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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산되짚기(22)>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민산은 군사정권에서 실질적 야당˝
˝나는 죽어서도 정치인…지역대립구도 해소에 밀알 될 각오˝
2013년 03월 12일 (화) 정세운 윤종희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윤종희 기자)

민주산악회(민산) 회원들을 만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있다. '김덕룡이 아깝다'는 것이다. 김덕룡(DR)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그릇이 보통이 아닌데 그 만큼 정치적으로 출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상도동계 핵심이면서도 대권을 쥐지 못한 이유로 그가 호남 출신인 점을 든다. 소위 영남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당 등에서 그의 출신 지역은 커다라 장애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제가 당내 경선에 나왔을 때, 우리 YS 밑에서 같이 고생했던 사람들이 제게 '지역적인 문제 때문에 마땅히 도와야 하는데도 도울 수 없다'고 솔직히 얘기할 때 처음에는 섭섭했습니다. 이후에는 제가 영남 정당인 한나라당 등에 있으면서 당에서 더 큰 목표를 이루겠다,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주변 사람들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 전 대표는 7일 서초구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 같이 말했다. 영남당인 한나라당에서 호남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애틋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자신의 지난 정치 역정을 소회하며 새로운 정치에 대한 의지를 비쳤다.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그는 이날 '우리 YS'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한평생 YS와 생활한 친숙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했다. 김 전 대표는 민주산악회를 실제로 이끌었던 상근부회장이다. 그가 생각하는 민산의 역사성과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김 전 대표는 "민산이 있어 6월 항쟁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김덕룡 전 대표는 상도동계에서는 보기 드문 호남 출신입니다. 이 점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았나요.

"제가 상도동계라고 하는데, 상도동계가 영남과 김영삼(YS)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그러니까 상도동계에서 호남 출신은 희귀했습니다. 그러다가 YS와 DJ가 (87년 대선에서) 단일화를 못하고 결별하니까 영·호남 갈등이 더 심화됐습니다. 물론 그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DJ와 대선에서 경쟁하면서 지역주의가 생겼지만 YS와 DJ가 분열하면서 더 심화된 건 사실입니다. 이런 지역주의가 상도동계 내부에서도 있다 보니까 저 자신도 거기서 좀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YS와 DJ도 지역분할구도자인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호남 출신이기에 동교동 쪽을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 김덕룡 전 대표는 민주산악회를 실제로 이끌었던 상근 부회장이었다. 사진=김덕룡 제공

"저는 그 당시 굳이 지역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리버럴'한 생각을 했고 인간적으로 YS를 좋아했습니다. 첫 인연은 학교 선배였기 때문인데, 그 당시 40대 기수라는 YS, DJ, 이철승 등을 모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학생회장을 하던 터에 6·3운동, 군정반대 운동 등으로 정치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이죠. 지역적으로 본다면 이철승 씨가 전북 출신이니까 저와 가까웠는데, 인간적으로 YS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나 학교 선배이다 보니 자주 접촉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YS와 가깝게 됐습니다."

김덕룡은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후 김영삼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는데, 두 사람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시작은 1963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다니던 김덕룡은 6대국회에서 서울대 선배인 김영삼이 당선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민정당 안국동 당사를 찾았다. 이후 김영삼은 두서 차례 김덕룡에게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했다. 하지만 김덕룡은 이를 거절했다.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게 이유였다.

"YS 품성이 부드럽고 여유 있어…인간적으로 호감"

-YS의 어떤 점이 호감을 갖게 했나요.

"그 품성이 부드럽고 여유 있고 그런 것들에서 호감을 느꼈지요."

-1975년 5월 전당대회에서 YS가 신민당 총재에 당선되면서 김덕룡 대표는 총재 비서실장으로 지명됐고 거물 정치인으로 커 왔습니다. 그럼에도 국회 입성 시기가 늦어진 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75년부터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었고 79년도에도 구속되고 하면서 계속 정치규제에 묶여 있었습니다. 정치활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제일 처음으로 정치활동 자유를 얻고 출마한 선거가 88년 선거였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됐어요. 85년도에 정치규제가 해제되고 처음으로 치른 선거인 88년 총선에서 당선됐으니 저로서는 빨리 된 셈입니다."

김덕룡은 YS분신으로 지내면서 박정희 정권하에서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르는 등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이는 당시 김덕룡이 김영삼의 대언론창구 역학을 하던 공보비서였던 점이 큰 몫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언론을 차단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이는 김덕룡의 구속으로 이어졌다는 게 통설이다. 때문에 공민권이 박탈된 김덕룡은 좀처럼 양지(국회)로 나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YS가 출마를 권유한 사실이 있지 않나요.

"YS로부터 1967년 선거 때 제 고향에서 한번 출마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었는데, 저 스스로가 아직은 공인으로서 그런 정치활동을 할 만큼의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생각해서 사양했습니다."

1967년 27세이던 김덕룡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은 ‘이리 익산에 출마하면 어떻겠느냐’며 제의를 했다. 고민을 하던 김덕룡은 ‘지역기반도 없고 선거를 치를 준비가 안 돼 있다’며 거절했다.

-1975년도에 YS의 비서실장이 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타깃이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그 당시 그런 경고도 받았습니다. 그 때 중앙정보부 차장보하던 유명한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야권 담당 실권자였는데, 저를 손보겠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해요. 신상우 의원이 YS 비서도 하고 비서실장도 했었는데 어느 날 신 의원을 만나보니 그런 얘기를 제게 해요. 그래서 제가 언제 구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지만 저녁밥은 집에서 못 먹을 수 있다, 그런 위기감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구속을 여러 번 당했는데 그러다보니 심적으로 상당히 위축됐을 것 같은데요.

"그 때는 젊어서 그런지, 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뭐 두렵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박정희와 싸운다는 생각으로 감옥에서 얼음물로 냉수 마찰"

-감옥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활 자체가 정상적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저는 형무소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전혀 고민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들어간 날부터 '모처럼 휴식의 시간이 왔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못 읽은 책도 마음대로 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옥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사식을 한 끼도 안 먹었습니다. 밖에서 모르고 넣어준 것도 안 먹었습니다. 단 한 끼도 사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김명륜 의원이 변호사로 저를 많이 찾아왔는데, 제가 너무 편하고 즐겁게 보이니까 저보고 형무소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해요. 저는 스스로 즐기려고 했습니다. 마음 놓고 좋은 책도 읽을 수 있고 밖에서는 억지로 술도 마실 때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럴 일이 없으니 건강해질 것이라면서 혼자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독방에서 혼자 운동도 하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더 건강한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그래도 겨울이면 감옥 생활이 무척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난방이 안 됐기 때문에 몹시 춥지 않았나요.

"그 때는 시설이 나빠서 방한 장치가 전혀 없었고 감방 안에 있는 물통이 다 얼었습니다. 그 물을 깨서 냉수마찰을 하고는 했습니다. 극기 훈련 겸 해서 그렇게 했는데 '내가 여기서 박정희 하고 붙어서 지지 않고 나름대로 투쟁을 한다'라는 기분으로 감내하며 즐기려는 생활을 했습니다."

"잠 안 재우기 고문 받을 때 '지독한 놈' 소리 들어가며 버텨"

-고문을 받은 적은 없나요.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저를 때리는 건 아니었고 48시간 이상 잠을 안 재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저 하나를 두고 7~8명이 돌아가면서 신문했는데 지하실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도 알 수 없고 다만 세 끼를 주니까, 하루가 지났구나, 이렇게 짐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문 받으면서 밥을 다 먹고 나중에는 더 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잠을 하나도 안 자니까 힘을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젊을 때이니까…. 그렇게 하니까 그 사람들이 저보고 '지독한 놈'이라고 했어요. 여기 들어와서 ‘밥 세 끼 먹는 사람’은 없는데 더 달라고 하니 그런 것이죠. 하지만 저는 여기서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고통스러웠던 점은 저로 인해 누군가가 연루돼서 고생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걸 방어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지, 육체적인 고문이나 이런 것은 안 당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저도 야당 총재의 비서이니까 독재정권으로서는 정치적 파장이 두려워서 제게 육체적 고문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김덕룡은 정보원들의 집요한 신문에도 절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상도동계 사람들로부터 '자꾸(지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제는 본론에 들어갈 시간이다. 민주산악회(민산)와 관련한 생각들을 물어볼 차례다.

-민주산악회의 정확한 시작은 언제입니까? 여러 가지 ‘설’ 등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YS가 80년 5·18 이후 상도동 자택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했는데, 거기서 '광주에서 지금 유혈사태가 발생했다'고 말했고, 처음으로 광주 유혈사태라는 게 외신에 보도됐어요. 그렇게 외신에 보도가 나니까 바로 YS가 가택 연금됐습니다. 그게 80년 5월 20일로 기억됩니다. 이후 1년여 후인 81년 5월 30일에 연금에서 풀렸는데, 그렇다고 밖에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사무실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뭔가 좀 활동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았는데 때마침 '등산을 가면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이 있어서 명륜동 김동영 의원 집에 모여서 시작했어요. 나중에 알게 됐는데 우리가 처음으로 산에 간 날이 6월 9일이었습니다. YS를 모시고 정채권 목사, 문부식, 김동영, 저, 그리고 원외 위원장 몇 사람 등 7~8명 정도가 도봉산에 올랐습니다. 그 때가 시작입니다.”

김덕룡은 민산의 발족 시점을 정확히 1981년 6월 9일로 못 박았다. 하지만 김종순은 김영삼의 1차연금 시기인 1980년 15명으로 이미 ‘거산산악회’를 만들었다고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유성환도 민산 발족 이전에 ‘경민산악회’를 만들었다.

-대화를 할 공간이 필요해서 ‘사랑방’이라는 주점도 차리신 건가요? 그렇다면 사랑방이 민산의 효시가 되나요.

"사랑방을 차린 것은 민산 이전이 아니라 이후입니다. 첫 번째 연금이 끝난 다음에 우리 YS가 뉴욕타임스 기자와 기자회견를 했고, 그래서 '정치규제에 묶인 정치인이 민주주의를 갈망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이 보도되니까 그걸 기화로 해서 또 YS가 연금에 들어갔습니다. 그 연금 기간 동안 어디에 갈 데도 없고 사무실도 못 구하고 해서 우리가 자주 만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무교동에 비빔밥 집을 냈습니다. 당시에 저하고 문정수, 최기선, 김병환, 이영석 등이 7백만 원인가 9백만 원인가를 내서 개업을 했습니다. 전주에 있는 요리사를 데리고 왔는데 참 잘해서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비빔밥 집을 하는데도 경영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관리를 잘 못하니까 매출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적자였습니다. 솔직히 외상값도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정보요원들이 와서 누가 왔는지 체크한다는 소문이 나니까,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공직자들이 안 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엔 너무 적자 폭이 커지니까 문을 닫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적자가 났는데, 우리는 어차피 식당을 안 해도 돌아다니면서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비용으로 그 만큼 돈이 나갔을 게 아니냐며 스스로 위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YS가 연금됐지만 산악회 활동은 계속 됐습니다."

1981년 3월 김덕룡 문정수 최기선 김병환 이영석 등이 서울 무교동에 사랑방이라는 주점을 냈다. 낮에는 비빔밥을, 저녁에는 막걸리는 파는 집이었다. 사랑방은 원래 김병환이 운영하던 ‘다대포’라는 소금구이 집이 적자로 문들 닫을 지경에 이르자 이들이 7백만 원씩 투자해 공동인수한 뒤 상호를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자본금이 없던 최기선은 아파트를 저당 잡혀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민산의 첫 산행이 1981년 6월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사랑방은 분명 민산의 효시가 된다. 최기선도 2011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민산결성 이전에도 모임을 가지려는 시도가 있었다. 사랑방도 그런 취지에서 마련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김덕룡은 사랑방을 민산 이후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는 듯했다. 흩어진 조각들을 맞추는 작업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민산 생일은 정보기관이 정해준 것"

-민산이 시작된 날짜가 6월 9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김덕룡 전 대표는 감옥에 들어갈 때 두렵기는 커녕 마음이 편했다고 말했다. 사진=김덕룡 제공

"첫 등반 날짜가 6월 9일이라는 것을 알게된 건 83년도에 저하고 몇 사람이 안기부에 끌려가서 48 시간이 넘는 조사를 받으면서 입니다. 그 요원들이 우리가 간 날이 6월 9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몰랐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 생일을 찾아준 것이죠. 우리는 기억도 못했고 기록도 안 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기록을 절대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항시 잡혀갈 수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 전화번호는 전부 외웠습니다.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가 나오면 그 친구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방해 작업을 집요하게 펼쳤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가 82년도 12월인데 모처럼 전국의 동지들과 만나기 위해 코리아나 호텔 8층인가 7층인가에 있던 회의실을 예약을 했어요. 그것도 우리 이름으로 안 하고 가명으로 해서 망년회 행사를 준비했는데, 당일 날 아침 우리가 했다는 게 알려지니까 호텔을 전부 폐쇄했습니다. 그 때 관광호텔이 많지 않았고 코리아나 호텔은 5성급이었는데, 그렇게 규모가 큰 호텔을 폐쇄한 겁니다. 그 때는 우리가 사무실을 구하더라도 입주가 안 됐고 음식점에서 만나려고 하면 그 음식점을 폐쇄했어요. 호텔을 폐쇄할 정도이니까 음식점은 당연한 것이죠."

-정보기관 요원들이 민산 회원들의 산행을 따라다니며 감시하기도 했지요.

"우리가 산에 가면 산행식을 하는데 저 멀리서 정보 요원들이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누가 왔는지 등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산에 가서 나무 가지에 민주산악회 리본을 우리가 달면 경찰이 인부들을 사가지고 다 풀게 했어요. 그렇게 정보기관들과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산행도 못하게 집에 연금시키거나 봉쇄했습니다. 공무원들을 통해 산에 가지 말라고 회원들에게 협박도 하고…."

"민산, 재야에 있었지만 야당 역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민산이 갖는 역사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야당이라는 게 없었던 시절, 민주산악회가 정치적 결사체로서 그 역할을 한 셈입니다. 재야에 있었고 공식적 야당은 아니었지만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민주산악회가 있었기 때문에 YS와 DJ세력이 함께 한 민추협이 가능했습니다.  민추협은 민주산악회라는 근간이 있어서 가능했고 민추협이 있었기 때문에 6월 항쟁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민주정당, 제도권 정당을 탄생시키는 조직적 기반이 됐습니다. 민주화 투쟁사에서 민산은 정말 나름대로 커다랗고 찬란한 역할을 한 셈입니다."

-민산의 최대 목표는 '군정종식'입니까, 아니면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입니까.

"민주화운동 단체였고 YS 중심의 조직이었기에 YS 사조직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수가 필요한데, YS를 기수로 하자고 한 것이죠. 그래서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산과 자주 비교되는 조직이 '월계수회'입니다. 민산과 월계수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월계수회와 비교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월계수회는 정치권력의 하수세력이었고, 그 당시에 정치적 황태자라 했던 박철언 개인의 세력이었습니다. 무슨 정치적 이념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박철언 개인의 사조직에 불과했습니다. 정치권력의 하수조직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부심이나 사명의식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민산이 200만 회원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민주주의에 대한 그 당시 국민들 열망이 컸고, 그 다음에 우리 YS 개인의 지지와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정당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선 부담을 느끼는데 산악회 회원이라고 하면 별 부담감 없이 참여할 수 있었던 점이 컸습니다. 또 정당을 만들려면 많은 법적 요건이 필요한데 산악회 만드는 것은 그렇지 않았고 정치 지망생들도 정당이 아닌 산악회이기 때문에 쉽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 참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1992년 대선 때 YS가 공조직이 아닌 사조직인 민산을 중심으로 선거를 치렀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민주산악회 중심으로 한 건 아니었습니다. 민주산악회도 우리 YS를 뒷받침하는 큰 조직 중의 하나인 게 사실이었지만 그 때는 정당이 있었으니까 정당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민산이 대중과 가장 밀접하게 연계된 가장 큰 대중 조직이었지만 정당을 중심으로 선거를 치렀습니다."

-당시 민산 회장이 최형우 장관으로 바뀐 건 대선을 민산 위주로 치르기 위한 게 아니었나요.

"그런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만 김명륜 회장이 연세도 많고 해서 최형우 장관이 맡았던 측면도 있습니다. 저도 상근부회장이었기 때문에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200만 회원의 조직을 운영하는데 돈이 필요했을 텐데요. 어떻게 조달했나요.

"자발적인 조직이었습니다. 산에 갈 때 다들 밥을 싸가지고 갔고 버스를 동원하면 각자가 차비를 냈습니다. 그러니까 민주산악회는 실제 운영자금이라는 게 안 들어갔습니다. 저도 정치를 하면서 정당 조직과 산악회 조직을 가졌는데 똑같은 사람이 당에서 어디로 갈 때는 당연히 밥 사주는 걸로 알아요. 그런데 산에 갈 때는 자기가 밥값을 가져와야 하고 차비도 자기가 내는 걸로 압니다. 그렇게 다르게 생각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서전을 통해 92년 대선 때 YS에게 3천억 원을 지원했다고 밝혔습니다. 일부는 당이 아닌 산악회에 흘러들어갔을 개연성도 있는데요.

"산악회는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운영됐습니다. 회원들 각자가 부담해서 운영했습니다. 아마도 그 돈을 받았다면 당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민산 해체는 YS의 혜안"

-YS가 집권 후 민산 해체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 김덕룡 전 대표는 YS의 민주화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사진=김덕룡 제공

"사실 그 동안 정권을 창출했던 많은 조직들의 폐해가 드러났는데, YS는 그것을 예견하고 해체를 한 것이죠. 그 당시 회원들 입장에서는 섭섭했지만 그건 YS의 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섭섭했을지 모르나 민주산악회로 인한 문제 발생이 없었지 않았습니까."

-민주화 투쟁을 하다보면 정권으로부터의 유혹도 있었을 텐데요.

"유혹은 많았습니다. 제가 자기들의 유혹에 쉽게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은 안 했기에 직접적으로 '같이 하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은근히 '함께 할 수 있다. 도울 수 있다'라거나 '누구도 같이 협력할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박권흠 전 신민당 대변인이 민정당으로 간 것도 유혹에 넘어간 사례도 봐도 될까요?

"박권흠 전 대변인이 그 쪽으로 갈 때도 '박권흠이가 가니까 너도 함께 하면 어떠냐'라는 식으로 제게 말했지만 그건 뭐….  그런데 그 당시 박권흠 대변인이 상처하고 재혼을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박 대변인이 저보고 '김 실장, 용서해줘라. 내가 취직해서 간다고 생각해줘라. 밥 먹고 해야 하니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취직해서 갔다고 이해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김영삼 23일 단식’ 후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을 중심으로 민주화세력이 결집할 움직임으로 보이자 이를 와해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회유와 협박을 시도했다. 최형우나 김덕룡 모두다 회유와 협박을 받은 일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국회가 해산되고 우리 YS 비서실도 축소되고 할 때 저도 고민을 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해외유학이라도 가서 공부를 할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탄압받는 시기에 나마저 빠져서 해외로 나간다면 누가 이런 험악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해외로 나가는 것은 생각에만 그쳤습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 우리 정치와 잘 맞아"

-김 전 대표는 자기 계보를 만들만큼 많은 인사들을 정치에 입문시켰습니다. 홍사덕, 이인제, 김영춘, 이성헌 등 헤아릴 수가 없는데요. 계속 같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종의 배신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그걸 배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정치가 참 정상적인 정치가 아니었습니다. 파행이 많았고 때때로 굴곡이 많았습니다. 쿠데타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험했고 그런 풍파에 표류하다보면 흩어지기도 하고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 차이도 있겠지만, 정치인이라는 것은 배지(국회의원)를 달아야 하고 그래서 지역적 사정 같은 것으로 헤어지기도 하는데, 정치라는 게 일종의 무상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정치는 흔히 속된 표현으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데 그 말이 특히 한국 정치상황과 잘 맞았고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지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나라가 어려울 때  많은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큰 지표가 되는 그런 어른이 별로 없는데, 그것도 정치 혼란과 격변을 겪다 보니까 그 속에서 자기 지키기도 어렵고 때로는 그런데서 자기 스스로 상처받고, 그래서 그런 지도자나 장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역주의가 심하다보니 그런 이유로 ‘김덕룡’을 돕고 싶어도 못 도와준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당내 경선에 나왔을 때, 우리 YS 밑에서 같이 고생했던 사람들이 제게 지역적인 문제 때문에 마땅히 도와야 하는데도 도울 수 없다고 솔직히 얘기할 때 처음에는 섭섭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정치가 왜곡되어 있는 상황이나 지역주의, 또 정책이나 이념보다도 인간적인 편향에 좌우되는 것, 이런 것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제가 영남 정당인 한나라당 등에 있으면서 당에서 더 큰 목표를 이루겠다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주변 사람들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스스로 좀 달래고 그렇게 했습니다. 대선 후보로 나오니까 동지들이 '내가 돕고 싶어도 이런 일 때문에 못 돕는다'며 '용서해달라, 이해해달라'고 할 때 제가 ‘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욕심을 접으면 되는 것이지, 꿈을 접으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스스로 절제했습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최형우 전 장관이 쓰러지기 전에 일식집에서 세 사람이 만난 것으로 압니다. 거기서 '김덕룡은 대통령, 최형우는 당 대표'라는 얘기가 나왔다고 하던데요.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고 그날 저와 최형우, 서석재 셋이서 아침 식사를 약속했는데 그 때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최형우는 당 대표를 하고 싶어 했을 때인데,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지방에서도 활동하고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YS가 자기를 발탁할 것 같지 않고 그래서 고민이나 번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집권여당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놓고 후보 간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이홍구 등 이른바 ‘9룡’을 형성하며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들 중 최형우는 당 내 자파 대의원 중 가장 많은 지지를 이끌어내며 앞서나갔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YS가 최형우의 대선출마를 주저앉히려고 한다. 이를 위해 이원종 정무수석이 최형우를 만나 담판을 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때문에 가장 주목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형우는 힘들다’는 얘기가 회자됐다.

그해 3월, 경선이 본격화 되던 시기에 최형우는 김덕룡 서석재 등과 여의도 ‘아부끼’라는 일식집에서 대권논의를 하기 위해 만났다.

무슨 내용이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날 논의를 하고 난 후 최형우는 ‘뇌일혈’로 쓰러지며 사실상 정치생활을 마감했다.

이날의 기억에 대해 필자는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최 전 장관이 당시 뇌일혈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회창이 대선 후보가 되는 일은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최형우 장관이 있었다면…, 그보다도 김동영 의원이 있었더라면 한국 정치가 더 많이 변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동영 의원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YS로서도 손실이 있었고 저로서도 제일 큰 응원군 내지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그분은 YS를 위해 최일선에서 고생한 사람인데 YS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못보고 세상을 떠났어요. 김동영 의원이 살아있었다면 상황이 많이 달랐을 것이고, 최형우 장관도 그렇게 쓰러지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회창 총재가 등장한 것은 YS정권 말기에 측근문제가 발생하면서 국민적 지지가 급격히 무너질 때였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회창 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이회창 총재를 우리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솔직히, 민주계가 이회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민주계 인사들이 힘을 합쳤다면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YS 지지율이 무너지고, 당시 신한국당이 영남 중심의 정당이었는데 영남인으로서 대통령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호남인이기게 사실상 제외가 된 것이고…."

당시 민주계는 최형우와 김덕룡으로 양분돼 있었다. 그러다가 최형우가 뇌일혈로 쓰러지자 ‘온산계’는 사분오열되며 흩어졌다. 서청원 등 일부는 이수성 지지로 돌아섰고, 다른 일부는 이인제 지지로 급선회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19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했다. 이인제는 국민 지지도를 앞세워 탈당을 감행, 대권에 나왔으나 3위에 그쳤다.

다 지난 일이지만, 정치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최형우가 뇌일혈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 DJ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재미있는 가정이지만, YS는 지지도 등을 들어 최형우의 대권행보를 중단시켰지만 결국 정권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아이러니’하다고 하겠다.

-YS나 김덕룡 전 대표 같은 분이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는데도 저평가 받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부족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선 YS가 저평가 받는데서 출발하는 것이죠. YS 중심의 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정치사에 미친 영향이 전체적으로 잘못 평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제가 YS를 모시면서 민주화 운동했던 것도 저평가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YS가 저평가된 이유 중 하나는 정권 재창출을 못했다는 점입니다. 정권 재창출을 못했기 때문에 YS 정부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절하하는 것들이 이어지다보니까 저도 자연히 추락하는 그런 결과가 됐습니다. 제가 또 영남 정당의 호남인이었기에 더욱 저 자신의 위상이 약화되고 그랬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3당합당’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야합’이라고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3당합당이 군정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3당 합당 없었으면 박태준·이종찬이 대통령 됐을 것"

-3당합당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요?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3당합당에 대해 일부에서는 아주 문제가 있는 것으로 얘기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제가 참여해서가 아니라 3당합당을 안 했다면,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해도, 분명히 군부세력이 계속 집권했을 것입니다. 차기 대통령을 박태준이나 이종찬이 했을 것입니다. YS와 DJ로 민주세력이 분열되고 영남과 호남이 분열되어 노태우가 당선됐듯이 또 군부 하수 세력이 그 다음 대통령이 됐을 것입니다. YS가 정말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고 나왔기에 소위 민주화, 문민정부가 일어설 수 있었고 YS가 대통령이 됐기에 DJ가 대통령 되는 게 가능했습니다. YS가 하나회를 척결하지 못했다면 김대중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일각에서는 4당체제로 갔어도 YS가 92년 대선에서 당선됐을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 당시 상황을 과학적,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논리는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정치 세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선거결과들에 의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3당합당으로 인해 지역분할구도가 고착화됐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지역분할 구도는 그 이전에 벌써 만들어졌습니다.  박정희-김대중 두 사람이 경쟁할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러다가 YS와 DJ가 분열하면서 확연히 드러난 상태였습니다."

-아무 정치인에게나 영문 약칭이 붙여지지 않습니다. 김덕룡 대표에게는 DR이라는 약칭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성장은 거기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 능력 이상으로 사랑을 받고 그렇게 애칭으로 불릴 수 있는 건 진짜 영광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건 제 역량 부족이라고 봅니다."

-과거 미국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레드카펫을 밟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저도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는 연단 옆에 카펫이 있는데 거기에는 상원의원 중 중요한 사람만 앉고 주지사들도 다 못 앉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런데 제가 대통령이 선서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었던 것이죠. 그런 자리를 제게 안내를 하니 깜짝 놀란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가 해외에 있는 정치인 누군가에게 주는 특별한 자리라고 들었습니다. 당시 저를 안내한 사람은 클린턴 대통령 선거 본부의 위원장이었는데 우리 교민 후원회 회원과 연결되었다고 해요. 그 사람은 YS가 대통령이 된 뒤에 대전엑스포가 열릴 때 미국의 대전엑스포 대사로 왔던 젊은 정치인이었습니다."

-레드카펫을 밟은 것을 홍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렇지 않아도 호남출신이어서 그런데 괜히 그런 것으로 부각되고 하면 당 내에서 편치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홍보를 안 했습니다."

"74년 YS 신민당 총재 당선에 결정적 기여"

-YS와 동고동락하면서 특별한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해주시죠.

"YS가 진산이 작고하고 당의 총재되기 직전 얘기인데, 그 당시 YS가 총재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할 때였습니다. 선배들이 즐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저는 개인적으로 진산이 병이 예사롭지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진산이 곧 타계할 수 있고 그러면 YS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는 중앙당 사무처에서만 명단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총장이 명단을 건네주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주소는 물론 명단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명단을 입수했고, 또 젊은 조직요원들을 선발하고 훈련시켜서 진산이 타개했을 때 바로 선거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김영삼은 ‘선명성’을 기치로 1974년 8월 신민당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김영삼이 최연소 총재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김덕룡의 역할이 컸다. 1974년 4월 28일 대장암 판정을 받고 유진산이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당내 실력자들은 출사표를 던졌다. 김영삼 고흥문 이철승 정해영 김의택 등이 총재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이들 중 가장 먼저 기선을 제압한 쪽은 김영삼이었다. 이는 김덕룡의 ‘정보’ 덕분이었다. 그해 1월 세브란스에 입원한 진산의 병명이 암이라는 것을 알아내 김영삼에게 총재 경선에 나설 것을 건의한 사람이 김덕룡이었기 때문이다.

김동영 최형우 문부식 등 현역 의원뿐 아니라 서석재 박희부 유성환 등 이른바 ‘김영삼 부대’는 ‘김영삼 총재 만들기’를 위해 전방위로 뛰었다.

하지만 전당대회를 위한 득표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대의원 명단이 필수목록이다. 사무총장이었던 신도환은 명단을 건네주지 않았다. 김덕룡은 당시 조직국장이던 문정수와 고민을 하던 끝에 중앙당 조직국 간사인 천용택을 통해 대의원 명단을 입수할 수 있었다. 김덕룡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듯싶었다.

그러면서 당시 YS가 경제적으로 쉽지 않았다고도 기억했다.

"그 때 얼마나 어려웠냐면 지방에 있는 대의원들을 접촉하려고 내려갈 때 승용차 기름 값이 없어서 기름을 못 사는 경우도 있었고 대의원들과 설렁탕 정도는 먹어야 하는데 그 돈이 없어서 대의원들 모아놓고 소신 발표를 한 뒤에는 바쁘다고 바로 나왔습니다. 대의원들이 밥을 함께 먹자고 해도 바쁘다는 핑계를 된거죠. 군산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나와서는 허름한 시골 주막 같은데서 저와 또 다른 비서, 운전기사, YS 이렇게 밥을 먹었어요. 군산에 있는 여관에선 외상을 긋고 나오기도 했어요.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큰 차  타고 다니는 걸로 알고, 특히 YS가 부잣집 아들이어서 경제적으로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김덕룡은 YS가 돼지고기를 먹게 된 사연도 소개했다.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YS와 산에 올랐는데 그 때는 밥도 해먹고 고기도 구워먹고 할 때입니다. 우리 YS가 어려서 돼지고기를 먹고 급체해서 고생한 뒤로는 돼지고기를 절대 안 먹었는데, 제가 집에서 시골식으로 양념 고추장을 바른 돼지고기를 가져와서 불에 직접 구워서 먹고, 다른 사람들도 맛있게 먹으니까 YS가 나도 한번 먹어볼까 망설이다가 조금 먹어보더니 '아 돼지고기가 이렇게 맛있는데 이제까지 안 먹었다'면서 저보고 매일 돼지고기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YS가 식성이 좋은데 고기가 다 익기도 전에 혼자서 다 먹어서 옆에 사람은 먹지도 못하고 구경만 했습니다. 그렇게 먹지 않았던 돼지고기가 맛있다면서 구우면 남이 먹을 틈도 없이 막 먹는 겁니다. 주변 사람은 전혀 의식 안 하고 먹었어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YS와 같이 먹다가 나중에는 다른 데로 가서 먹었습니다."

"정치권을 올바른 방향으로 재편하고 싶어"

-앞서 지역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는데 만약 지역주의를 깨는 정계개편이 진행되면 동참할 생각입니까.

"오늘 제가 참여하고 있는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세총) 이사회 자리에서 이런 인사말을 했습니다. ‘내 나이가 70대 중반인데 남은여생을 어떻게 정리하고 마감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중이다. 한두가지 꼭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총을 만든지 20년이 됐는데, 정치활동을 하다 보니 실질적인 일을 못했다. 지금이라도 세계에 나가 있는 750만 동포를 어떻게 ‘네트워킹’해서 국가발전과 연계하느냐, 이런 일을 새롭게 하고 싶다. 또 내가 평생을 정치를 업으로 해왔고 죽어서도 정치인인데, 지금 정치상황이 잘못됐다. 여야가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전투를 벌이는데 이런 정치는 잘못이다. 나는 솔직히 정치권이 새롭게 재편성돼야 한다고 본다. 내가 능력이 없지만 그런 일을 하고자 한다. 내가 정치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정계를 바른 방향으로 재편하고 싶은 것이다. 지역대결구도, 이념대결구도를 바꿔야 한다. 그런 걸 하고 싶다. 그런 일이라면 앞으로 봉사하고 기여하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정치 중심에 서겠다는 게 아니라 정계개편에 앞장서고 그런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겠다. 또 한가지는 어쩔 수 없이 민화협 대표를 또다시 맡게 됐는데 그것도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남북관계 개선, 남남갈등 등 국민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힘을 쏟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역주의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를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할 생각은 없나요.

"우리끼리 만나면 자주 그런 얘기를 합니다. 권노갑 등 옛날 DJ 측근들을 만나서 지금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 YS와 DJ가 민주화를 위해 기여했고 대통령도 했는데 두 사람이 87년 대선에서 분열됨으로써 지역갈등 구도를 심화시켰던 건 틀림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역사에 해를 끼친 것이고 두 사람을 모신 우리도 똑같이 죄인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지역갈등 구도를 해결한다든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정치문화를 바꾸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런 일을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죽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김덕룡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인사들이 YS-DJ 화합 프로그램을 추진했던 사실도 전했다.

"DJ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 사람을 화해시키자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광태, 권노갑, 김무성, 김상현, 그리고 저 등이 모여서 그런 의논을 했고 민추협이 중심이 되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민주세력이 지역분할구도를 뛰어 넘어서 화합하는 그런 것을 추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YS와 DJ가 화합하도록 하자고 했는데 DJ가 그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DJ가 타계하기 전에 YS가 병원에 입원한 DJ를 문병한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DJ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우리가 이벤트도 만들고 실제로 뭔가를 하려고 했는데 그걸 못했습니다. 나중에 YS가 DJ 측근들 불러서 밥도 사고 했는데, 그게 그 일환으로 진행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그런데, YS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87년도 대선을 전후에 DJ와 같이하려고 했던 흔적들이 있는데요. DJ의 거부로 단일화나 야권통합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솔직히 그 당시에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됐던 과정에서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면 괜히 지나간 얘기를 하면서 '내가 잘했고 네가 못했다'라는 싸움이 될 것이기에 자제해야 하지만, 그 때 DJ가 선택했던 길은 좀 문제가 있었죠. 그래서 재야에서도 그 점은 인정했습니다. 재야 일각에서도 DJ가 양보했어야 옳지 않느냐, 그런 주장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단합해서 했더라면 세상이 달라졌을 것이고, 노태우 정부라는 기형적인 군부 통치 기간은 생략됐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등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역사를 가정한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18년 만에 부활된 대통령직선제 아래에서 치러진 1987년 13대 대선의 가장 큰 이슈는 ‘군정이냐, 민정이냐’였다. 군출신인 집권여당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맞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대권주자가 있었다. 당시 국민의 염원이라 할 수 있는 ‘군정종식’은 야권단일화가 이뤄지면 가능할 듯 보였다. 단일화의 걸림돌은 ‘미창당 지구당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였다.

통일민주당은 56곳의 창당 지구당과 36곳의 미창당 지구당으로 나눠져 있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후보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36곳 미창당 지구당 조직책을 만들어야 한다. 상도동 측 김동영은 50대 50으로 하자며 18곳씩 동교동과 나눠서 임명하자고 했다. 반면 동교동 측 대표였던 이용희는 창당지구당의 지구당위원장 수가 상도동이 많다며 23곳을 달라고 했다.

주장이 엇갈리자 양 측 간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나 10월 22일 후보경선을 단판짓기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난 YS는 동교동 측 안을 수용해 버렸다. 상도동 내부에서조차 “YS가 후보를 양보했구나”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둘은 끝내 야권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아예 통일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자체가 없었다. DJ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딴 살림을 차렸다. 4자필승론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선에 참여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다. 영남에서 노태우와 김영삼이 표를 나눠 갖고, 충청에선 김종필이 표를 독식하면, 호남과 수도권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은 DJ가 당선된다는 논리다.

3당합당 이전에도 YS는 DJ가 이끄는 평화민주당(평민당)과 여러 차례 야권통합을 시도했다. YS가 평민당과의 통합을 위해 ‘소선거구제’ 안을 받아들인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한복판에 서있던 김덕룡은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자제하는 게 역력했다. 지역주의 해소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듯싶다.

김덕룡은 인터뷰 내내 ‘역사의 가정은 없다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여 많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인터뷰는 ‘이렇게 했더라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었을 텐테’라는 그의 생각들을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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