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박근혜, 이대로는 대통령 쉽지 않다˝
김경재 ˝박근혜, 이대로는 대통령 쉽지 않다˝
  • 정세운·윤종희 기자
  • 승인 2011.11.28 12:01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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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전 국회의원한국대선 홍보전의 산증인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윤종희 기자)

#1.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은 젊은 세대의 진출을 완강히 거부하는 당내 일부  지도층의 자세에 기인한다. 나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 같이 최후 승리의 날까지 싸워 나갈 것이다. 싸우다 죽더라도 사술만 논하는 마키아벨리는 되지 않겠다.

#2.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담은 ‘노무현의 눈물’이나 노 후보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상록수’ 등의 TV 광고.

전자는 1970년 1월 24일 김대중 후보가 서울 뉴서울호텔에서 대권도전을 선언하며 남긴 말이다. 후자는 2002년 대선전에서 화제가 됐던 TV 광고다. 둘 다 김경재 민주당 전 의원이 쓰고, 만든 작품이다. 이처럼 김 전 의원은 한국 대선 홍보전의 산 증인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의 김대중 후보의 선전기획비서를 시작으로 1987년에는 김대중 후보의 홍보담당 특별보좌역, 1992년과 1997년에는 김대중 후보 홍보특보와 홍보위원장을, 2002년에도 노무현 후보 홍보본부장으로 대선을 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권력의 ‘핵심’에는 빗겨있었다. 김 전 의원은 “아마도 권력의 입맛이 아닌 국민의 구미에 맞는 목소리를 낸 것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래도 권력에는 꼭 필요한건 아니나 ‘대선에는 꼭 필요한 인물’로 그를 규정하는 게 편리하다 싶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또 한 번 그의 주가가 올라가지 싶다. 그가 절실하게 느껴질 시기가 온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는 차기 대권후보는 누구일까?

지금도 69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새로운 정치를 탐색하고 있는 그와의 인터뷰는 2011년 11월 22일 여의도 한서빌딩 사무실에서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 전 의원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큼지막한 컴퓨터 모니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중도신당 창당과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박세일 서울대 교수 기사가 떠 있었다. 그의 생각이 ‘신당’에 미치고 있는 것일까? 속내를 감추고 박근혜 대세론부터 시작했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론입니다. 박 전 대표가 내년 대선에서 당선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쉽지 않다고 봅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요즘 너무 많습니다. 그 수가 갑자기 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박 전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그 이상을 넘는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박 전 대통령 시절 많은 탄압을 받았고 가장 강렬하게 비판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박 전 대표와 손을 잡는다면 '박정희와 김경재가 화해했다'는 식으로 비치면서 박 전 대표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실제로 박근혜 쪽 사람들의 접촉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안철수 교수’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꼭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안철수 교수가 대선에 나올 것으로 보는데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박 전 대표가 쉽게 대통령이 될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른 제3의 인물이 나올 겁니다. 지금 한나라당에서는 박 전 대표 다음으로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가장 눈길을 끕니다. 그런데 현재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워낙 큽니다. 만약 민주당이 ‘온건한’ 모습으로 선거에 임한다면 그 쪽으로 정권이 넘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박 전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의 관계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성’을 요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지도자에게서 공정성이 첫 번째로 나타나는 부분이 인사입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인사를 형편없이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고소영'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이겼던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정이 워낙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치로 이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과 철저히 거리를 둘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그게 통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원안을 고수한 것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세종시 문제와 관련, 박 전 대표의 태도를 보고 실망했습니다. 박 전 대표는 국민과의 약속이라고 했지만, 약속이라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게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세종시는 후자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세종시 건설이 영원무궁토록 지켜져야 하는 약속은 아니지 않습니까. 박 전 대표가 그런 부분에서 유연성이 없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나중에 국민들에게 “약속을 못 지켜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나와 당선됐습니다. 박 전 대표도 그런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안철수, 해방직후 이승만과 닮아…상식이라는 무서운 메시지 던져"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요즘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안철수 바람'은 미풍에 그칠까요.

 

"지금 상황이 꼭 해방직후 정국과 매우 흡사하다고 봅니다. 완전히 새로운‘패러다임’으로 바뀌려고 하는 분위기인데 저는 이승만과 안철수를 같은 의미에서 봅니다. 정국 흐름을 이끌어가는 독립변수 내지 상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해방정국 때 모든 정치인과 정파가 이승만과 연합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남로당의 박헌영 까지도 그랬습니다. 김성수의 한민당, 김규식의 중립당, 김구의 한독당, 여운형의 인민당 등이 다투어 이승만을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한민당을 선택했다가 안 되니까 자유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안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혁신과 통합, 민주당, 심지어 한나라당 등에서도 안철수를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정치의 새로운 ‘상수’로 등장했습니다. 안철수로부터 공천을 받으면 어느 지역에 가서도 당선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수많은 옥고는 물론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외국에서 어렵게 사는 등 수십 년 간에 걸친 관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통령도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안철수는 컴퓨터 백신을 만들고 서울대 다니다가 미국 유학 같다오고…, 그런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젊은이들이 열광할까요. 바로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사고방식이 순수합니다. 특히 '상식과 비상식'이라는 무서운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안철수 교수는 어느 정당을 선택할까요.

일단 안철수는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법륜 스님과 함께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박 시장이나 법륜 스님은 안철수를 일종의 ‘아이돌’ 대하듯이 합니다. 안철수도 나름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넘어가겠습니까. 안철수가 그런데 넘어가면 한국정치는 불행해 집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한미 FTA에 대해 절대 안 된다고 고집 피우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안철수가 말한 '상식'에 맞습니까. 국민이 정해 준 의석수를 무시하고 소수자가 폭력으로 다수결원칙을 짓밟는 게 상식적입니까. 안철수는 그런 문제가 있는 정파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김 전 의원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박세일 신당'에 대해 입을 열었다

"저는 안철수 바람과 맞물려 우리 정치가 내년 대선을 계기로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것으로 봅니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정당체제가 완전히 불신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핵분열을 할 수 있고…, 현재 야권에서 이런저런 정파들이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데 그런 건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차라리 중도와 보수를 통합한다는 '박세일 신당'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온건파가 정권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좌우를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박세일 신당'과 관련해 긍정적 입장을 밝혔는데 특별히 조언할 게 있나요. 

"어느 특정집단을 위한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온다면 국회에서 폭력을 썼던 사람과 부정부패로 금고 이상 형 받은 사람, 특별한 이유 없이 군대에 안 간 사람은 일체 뽑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아직 우리 현실에선 깨끗한 사람들이 정치에 진입하는 게 아주 어려운데 이 자체가 틀려먹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2030세대가 열광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민노당 핵심이 종북…우리 정치 휘말려선 안돼"

-평소 민주노동당의 종북성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민주노동당에 종북세력이 있다고 봅니까.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노당의 핵심이 종북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우리 정치가 휘말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북한의 지원이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노동단체가 지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정부·국가가 지원하는 차원이 아니겠습니까."

 

김 전 의원은 공식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대한민국 첫 번째 국회의원이다. 그는 자신이 본 북한 현실에 대해 다소 격앙된 어조로 전했다.

"저는 과거 북한이 우리보다 외형적 성장은 뒤떨어지지만 소박한 민족주의적 정서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북한에 가보니 현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지옥이었습니다.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저는 북한을 정말 개방해서 통일이 되어 함께 잘 살기를 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김정일이 개방질서에 맞춰 선의로 물러난다면 어디로 망명을 시킬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3대 세습이 뭡니까.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극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북한은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전근대적 세습왕조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IT 강국이고 무역대국이라고 하는데 국제사회와 세계에서는 남한과 북한을 같은 ‘스펙트럼’으로 바라봅니다. 당연히 북한문제도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한의 좌파들과 반미주의자들은 북한의 인권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고서도 진정한 운동가로 자처할 수 있습니까. 저는 남한의 진정한 좌파들이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비판하며 합심해서 단 한번만 성명을 발표하면 북한정권이 뒤집힐 정도의 변화가 오리라고 봅니다. 엄청난 임팩트가 있을 것입니다."

"남한의 진정한 좌파가 한목소리로 北인권 외치면 김정일 정권 전복될 수도" 

-북한 정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데 DJ의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요.

“제가 북한을 갔다 와서 보고한 것이 DJ 입맛에 맞지 않았습니다. 나는 햇볕정책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무조건적인 햇볕정책은 옳지 않다고 봤습니다. 햇볕정책은 ‘4계절’이 붙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봄에는 따뜻한 봄볕, 여름에는 성장과 촉진, 가을에는 결실 그리고 겨울에는 삭풍도 있어야 좋은 결실이 있다고 봤습니다. 북한을 개방하고 통일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능신능굴’한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부 세력이 천안함 북침에 대한 정부의 발표를 안 믿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한민국 영해인 서해에서 우리 청년 46명을 폭사시킨 침탈행위를 자행한 세력이 이 지구상에서 과연 어떤 세력이겠습니까. 중국이 했겠습니까. 미국이 연습하다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니면 소련이…. 그 건 북한이 한 것입니다. 작가 이외수 씨도 못 믿겠다는 식으로 얘기했더군요. 자기가 30년 이상 소설을 썼는데 이번 정부발표와 같은 소설 즉 거짓말은 처음 봤다고요. 허허 그런 사람이 SNS에서 최고로 인기가 있다는 게 개탄스럽습니다. 도올 김용옥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김용옥은 정권초기에는 가만있다가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지면 그때부터 비판하더라고요.”

"작가 이외수의 천안함 정부발표 비난…개탄스러워"

-향후 기회가 된다면 통일과 관련한 일을 해볼 생각은 있나요.

"저는 대학시절부터 '민족주의비교연구회'를 만드는 등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중도·보수 세력이 전혀 위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남북교류를 촉진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의원 시절 7박 8일 간 북한을 갔는데 그 사회에도 쓸 만한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개방에 대한 뜻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DJ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야당이 배제됐습니다. 그러나 DJ가 평양을 가기 전에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전화로 '뭐 김정일에게 할 얘기가 없느냐'하고도 묻고 돌아와서도 점심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다고 봅니다. 통일문제를 권력자가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통일문제를 여·야가 함께 끌고 가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과거 정치 얘기로 들어갔다.

김경재 전 의원은 196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련)’를 만들었다. 민비련은 시쳇말로 최초의 의식화 서클이다.

“실상 민비련보다 더 빨리 의식화 된 서클이 있었죠. 신진회라는 이념서클이 있었는데 조선일보 출신인 류근일이 적극 가담했죠. 당시 류근일은 대단한 좌익운동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갔는데 거기서 홍진기 장관을 만나서 교화가 됐다고 합니다. 지금은 보수논객이지만 사상적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입니다. 또 민족자주통일연맹(민자통)이 있었는데 당국으로부터 탄압도 받고 해서 우리는 온건한 학생단체를 만든다면서 민비련을 만들었습니다. 박범진, 이종률 그리고 제가 창립 멤버 3인방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도교수로 황성모 교수를 모셨습니다. 그 때는 지도교수가 없으면 서클을 만들 수 없었어요. 이것 때문에 나중에 황성모 교수가 많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현역 장교였던 김 전 의원을 상대로 황 교수를 용공혐의자로 지목하라는 압박과 회유를 벌였다.

“저는 남산 중정에 수십 번 끌려 다녔습니다. 제가 만약 그 양반을 좌익이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될 게 뻔한 데 그런 증언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과정에서 김형욱도 만났습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억울한 정훈장교 선발 최소…사형·무기징역 빗겨간 전화위복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인데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까.

“그 때문에 정훈장교로 선발됐는데 취소됐어요. 아마 정훈장교로 갔다면 이등병 강등은 물론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받았을 거예요.”

당시 정훈장교는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대학원을 다닐 수 있어 경쟁이 치열했다. 후에 통일혁명당(통혁당) 당수였던 이문규 중위(정훈장교)가 소령 한 사람과 같이 선발 인터뷰를 하러 내려와 김경재를 보자마자 ‘자네는 무조건 합격’이라며 인터뷰도 없이 그를 정훈장교로 선발했다. 6·3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정훈장교 선발이 무효가 되고 행정장교로 경북포항 토끼꼬리에 있던 궁벽진 경보대대로 귀양 가듯 밀려갔지만 만일 그때 이문규를 따라 공군본부에 가서 정훈장교를 했더라면 영락없이 이문규 부하가 됐을 거라는 예기였다. 김경재 대신 정훈장교로 간 서울사대 출신 이영윤은 통혁당 연루로 이등병으로 제대했었다. 

통혁당 사건은 정부 전복을 꾀하려는 간첩단 사건이라고 중앙정보부가 당시 발표했다. 이로 인해 통혁당 사건의 주동자였던 이문규 김종태 김질락 등은 1969년 9월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아마도 통혁당 사건은 김 전 의원을 빗겨갈 운명이었나 보다.

이후 영어실력이 출중했던 김 전 의원은 제대 후 미국 하버드대학 정치학과 등 세 곳에서 입학허가서와 함께 장학금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생겨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공군 장교를 무려 4년 반이나 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죠. 중앙정보부에 정홍진이라는 서울문리대 선배라는 분을 통해 알아봤더니, 내가 민자통에 연루됐기 때문에 여권을 받을 수 없다고 해요. 솔직히 사실은 제가 민자통 회원이 아니었는데…. 만약 그 때 유학을 갔다면 아마도 정치학 교수가 됐을 겁니다."

-그래서 유학을 포기하고 사상계에 들어갔나요.

“아니에요. 그 선배를 통해 내가 민자통 회원이 아니라고 하며 재심청구를 했죠. 그랬더니 6개월만 기다리라고 해요. 그 사이 사상계는 우연치 않게 들어가게 됐죠.”

"사상계 입사하자마자 편집부장 대행 행세"

-여권발급을 기다리던 사람이 반체제 서적을 만드는 월간 ‘사상계’에 들어갔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돈도 없고, 시간을 죽이기 뭐해서 기다리는 동안 취직을 하려고 했어요. 대학교 학과사무실에 가보니 농협 공보실에서 회보 만드는 자리 추천서가 하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 건 못하겠더라고요. 농업에 대해 아는 것도 부족하고. 거기서 나와 종로 5가 사상계 건물을 지나가다 한번 들려볼까 하고 올라갔더니 평소 인사가 있던 부완혁(사상계 발행인)씨가 '아, 김경재 씨 언제 미국 갑니까'하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여권이 안 나와서 못 간다'고 하니 중정 욕을 실컷 하다가 '그러면 기다리는 동안 우리 사무실에서 근무하면 어때요'하고 말해요. 그래서 대뜸 '얼마나 줄 겁니까' 했더니 3만환을 준다고 해요. 당시로서는 큰돈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김중위 정치 편집장이 현민(유진오)의 비서관으로 가는 바람에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당시 정치 편집장이 수석 편집장이었는데 유경환 편집부장도 조선일보로 간 바람에 공석이어서 졸지에 제가 사상계 편집부장 대행 행세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강경한 반정부 분자가 됐습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 전 의원은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사상계 창설자였던 장준하와 발행인 부완혁과의 관계다.

 

"부완혁과 장준하, 두 사람 사이가 무지 나빠 있었습니다. 저를 스카우트한 사람은 부완혁 선생이나 원래는 장준하 선생과 인연이 먼저였습니다. 장준하 선생도 '김경재를 잘 뽑았다'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이 정치활동 때문에 자금이 궁하면 부완혁 선생에게 와서 이런저런 설득을 펴면서 출판에 쓸 자금을 자주 빼앗아 갔다고 해요. 부 선생이 이 것 때문에 신경질을 자주 냈어요. 솔직히 당시 사상계를 지원하려는 독지가들도 장 선생의 경영 능력을 안 좋게 평가했어요.

함태탄광을 경영했던 김세영 씨가 지원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부 선생이 운영할 것을 요구했어요. 장 선생은 민족운동가적 풍모만 있었지 경영 능력은 별로라는 겁니다. 나중에 사회부 담당하는 선배 얘기를 들어보니 장 선생은 한참 사상계 전성기 때 무슨 일이 제주도에서 나면 대뜸 비행기 타고 가서 취재하라고 말할 정도인데 봉급은 2~3개월씩 밀렸다고 해요. 봉급 얘기를 하면 '자네가 봉급 때문에 나랑 일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는 1969년 3선개헌 저지 투쟁에 나서며 김경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이 봐, 김동지. 이제 문필로, 사상계 잡지로 반독재운동할 때는 지났어. 행동으로 나서야 돼. 사상계 그만두고 나를 따르게.”

김경재는 고민 끝에 사상계를 하직하고 ‘3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범투위)에 합류했다.

“제가 사상계를 그만둘 때도 부완혁 씨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해요. 자기를 버리고 장준하 선생한테 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범투위나 사상계나 다 같은 것 아니냐’고 설득했죠.”

범투위는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세 사람이 공동위원장이었다. 선전위원장 겸 대변인은 장준하 씨가 맡았다. 그 아래에는 김영삼 김대중 윤길중 송원영 김철 등이 선전위원으로 참석했다.

-범투위에서 부대변인을 맡았죠.

"지금처럼 부대변인이 많을 때가 아닙니다. 대변인도 한 명, 부대변인도 한 명이었을 때죠. 범투위가 정식발족하면서 운영위원들끼리 투표로 부대변인을 뽑았죠. 그 때 백기완 씨와 붙어서 제가 이겼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중립을 선언했고 대신 DJ와 이철승 쪽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백기완 씨가 명동으로 저를 불러서 부대변인 자리를 양보하라는 압력을 넣기도 했었어요. 그 만큼 그 자리가 서로 하고 싶은 자리였습니다.”

범투위 부대변인 자리 놓고 백기완과 '한판'

-범투위 인연으로 김대중 대선 캠프에 합류하게 된 거군요.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이기택 선배를 통해 비서로 들어오라고 했죠.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닿아서 그쪽으로 갔죠. 대선 초부터 DJ 공보비서를 하면서 신문광고와 성명서, 연설문을 썼죠. 또 정치기획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는데 '박정희 후보에게 묻는 6가지 질문'등이 제 작품입니다.”

그러면서 김 전 의원은 혁신적인 홍보문구도 많이 냈다고 했다.

“제가 ‘인조반정’을 생각해서 ‘대중반정’이라는 말을 만들었죠. 그런데 유진산 선생이 문구가 너무 과격하다고 했죠.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문구가 과격하다 싶으면 신민당 명의가 아닌 김대중 후보 명의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대선 끝나고 나서 보안사와 중정에 가서 죽도록 많이 얻어 터졌습니다. 당시 선거는 실질적으로 이겼다고 봅니다. 투표에서 이겼고 개표에서 졌다고 봅니다."

1971년 대선에서 패한 김대중 캠프는 초토화 당했다. 김경재를 비롯한 김상현 조연하 박영록 등은 1972년 중정과 보안사로 끌려 다니며 ‘김대중의 돈과 조직, 배후’를 밝히라는 고문을 당했다. 그러다가 강원룡 목사가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는 말에 김 전 의원은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1971년 말에 여권은 나왔죠. 그런데 여자친구가 1968년에 먼저 의사로 유학을 갔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간 게 섭섭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 안가면 의사면허가 무효가 됐다고 해요. 그러다가 제가 여권이 나왔다는 게 알려지니까 저한테 두어 번 초청의사를 보내왔지만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갈 수가 없었죠. 자기 신세 안 지고도 얼마든지 아르바이트하며 학업을 할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끝끝내 저는 안 갔어요. 그러다가 강 목사의 말을 듣고 유학을 결심하고 망신당할 각오로 유학시험을 보러 서대문에 있는 경기대 캠퍼스에 갔는데 웬걸 두세 명 보낸다는 에큐메니컬 스칼라쉽 시험에 일천 명 이상이 몰려온 겁니다. 알 만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고요. 창피해서 고개도 안 들고 시험만 치루고 도망치듯 나왔죠..”

그는 천행으로 ‘에큐메니컬 스칼라십’을 얻어서 1972년 마침내 유학길에 올랐다.

“워싱턴에 있는 버지니아 신학교를 일년 마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유펜)에 가게 됐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여차친구가 보내온 편지에 답장도 안 하고 했어요. 솔직히 콤플렉스도 있었습니다. 미국에 유학 간 한국 여자의사이니까. 반면, 저는 끌려 다니고 얻어터지고 하면서 ‘동가숙 서가숙’ 하는 청년 운동가 삶을 살았잖아요.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제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제 여자친구가 전화로 곧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해요. 저에게 전화를 한다는 건 아직 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서 당황했어요. 제가 ‘나도 미국으로 가게 됐다’고 하자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어요. 며칠 후 제 여자친구가 한국에 날아왔고 저는 정신없이 교회에 가서 결혼하고 그리고 같이 출국했죠."

정치인 김경재와 의사 채수정과의 ‘러브스토리’는 드라마 감이다. 둘은 미국으로 유학 가서 결혼하기로 했지만, 여권이 안 나와 채수정만 도미(渡美)했다. 1968년 떠난 채수정은 무려 4년간을 미국에서 혼자 의사연수를 하며 김경재를 기다렸다. 요즘 흔치않은 순애보다.

-미국에서 김형욱을 만났죠.

"1976년 김형욱이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하면서 '주한미군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는 공산좌익이라서 미군을 빼려고 한다.'는 식으로 말해 화제가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순천 여사의 아들인 변영호 씨가 ‘김형욱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해요. 그래서 만났죠. 김형욱은 자신이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는데 원고를 써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래서 '내가 써주는 건 좋은데 그 대신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다 얘기해 달라'고 했지요. 김대중 사건, 동백림사건, 정인숙 사건,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얘기를 들었어요."

"김형욱 살해, 차지철이 주도했다고 보는데…"

-김형욱 회고록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1977년 여름쯤이었을 겁니다. 김형욱이 책을 쓰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왜 나한테 부탁하느냐’고 했더니, ‘당신은 김대중 사람이니까, 박정희 압력에 안 넘어갈 것 아니냐’고 해요.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그 책을 쓰는데 27개월 걸렸습니다. 그 것 때문에 김형욱도 무지하게 고난을 당했고 저도 적어도 두 번은 확실히 죽을 뻔 했습니다."

1963년 3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했던 김형욱은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형욱은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 참석해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과 독재정치를 비판했다. 아마도 김형욱이 회고록을 만들려고 했던 것도 박정희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듯싶다. 김 전 의원은 27개월 간 김형욱을 인터뷰해 방대한 분량의 ‘김형욱 회고록’을 썼다.

3권으로 발행된 ‘김형욱 회고록’은 1982년 국내에 처음 발행됐다. 저자는 김 전 의원의 필명인 ‘박사월’이었다. 이 책은 60만 권 이상 팔렸다. 해적판만 12종이었다. 그것들을 합하면 300만부를 넘을 거라고 출판계는 본다. 90년대 10대명작 중 제4위로 뽑히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위협을 무릅쓰고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로 간 게 쉽게 납득이 안 갑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 때 프랑스로 가기 전에 한국 정부와 '딜'이 끝난 것으로 압니다. 저는 (김형욱 제거를 지시한 사람이) 김재규가 아니라 차지철이라고 봅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형욱 건으로 신용이 엉망진창으로 떨어졌습니다. 김형욱은 협박을 많이 받아서 제게도 협박 섞인 애원으로 각서를 써달라고 했습니다. 자기 동의 없이는 책을 안낸다는 각서인데 그게 10·26이 후 김재규 책상에서 발견됐습니다. 저는 실제로 3년 동안 책을 발간하지 않았습니다.”

 

1979년 9월 30일 김형욱은 파리에서 실종됐다. 박정희는 약 한달 후 김재규에 의해 살해됐다.

-김형욱을 누가 죽였을까요. 

“차지철이 주도했다고는 보는데…. 그런데 정황상으로 김형욱의 죽음을 대통령이 몰랐다고 보기도 사실 어렵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지시라고 딱히 말 할 수도 없습니다. 하여튼 그 책이 2백자 원고지 7천매 분량이고 7백 명 이상의 사람이 나오는데 ‘내용이 잘못됐다’라고 말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습니다."

-DJ와의 깊은 인연도 미국에서 맺게 됐죠.

"그 전부터였죠. DJ가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DJ가 2천불 정도 받으면서 뉴욕에서 연설도 하고 했는데, 한 번은 어떤 장로가 초청해서 DJ가 값이 싼 야간 셔틀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여섯 커플뿐이 안 온 겁니다. 커플당 200불 씩 내서 모아 줬는데 여섯 커플이니 1천200불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300불을 더 조달해서 1천500불을 만들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공항 대기실에서 4시간 정도 기다리면서 제가 '죄송하게 됐습니다'하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DJ가 '그 사람들 욕 하지 마. 그 사람들에게 내가 덜 필요한거야. 지금 나는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어. 이제는 올라가. 그런데 사람은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 위엄과 긍지를 잃지 말아야 해'라고 말했어요. 상당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김 전 의원은 자신이 DJ에게 사준 차가 김홍업에게 넘어 간 얘기도 들려줬다.

"처음에 DJ가 돈이 없었기 때문에 차도 제가 사줬습니다. 그 때는 폭탄 테러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캐딜락 못지않은 차를 사줬습니다. 제 돈으로 다 한 게 아니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 후배들을 모아서 2천500불인가 선금을 내고 나머지는 월부로 했어요. 그런데 할부가 끝나기 전에 DJ가 미국을 떠났어요. 당연히 우리는 그 차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DJ가 아들 김홍업에게 줬어요. 제 후배들은 화가 나서 할부금을 더 이상 안 냈고 제가 결국에는 다 냈습니다. 월부금 400~500달러에 총 이만 달러정도로 기억됩니다." 

-미국에 망명중인 DJ에게 박지원 민주당 전 원내대표를 소개해 줬죠.

“뉴욕 맨해튼의 제 사무실이 8층인데 바로 옆 건물 1층에 박지원 씨 사무실이 있었죠. 어느 날 박지원 씨를 커피숍으로 불러내 ‘당신 전경환(전두환 동생) 따라다니면서 전국구 하려고 하는데 소용없다. 전국구하려면 김대중에게 배팅해라’고 했죠. 내가 연결할 테니 만나서 자금 좀 주라고 했죠. DJ가 자금 때문에 무지하게 쪼들린다고. 그렇게 둘의 만남이 시작됐죠.”

"전두환 동생 따라다니던 박지원에게 DJ 소개"

-그런데 DJ정부에서 박 대표는 정권실세가 됐고, 김 전 의원은 출세를 못했습니다.

“저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 DJ에게 섭섭한 생각이 없습니다. 참모마다 쓰임 용도가 다른 게 아닙니까. 민주화운동 시대에는 제가 첫째 아니면 둘째 참모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때 저는 DJ 앞에서 제 의견을 숙인 적이 없습니다. 나름 당당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DJ가 최고 권력자가 된 뒤에는 사간원의 간원 보다는 승정원의 승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리고 참모는 권력자와의 거리에 따라 그 영향력에 차이가 확실히 납니다. 권력자와 가까이 있는 참모가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지요. 그때 나는 좀 잘 나가는 초선의원이었고 박지원은 김문수에게 떨어져 ‘부천오리알’이 돼있던 시점이었죠. 원외이니까 죽기 살기로 DJ에게 올인한거죠. 박지원의 출세를 역설적으로 김문수가 도운 거라 할까요. 하하하.”

-김 전 의원과 박지원의 관계를 MB 정부의 이재오와 임태희에 비유해도 될까요?

“그렇게 되나요.(모두 웃음)”

김 전 의원은 국민의 정부시절 문광부장관 자리가 하루아침에 뒤바뀐 얘기도 들려줬다.

"2001년 쯤인가 남궁진이 정무수석 할 때 저와 자주 만났습니다. 제가 음양으로 조언도 하고 했는데 하루는' DJ한테 요즘 자주 땍기는데(혼나는데)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그럼 사표를 한 번 내봐라. 그러면 DJ의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남중진이 사표를 냈는데 수리가 됐어요. 남궁진은 속이 시원하다고 했어요. 사실 그 때 남궁진이 건강이 말이 아니었어요 이빨이 다 상했을 정도예요. 그러는 중에 한번은 본회의 중에 갑자기 김홍일로부터 메모가 왔어요. '형님 축하합니다. 문광부 장관에 내정됐습니다'라고 적혀 있어요. 그래서 저는 파티를 두 번이나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궁진이 저를 보자고 하더니 '형님 절 보고 문광부 장관하라고 하는데 이거 어떻게 된 겁니끼?'라고 해요. 나중에 생각하니 제가 가까운 사람들 하고 밥을 먹을 때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한 세무사찰이 있었는데, '신문사를 세무사찰로 압박하는 것은 하지책이다.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 세무사찰은 김대중답지 못하다'고 했거든요. 갑작스럽게 바뀐 중요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일단 정해졌다고 나에게 통보까지 왔다는 것은 DJ가 나에게 할 만큼 했다는 징표로 봅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선에서 승리한 후에 세검정에 있는 호텔에서 세미나를 자주 했는데, 노 전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 걸 보니까 자꾸 좌파적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 분위기에다 호남 배제 분위기가 역력히 드러났습니다. 민주당에서 호남의 색채를 배제해야 전국정당으로 갈 수 있다는 건데 저는 호남에 영남을 '플러스'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일요일 제가 여의도 공원을 돌다가 운동복 차림으로 회의에 참석해 '아무리 봐도 신당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도 많고 해서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다. 오늘로서 이 모임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04년 탄핵정국, 노무현 쪽이 꾸며 놓은 블랙홀에 말려들어간 것"

-노 전 대통령 탄핵 상황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시죠.

"그 쪽에서 꾸며 놓은 블랙홀에 말려들어 갔다고 봅니다. 그 때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김근태였는데 제가 접촉해서 '노통(노무현 대통령)이 한 마디만 사과 비슷하게 해라. 그러면 탄핵 없던 일이 된다'고 전했어요. 그런데 그 쪽에서 염탐을 하러 왔는지 임채정과 이해찬이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실에서 밤새도록 바둑을 두었어요. 그랬던 사람들이 당시 본회의장에서 쇼를 하는 걸 보니까…. 임종석은 울고 정동영은 구두 던지고 임채정은 안경이 벗겨져 끌려 넘어지고…,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국민은 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오늘 한국의 슬픈 정치현실입니다. 그리고 국회에서 탄핵이 됐는데 무슨 헌법재판소로 갑니까. 미국은 그런 게 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실상 유사 이래 최초로 탄핵 당한 대통령입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요.

"노무현 자체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영웅심리가 강하고 했는데 본심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수천 물장사 할 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그를 악용한 것으로 봅니다. 그 주변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노 전 대통령 자체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청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16년 동안이나 되는 긴 시간입니다. 그 동안 나름 적지 않은 서적에 접근하면서 사상과 국가경영에 대한 깊은 생각과 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북이 평화롭게 통일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제가 60대 후반인데 사람들이 아직 50대 청년 같다고 합니다. 확실히 마음과 사고방식만은 50대에 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애에서 16년의 해외생활은 빼야 하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조와 원칙을 지키느라 그런 것(출세)을 놓쳤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요즘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앞으로 이 전환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시대의 시대정신을 이끌 지도자를 발견하면 그를 ‘백마 탄 왕자’처럼 모시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견마지로를 다하려 합니다."

담당업무 : 정경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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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2012-01-27 01:24:16
웃기지마시오 선거 해봐야 알겁니다
언론이 너무 많은 왜곡 ,,,지금 언론이 하는 짓들이 사전 선거지 ,,,
명박이가 얼마 안 있으면 가만 안있지 ..
언론 함부러 짓거리다 멀지않아 아야 소리날때는 살려주세요 ...소리지르지말랑깽.
선가 직전 너희들 모두 다 들어 가야지...각오해

홍길동 2012-01-27 01:18:27
놀고 있네 지 코도 못닥는놈이 무슨말...

복동이 2011-12-03 20:42:25
유능한 인재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놀아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만 버린다면 아직 한번 더 기회가 있다고 본다. 정치란 거짓 선동이 본질이지만 이 시대 성공적인 정치인이 되려면 남에 대한 배려를 본질로 삼는 견마가 되어야 한다. 글도 잘 쓰고, 붓글씨도 볼만하고, 말도 잘하고, 하지만 만물이 자기 손에서 논다는 이 생각 버려야 훗날 기회가 올 것이다. 김 전의원님, 패자부활전에서 승리를...

산신령 2011-11-29 22:51:32
바쁘게 활동하다보니 (오라는곳은 없어도 갈곳은 많죠)이제 막 집에 들어와서는 손발씻고 컴퓨터를 켜고 이것저것 시사를 보다가 이 기사를 읽었죠 능신능굴 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참 묘한 용어요 글구 어쩌면 그렇게도 기억력하며 미사려구가 아닌 실제의 상상하신 문장
아 그래서 대통령을 두분이나 당선시킨 홍보위원장님을 역임 하셧구료 이제 한번만 더 맡으셔서 쇄신정부 여기 아래 글에 비방에다 욕설 한 녀석들 모두벌

정치도사 2011-11-29 20:46:13
음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밝힐 줄 아는 사람이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