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재의 협동조합 이야기⑥> ‘지학순’ 주교와 ‘호세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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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재의 협동조합 이야기⑥> ‘지학순’ 주교와 ‘호세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
  • 이기재 지역과세계연구소 소장
  • 승인 2013.11.07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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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기재 지역과세계연구소 소장)

원주에서 故 지학순 주교는 성인과 같은 존재다. 그의 숭고한 삶은 원주시민의 가슴에 지금도 생생히 살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원주 시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유명 인사들은 그가 묻혀있는 ‘베론 성지’를 찾곤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대선 기간 중 지학순 주교의 묘소에 참배했다. 눈 쌓여 미끄러운 200여 미터 오르막길을 지팡이 짚어가며 오르내리는 성의를 보여 주었다. 지학순 주교는 평생을 반독재투쟁의 일선에 서 있었던 분으로 유명하다. 협동조합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동조합의 개척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분 덕이었을까, 원주는 협동조합의 메카, 한국판 ‘몬드라곤’이라 불린다.

협동조합이 바람을 타자, 많은 사람들이 원주를 방문하고 있다. 작년 한 해만 92개 단체, 2천760여명이 협동조합을 배우기 위해 다녀갔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 협동조합의 뿌리

원주 협동조합의 역사는 1966년 지학순 주교가 원주 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신자 35명이 6만 4천원의 출자금을 모아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초대 이사장은 장일순 선생이 맡았다. 신협은 고리채로부터 농민과 소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저리로 생활자금을 대출하는 일을 했다.

당시 사업주들은 광부에게 월급이 아닌 쌀 배급 전표를 나눠주기도 했는데, 돈이 필요한 광부들은 손해를 감수하며 ‘깡’을 해서 현금을 만들었다. 급전이 필요한 광부에게 협동조합의 저리 대부금은 단비와 같았다.

협동조합은 농촌과 광산촌에서 소비물품의 공동구매도 했다. 광산촌의 경우 물가가 서울에 비해 세 배나 비쌌기 때문에, 공동구매를 통한 저렴한 판매가격은 광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진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창립하여 협동조합의 교육 및 보급에도 힘썼다. 광부를 5~6명씩 나누어 일주일 코스로 원주에서 협동조합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 후 근근이 맥을 이어온 원주 협동조합은 1983년 한살림농산, 2002년 원주의료생협의 탄생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원주의료생협의 경우 원주한살림, 밝음신협, 원주생협 등 7개 협동조합이 공동출자하여 만든 것으로, 협동조합 간 협동의 모범적 사례다. 2009년에는 19개 회원단체가 뭉쳐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를 만들어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원주 협동조합의 2011년 말 매출액은 262억, 조합원회원수는 3만5천명(원주인구의 11%), 고용인원은 435명이다. 몬드라곤과 비교하기는 부끄럽지만 급속히 성장 중이며,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몬드라곤도 처음부터 협동조합의 왕좌에 앉았던 것은 아니다.

몬드라곤은 스페인의 버려진 변방인 바스크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5명의 창업자가 난로공장을 만들어 초라하게 출발했으나, 지금은 금융, 제조, 유통 등 260개의 회사를 거느린 세계적 기업이 되었다. 자산규모는 무려 54조원, 고용인원은 8만4천명이나 된다.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원주가 한국의 몬드라곤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학순 주교와 호세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 때문이다.
원주에서 협동조합의 씨앗을 뿌린 지학순 주교와 몬드라곤에서 협동조합 ‘울고’를 창립한 호세마리아 신부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두 분의 인생 궤적을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지학순 주교는 1921년생, 호세마리아 신부는 1915년생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분은 가톨릭 신부였고, 전쟁에 참여했으며, 폐허 위에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개척자로 나섰다.
소년티를 벗기 시작할 무렵 지학순은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 격인 서울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한다. 폐결핵에 걸려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943년 다시 원산의 덕원신학교에 입학한다. 북조선 공산당의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남한으로 탈출하다가 체포된다. 다시 탈출을 시도하여 1950년 월남에 성공한 지학순은 가톨릭신학대학에 편입하지만 곧 6.25전쟁이 터지면서 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수많은 사선을 넘는다.

호세마리아 신부는 몬드라곤의 역사

호세마리아 신부의 운명도 비슷하다.

열두 살 되던 해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던 중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승리한 프랑코 장군은 1975년까지 철권통치를 하는데, 호세마리아는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가 태어난 바스크지역은 독특한 전통문화가 유지되어 온 곳으로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세 살 때 사고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전투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지만 바스크 군이 펴내는 신문의 발행을 도우며 전쟁에 참여했다. 무장 항쟁이 불가능해지자 자수하였고, 군사재판을 통해 전쟁포로로 분류되면서 풀려난다.

1941년, 평범한 신부로 몬드라곤에 도착한 호세 마리아는 기존의 사목들과 다른 목회활동을 한다. 운동경기장을 세우고 축구 리그를 만들어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협동 문화를 가르쳤다. 학교를 세우고 기술을 가르쳐 지역의 경제를 일으키는데 힘썼다.

일부 보수적 주민이 ‘빨갱이 신부’라고 비난했고, 그 반대편의 바스크 민족주의자는 프랑코정부의 협력자라고 욕했지만, 그는 오로지 ‘협동 공동체’에만 전념했다. 호세마리아 신부는 자서전에서 “우리는 현실주의자다. 현실주의자나 실용주의자가 되는 것이 이상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공상이나 아름다운 꿈과 혼동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성취할 수 있는 목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협동조합 지도자들이 어떤 정당이나 이데올로기에 제휴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다.

지학순 주교도 반독재투쟁에 앞장섰기 때문에 사상을 의심 받았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가 왜 발생했는지 아는가? 빈부의 차가 극심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버림받은 상태를 폭력으로 고치자고 생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부정과 부패를 시정하여 빈부의 차가 감소되어야 공산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공산주의를 막는 길은 부정부패를 시정하고 사회정의 구현하는 길밖에 없다.”라고, 이념공세를 반박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좌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빈부격차해소, 부정부패 척결이었다.

두 분은 신앙, 성장과정,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과 사랑, 철학이 매우 흡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호세마리아 신부가 세계적인 협동조합 ‘몬드라곤’을 만든데 비해, 지학순 주교는 우리나라에 협동조합의 씨앗을 뿌리는데 머물렀던 점이다. 지학순 주교 같이 국민에게 존경받는 지도자가 협동조합을 더 키웠다면 단기간에 성장이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건 협동조합을 본격적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었다. 역사적 스토리를 지닌 원주 협동조합이 전국 협동조합의 맏형으로서 역할을 잘 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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