 유산이자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계기로 우리는 민족사의 잘못된 큰 줄기를 바로잡아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93년 8월 10일자 <경향신문> ‘옛 총독부 건물 해체’

조선총독부가 철거된 자리에는 흥례문이 복원됐고, 나머지 공간은 공터로 남아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쓰이고 있다. ⓒ시사오늘
조선총독부가 철거된 자리에는 흥례문이 복원됐고, 나머지 공간은 공터로 남아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쓰이고 있다. ⓒ시사오늘

1995년 8월 15일, 총독부 철거…경복궁도 복원

철거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니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정치권과 학계의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JP(김종필 전 국무총리) 역시 증언록에서 “치욕의 역사도 역사다. 후세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다. 역사의 영광은 나누고 치욕은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바로 후세가 발휘해야 할 지혜다. 부끄럽다고 해서 지워 버린다고 그 역사가 생략되지 않는다”며 자신은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반대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일본이 모든 비용을 댈 테니 건물 자체를 자국으로 옮겨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야사(野史)도 전해진다.

참고로 일본이 건물을 통째로 옮겨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화가 난 YS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시켜버리고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오랜 기간에 걸쳐 추진된 사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사 해체는 폭파 방식으로 이뤄지지도 않았으며, 애초에 ‘버르장머리’ 발언 자체가 이 일이 있은 지 3개월 뒤인 11월 14일에 나온 것이었다.

어쨌든 ‘뚝심’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YS는 철거를 밀어붙였다. 정부는 1995년 3월 1일, 구 조선총독부 청사 앞 광장에서 ‘광복 50주년 3·1절 기념 문화축제’를 열고 “오늘 삼일절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의 시발점으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8월 15일 오전. 커다란 기중기가 첨탑을 들어 올리며 일제 잔재의 청산을 온몸으로 천명(闡明)했다.

8·15 50돌 기념 중앙경축식이 15일 오전 김영삼 대통령과 3부 요인 및 각계 대표, 광복회원 그리고 일반시민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화문 앞 세종로 광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식전 행사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상징이자 해방 후 청산되지 못한 식민잔재의 구체적 표현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돔 뾰족탑(첨탑)이 철거됐다.
중앙동 뾰족탑(높이 8.5m, 무게 35t)은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의 ‘고유문’ 낭독 뒤 오전 9시 21분 상부(길이 4.5m, 무게 11.4t)가 330t급 하이드로크레인에 의해 들어 올려져 국립박물관 광장에 내려진 데 이어 오후 8시께 하단부마저 제거돼 69년 만에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다. 해체된 뾰족탑은 8월까지 박물관 광장에 보관했다가 9월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후략)
1995년 8월 16일자 <한겨레> ‘식민 첨탑 역사 속으로’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후,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에 현재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으로 이전했다. 정부 청사로 사용되던 시절 후생관 용도로 신설된 건물은 국립고궁박물관이 됐다. 철거 행사 당시 잘렸던 첨탑과 일부 잔해는 충남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물론 건물 내에 잘 보존돼 있지는 않고, 한쪽에 ‘방치해뒀다’는 표현이 적합한 수준으로 전시된 상태다.

청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흥례문이 들어섰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헐어버렸던 흥례문을 복원한 것.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공간에는 측면에 매표소가 들어서 있을 뿐, 공터로 남아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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