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범의 영화이야기>영화 〈대호〉, 시대의 처연한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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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의 영화이야기>영화 〈대호〉, 시대의 처연한 헌사
  • 김기범 영화평론가
  • 승인 2015.12.17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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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우리를 꾸짖는 금수의 호통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기범 영화평론가)

▲ 영화 <대호> 포스터.

대만이 낳은 불세출의 영화감독 이안은 <라이프 오브 파이> 를 통해 태평양의 망망대해를 떠도는 쪽배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한 소년과 호랑이와의 기이한 여정기를 환상의 영상미로 그려 내어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의 울림을 선사한 바 있다.

결국 스크린에 몰입하며 숨죽였던 온 세계인들은 리처드 파커라는 그 호랑이가 파이라는 소년의 또 다른 자아였음을 암시하는 마지막의 그 엄청난 반전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겸허의 철학이 깃든 그 장엄하면서도 위대한 서정시를 안겨준 이안에게 아시아 최고의 영화감독이라는 절대 찬사를 부여한다.

이안 감독이 만든 그 환상의 호랑이가 그렇게 인간 본연의 존재론에 대한 추상적 화두를 풀어 헤쳤다면, 일제강점기 억지와 말살의 총칼에 핍박받던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조선 호랑이와 포수의 공존기를 지리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그려낸 <대호> 는 차라리 보다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어떤 면에서는 이안의 리처드 파커보다 더 현실적인 메시지를 오늘의 우리에게 무심코 던져 준다.
 
한반도 유사이래, 어느덧 한민족의 얼과 정서를 대변하는 표상으로 굳어진 호랑이는 삶에 숨차 하던 민중에게 늘 친근과 두려움의 이중적 존재로 군림하며 지친 우리의 영혼을 강한 기개로 승화시키던 열망의 매개 그리고 경이의 화신, 그 자체였다.

그러나 <대호>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반도인의 상징적 존재인 호랑이가 자신을 척살하려는 일본군들을 준엄한 응징으로 심판한다고 해서, 한민족의 웅혼한 민족혼을 나타내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이 시대를 살아가며 신산한 삶 속에서 현실에 밀려 사라지는 그 모든 것, 특히 고단한 세상살이 속 생존과 도태의 아슬한 경계 선상에 있는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을 위한 헌정이다.

이에 대한 간과와 무시는 단순히 호랑이와 인간 간의 비현실적인 혈투와 액션만을 기대하는 이들에겐 자칫 140분의 전개 과정이 길게만 느껴질 수 있는 자가당착의 사유이며, 동시에 어설픈 민족주의 시각으로 영화 보기를 경계해야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한민족의 숨통과 흔적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에 신음했던 힘없는 민초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일신과 가족을 지키고 시대의 아픔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듯, 현재의 아버지들 또한 자신들의 가족과 영역을 지켜 내고자 한다. 마치 춥디추운 겨울산 동굴 속에 웅크리며 새끼들을 지켜내야 하는 한 마리 외로운 호랑이처럼….

이렇듯 자신과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려는 가장의 이 고독한 의무마저 계속 간직하지 못한 채, 현실의 아픔에 떠밀려 하나 둘 사라지는 시대의 마지막 모습들은 바로 이 땅 아버지들의 현재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늘 지난하기만 한 현실의 아픔 속에서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최후의 명포수 아버지 역에 최민식이란 배우는 더할 나위 없는 일체감이다. 어떠한 역할을 맡던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에게 몰입시키게끔 하는 데에 천부적인 최민식의 연기는 단순한 위압감이 아닌, 진실로 관객과 한 몸이 되어 아우르는 진정한 대호의 카리스마, 바로 그것이다.

시대의 조류에 밀려 아스라이 스러져가는 아버지들의 애틋한 모습에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가 중첩되는 이유이다. 

여기에 그러한 최민식의 허허로운 산군과 같은 모습을 받쳐주는 정만식의 열연이 돋보인다. 그간의 전작들에서 크고 작은 조연으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내었던 그의 묵직한 인상은 인간과 야수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복수의 화신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의 이중적 속성을 그려 내 제대로 된 존재감을 발산하는 자신의 최고 필모그래피를 만들어 낸다.

한 마리의 호랑이가 사냥감을 천천히 몰듯, 영화는 그렇게 140여분 동안 조금씩 관객을 몰고 나간다.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고독한 호랑이와 춥고 깊은 산속에서 이를 맞이해야 하는 인간들과의 처절한 대결이 이끌어내는 팽팽한 긴장감, 특히 극 후반의 예상치 못한 반전은 비록 아쉬움이 남는 CG 나마 미처 대수로움조차 못 느끼게 만든다.

탐욕과 집착에 찌든 현재의 인간 군상들을 준엄히 꾸짖듯, 마지막으로 토벌대를 찢어대는 대호의 무시무시한 눈빛과 거침없는 포효 장면은 어리석은 세상과 인간을 일깨우는 호통이며, 사냥꾼에게 어미를 잃은 새끼 호랑이의 미약하나마 애절한 분노의 울부짖음과 함께 단연 이 영화의 전율스런 백미이다.

전작 <신세계> 에서와 마찬가지로 배경음악과 함께 마지막 장면들이 남기는 아련하면서도 긴 여운은 이제 박훈정 감독의 전매특허가 된 듯하다.

일본 배우 오오스기 렌이 분한 마에노조 도장관은 종국에 “지리산의 이 깊은 겨울을 이길 수가 없지 않는가…” 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겨울산의 깊은 메아리는 남의 나라 깎아지른 설산 히말라야가 아니라, 정작 우리의 고담준봉 지리산에 있었다.

·한양대학교 정치학 박사
·트리즈 뉴스 전문기자
·한양대학교 연구원 및 연구교수 역임
·한양대학교, 서원대학교 등 강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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