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헌금하는 순간 조상의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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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헌금하는 순간 조상의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7.2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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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16세기에 로마 교황은 베드로성당을 짓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헌금을 받고 속죄표를 팔았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와 모의한 독일 지역의 모금 책임자 텟젤(Johann Tetzel)은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 조상의 영혼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간다”고 설교했다.

누구든지 헌금만 많이 하면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천국에 간다고 했다. 이 속죄표의 발상은 13세기부터 천주교에서 전해지던 공적축적(功績蓄積)의 사상에서 나왔다. 천주교신자에게 교회는 서로 간에 공적과 잘못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였다. 교회는 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공적을 쌓지마는 모든 시대의 순교자와 성자들로 인해서도 공적을 쌓는다. 그리고 군인이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처럼 그의 직무상 부득이 죄를 짓는 사람은 교회가 쌓아둔 공적에 참여함으로써 자기의 잘못을 상쇄할 수 있다. 이러한 속죄론의 전통을 악용하여 교황 레오 10세는 속죄표를 팔았던 것이다.
 

속죄표를 사면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교황의 포고는 커다란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후스와 위클리프의 저항을 거쳐 마침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루터는 속죄표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내걸고 교황을 공격하였다. 속죄표는 하나님의 징벌을 없이할 수 없다, 죄를 사할 수 없다, 죄인이 하나님께 의당히 받아야 할 형벌을 없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나 성도들의 공로를 팔 권한이 없다고 공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의 개신교는 탄생했다. 그런데 함석헌은 이제 그 개신교의 정통교리인 대속이론이 16세기에 교황이 팔던 속죄표로 전락했다고 선언한다. 이유를 물을 것 없이, 속죄의 체험 여부를 묻지 않고, 예수의 대속을 믿으라는 교회의 설교는 중세의 속죄표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대속교리는 사람과 돈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뿐이고 속죄의 은혜를 부여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수표를 가지고 생명은행에 가면 하나님은 지급을 거절한다고 말한다. 수표를 발행한 사람의 예금이 없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1959년 세모에 쓴 ‘씨알의 설음’(4-5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만 아니라 도무지 모든 종교, 종교만 아니라 글에 속한 것은 거의 다가 부도수표다. 이 글만 가지고 하나님이라는 생명은행에 가면 틀림없이 생명의 현금을 내준다는 것이 글의 뜻이지만, 그래서 피땀 흘려 번 빵을 주고 사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가면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발행자가 예금이 없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글을 쓰려면 실지로 피땀 흘리고 손발 놀려 일하여 얻은, 즉 스스로 얻은 자득(自得) 것의 예금이 있고서야 될 것인데, 은행이란 제도, 다시 말하면 종교니 하는 것이 있는 것을 기화로 예금은 한 푼도 없는 것들이 수표(手票), 곧 손자리를 내서 팔아먹는다.

말이 ‘팔아먹는다’지 사실은 도둑질이다. 정말 금을 캐내어 맡겨놓은 것은 석가요, 공자요, 예수요, 소크라테스요, 미켈란젤로요, 아인슈타인인데, 그 밖의 여남은 놈들은 손자리만 내가지고 그 손들의 캐낸 금을 도둑질해 먹고 호강하잔 놈들이다. 옅은 생각에 손은 같은 손이니 모르겠지 해서 하는 작란이지만 사람은 어리석어 몰라도, 그 손 하나하나 제 글 지문(指文) 대로 만든 하나님이 그것을 모를까?”

함석헌의 주장대로 교회의 목사가 발행한 속죄용 수표를 갖고 하나님 앞에 갔다가 부도 처리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정말로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심장병으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종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십자가의 구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십자가의 구원을 확신하는 경지에 이를 수가 없었다. 함석헌은 그 이유를, 예수가 피땀 흘려 캐내어 맡겨놓은 금을 목사가 캐내는 노력 없이 도둑질해 팔아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목사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예수가 말한 구원의 경지를 실제로 체험한 후에 하는 설교라야, 그 설교에 힘이 실려서 그 체험이 교인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들에게 ‘실지로 피땀 흘리고 손발 놀려 일하여 얻은’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 설교가 신자들에게 구원받은 확신을 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 능력이 곧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수표를 내밀면 지급해 줄 예금인데.

흰 손’의 시구 몇 절만 더 인용하고 ‘흰 손’ 이야기를 끝내자.

“대속(代贖)이라!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뉘 하느냐?
내게 진 빚 나 모르게 너 혼자 줄치면
그 청장(淸帳)을 내 안 다더냐”
……
“심장의 육비(肉碑)에 새긴 기록을,
영혼의 미간에 박힌 죄악의 허물을,
대신을 누가 대신한단 말이냐?
맘은 있다손 어떻게 하느냐?”
 대속이 성립되려면 예수와 나의 인격적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와 내가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역시 관련 시구 몇 절만 인용하자.
 “그의 죽음 네 죽음 되고
그의 삶 네 삶 되기 위해
부닥쳐라, 알몸으로 알몸에 대들어라!
벌거벗은 영으로 그 바위에 돌격을 해라!”
……
“지지 않고 십자가 맛 네 무엇으로 아느냐?
맛 모르는 십자가 네 어이 믿느냐?
허공에 바라는 십자가의 예수 뜬 예수
가슴에 등에 안고 진 십자가의 예수 너와 하나로 산 예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바울이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은 중시하지 않은 것처럼 가르쳤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편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바울 서신에도 보면 믿음대로 행하라는 말을 쉴 새 없이 강조하고 있는데 왜 목사들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는 가르치지 않을까?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 가르치면 새로운 신자가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나오던 신자도 아니 나오게 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지 목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 행함은 생각하지도 않던 교인들은 하나님의 질책을 받고 바울에게 속았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야말로 행함의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놈아,
 네놈이 바울을 속였지,
 그래 바울이 너를 속였느냐?
 이 바울을 봐라!

 이 욕 먹고, 매 맞고, 터지고,
 쫓겨 다니고, 사슬 지고, 갇히다가,
 마침내 목을 잘린 이 바울을,
 이 피투성이의 사람을.”

식물(食物)은 하나님이 주시지마는 재배, 채취, 요리의 과정에서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구원도 하나님에게서 오지마는 사람의 노력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함석헌은 “내 맘의 벗아, 영원한 길동무야, 가림 없는 말 가림 없이 받을 너 참 맘아, 옷깃을 헤치고 오라, 내 꿈을 노래하리라”로 이 시를 시작한다. 그리고 “철없는 꿈꾸는 자를 교만타 말라, 하나님 모르는 무리에 팔지 말라, 이따가 오는 기쁨의 날을, 내 형제야, 너희가 부끄러움으로 맞을까 두려워하노라”로 끝낸다. 나는 그의 염원대로 참 맘으로 이 시를 읽고, 이따가 오는 기쁨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맞을 위험에서 벗어날 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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