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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산되짚기(19)>김기수 김영삼 전 대통령 비서실장
˝YS, 남북정상회담 앞두고 죽음도 겁 안내˝
˝김일성과 끝장 보겠다˝
2012년 07월 30일 (월) 윤종희 기자 yjh_1120@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산 되짚기' 19번째 주인공은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가장 가깝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인물이다. 바로 김기수 비서실장이다. 그는 1984년 YS가 민추협 공동위원장을 할 때부터 비서를 지냈고 1989년 YS가 전국구 국회의원을 할 때 보좌관이기도 했다. 민추협 조직운영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런 김 실장은 지금도 YS를 지근에서 보좌하고 있다. 그는 이날 YS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일화를 들려줬다. 인터뷰는 2012년 7월 25일 김영삼 전 대통령 상도동 자택에서 진행됐다.

   
▲ 김기수 김영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YS는 주변의 반대에도 금융실명제 등 개혁을 했다"면서 "대통령 중심제에선 대통령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 실장은 18년 전 이맘 때를 회상했다. 1994년 7월 8일 북한의 김일성이 YS와의 남북 정상을 앞두고 돌연히 세상을 떠난 것과 관련해서다.

"청와대 쪽에서 미리 북한 측에 '우리는 수행실장이라는 특수한 인물이 있다'고 전달했습니다. 판문점에서 YS가 북한 차를 탈 때 저와 박상범이 입석하겠다는 것이죠. 혹시나 있을 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박상범이 발목에 '다이나마이트'를 달고 타기로 했습니다. 차를 함께 타고 가는 그 쪽 사람이 갑자기 문을 잠그고 협박이라도 할 경우 박상범이 발을 차서 자폭하고 동시에 저는 YS를 껴안아 보호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청와대 수행실장이던 김 실장으로부터 이 같은 계획을 들은 YS의 반응은 태연했다.

"청와대 계단을 내려오면서 '박상범이 이런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더니 YS가 '무신 걱정을 그렇게 하노. 그런거 걱정할 거 없다. 전세계 기자들이 경호원 아니가. 전세계 기자들이 보는 데서 테러 당해 죽으면 그것도 좋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만큼 자신감이 있었던 겁니다. YS는 '할 얘기 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회담이 2박으로 예정돼 있었는데 3박이라도 해서 끝장을 보겠다고 했습니다."

김 실장은 그러면서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폭격하려고 한 것을 YS가 막은 사실을 술회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어머니가 간첩에 의해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그때 YS 어머니가 고등학생인 홍인길이 등에 업혀 배를 타고 통영으로 가다가 과다 출혈 쇼크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YS는 '우리가 6·25를 치르면서 가족 중에 피해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고통이 컸고 나라가 해체됐다가 재건된 것과 마찬가지인데 또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클린턴의 폭격을 막은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한테 '내가 총사령관인데 70만 대군을 절대 못 움직인다. 너희가 내 조국에서 전쟁을 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YS의 민족의식이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피를 흘려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누가 YS의 머리가 나쁘다고 하나요. YS는 정치 9단입니다. '우리가 다시는 민족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YS는 이런 얘기를 그냥 걸으면서 평범하게 합니다. YS를 만난 건 내 일생의 최고 감동이고 보람입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핵개발 문제와 관련해 평안북도 영변을 비밀리에 폭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YS의 반대에 막혔다. 때마침 김일성도 제네바 합의를 받아들여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YS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79년도 5·30 신민당 전당대회 당시 YS의 '선명 야당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몰려가서 '김영삼, 김영삼'을 외치니까 이를 본 이기택이 YS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YS가 총재가 됐고 얼마 후 최기선을 따라 민족문제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종의 (YS)계보 사무실이었습니다."

김 실장은 원래 정치적 기질이 있었던 듯 싶다. 그는 한양대에 다닐 때 총학생회장으로 활동 했다. 그 때 경희대에서는 강삼재가 총학생회장을 했다.

상도동계 유인물 배포 전담…경찰서 수도 없이 들락거려

-YS가 단식 투쟁을 벌일 당시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YS가 단식을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뒤에 강제로 앰블런스에 실려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1983년 5월 25일). 그 때 홍인길 선배의 '칼춤 사건'이 난 것입니다. 제게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서울대로 모셨다고 해요. 그 때 저는  미아리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상도동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그 때부터 로이터, AP, UPI, 요미우리, 마이니찌, 아사히 등 외신들에게 이 사실을 퍼뜨렸습니다."
 
당시 언론 상황은 무척 심각했다.

"국내 언론에서는 YS 단식에 대해 전혀 다루지 못했습니다. 동아일보가 '현안문제'라고 조그맣게 다뤘는데 사람들이 그게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나요. 나중에 '모 인사의 식사문제'라는 식으로 나왔는데, 무슨 소설입니까. 참 한심한 시절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가 자가발전을 해야 했습니다. 외신 원본에 까맣게 글을 써서 배포했습니다. 당시 복사기는 30장 정도를 복사하면 열을 받아서 멈추곤 했습니다. 복사하는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김 실장은 이렇게 힘들게 만든 외신 전단을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살포했다.

"노량진에서 지하철이 창문을 열어놓고 출발할 때 그 안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그 때는 전철에 에어컨이 없어서 창문을 열어 놓았어요. 그리고 잠실에 있는 저층 아파트에는 (각 동마다) 수위가 없었어요. 그런 아파트 우편함에 밤새도록 후배들과 외신 기사를 넣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집에 가면 기진맥진했습니다."

-당시 YS의 입원실은 누가 지켰나요.

"홍인길 선배와 제가 지켰습니다. 정보원들이 가운을 입고 다니는데 독살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홍 선배도 제가 교대를 해줘야 나가서 쉴 수 있었어요. 홍 선배가 입원실을 지킬 때 저는 외신을 받아다가 친구 회사에 가서 사람들 모르게 복사 작업을 했습니다."

YS, 떠나려는 김기수에게 "가지마라. 좋은 날이 올 것이다"

YS는 자신의 단식 기간에 이렇게 열심히 일한 김 실장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가 YS 단식이 끝나고 나서 친구 회사의 이사직 자리로 가게 됐어요. 그래서 YS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니까 '내가 월급은 못 줘도 차비는 줄 테니 같이 하자'고 해요. 같이 걸으면서 그렇게 얘기를 해요. 또 '가지 마라. 앞으로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도 했어요. 하늘 같은 분이 같이 일하자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YS의 수행비서 역할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처음에 YS의 수행비서 역할을 한 건 홍인길 선배입니다. 당시에는 각목 전당대회가 있었을 정도로 정치가 험악했기 때문에 '보디가드'가 있어야 했습니다. 홍 선배가 키가 크고 힘도 좋았으니 그 역할을 맡았죠. 그런데, 전두환 정권 시절 칼라TV가 나오면서 방송을 통해 자주 비춰지게 됐는데 홍 선배가 우산을 YS 옆에서 들어주면 마치 어른 옆에 중학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맡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고향이 이북이고 하니 경상도 사람들이 맨날 한다는 비난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주제를 김 실장의 민산 활동으로 돌렸다.

-민산 활동은 언제부터 했나요.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처음에 김동영 장관 집에서 몇 명이 봉고차로 출발했습니다. 저는 YS를 경호원 격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백두산 조, 지리산 조, 태백산 조, 금강산 조로 나뉘었는데,  YS와 홍인길, 제가 백두산 조였고 고향이 거창인 김동영 전 장관이 지리산 조를, 고향이 강릉인 김명륜 전 의원이 금강산 조를, 최형우 전 의원은 태백산 조를 맡았습니다.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산 이름을 따서 조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민산 출범은 1981년 6월 9일로 알려져 있다. 김 실장은 민산 초창기 때부터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5·18 3주년을 기념해서 YS가 성명을 발표했을 당시 이를 관악산 행사에서 직접 낭독하기도 했다. 당시 성명은 앞뒤로 가득찬 종이 16장이 될 정도로 분량이 많았다. 그는 민산 깃발이 만들어졌을 때 이를 직접 들고 산행 맨 앞에 서기도 했다. 이를 놓고 '기수가 기수가 됐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왔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민산 깃발을 드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시대가 그 만큼 험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실장은 다른 회원들보다 10m 정도 앞서 척후병처럼 전진했다. 그는 민산에서 부총무를 맡기도 했다. 부총무의 역할은 유인물을 나눠주고 회비 등을 걷는 것이었다.

-민산 활동에 필요한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산행을 하다가 잠시 쉴 때 머리에서 모자를 벗습니다. 그 모자를 돌립니다. 그러면 국회의원 한 사람들은 1만원~5만원 정도 넣고 어떤 사람들은 몇 천원을 넣고 했습니다. 동전은 안 넣습니다. 무거워지니까요. 그러니 최소 천원 이상은 낸 것이죠. 자발적으로 모아서 했습니다."

YS, 교회 장로였지만, 산 속 사찰에 언제나 예의 지켜

민산 회원들의 산행에는 나름 질서가 있었다.

"산에 가면 식순이 있었습니다. 기도, 애국가, 민주산악가 순이었습니다. 민주산악가는 이우태 산행대장이 작사했고 그 딸이 작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에서 저희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한번은 이민우 회장이 산에 와서 명언을 남겼습니다. '부모·형제는 한날 한시에 죽을 수 없지만 동지는 한날 한시에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YS의 명언인 '정상에 오르면 내려올 준비를 해야 한다.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한다'도 민산 산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산 정상에 올랐다가 식사를 하거나 쉬기 위해 모이는 곳은 산 중턱의 물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는 항상 사찰이 있습니다. 그러면 폐를 끼치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했습니다.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는 게 그렇잖아요. 그리고 YS가 장로인데도 꼭 저를 시켜서 시주를 하게 했습니다. 예의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스님들이 먼 발치에서 저희들을 쳐다보고는 했습니다."

김 실장은 산행에서 YS와 얽힌 일화도 소개했다.

"산에 오를 때면 제가 음식을 베낭에 가득 넣어서 올라갔습니다. 그러다 식사 때가 되면 YS와 손명순 여사에게 먼저 차려 드렸어요. 그리고 홍인길 선배와 제가 남은 것을 먹고 있는데 YS가 가만히 쳐다보더니 '인길이 너 참 많이 먹는다'하고 농담을 해요. 그러면 손 여사가 YS에게 '당신은 다 먹고 나서 그런 말을 하느냐'며 말렸습니다. 그런데, YS는 어릴 때 돼지고기를 먹고 심하게 체한 적이 있어서 그 이후로 돼지고기를 못 먹었어요. 하지만 저희들은 산에 돼지고기를 가지고 가서 구워 먹고는 했습니다. 어느날 YS가 저희들이 돼지고기 먹고 있는데 맛있어 보였는지 슬쩍 와서는 한 점을 먹었어요. 그 때부터 돼지고기를 다시 먹게 됐어요. 몇 십년만에 돼지고기를 먹은 것입니다. 그 때 소주도 곁들여서 했습니다." 

정채권, 경찰 프락치 역할 의심

그는 민산 초대 산행대장인 정채권 목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비쳤다.

"정채권은 산을 올랐다가 내려와서는 다시 또 옆 봉우리로 올라가고는 했어요. 그러면 이미 산행을 해서 지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듭니까.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죠. 나중에 우리가 집권한 뒤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서 민산 현황을 파악하려고 한 것 같아요. 경찰 프락치 역할을 한 것이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YS가 집권 하자마자 민산을 해체한 것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 때 박철언의 월계수회 폐해가 심했습니다. 그리고, YS가 군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한 상황이었어요. 거기다가, 민산 회원이 200만이나 되니까 관리하는게 힘들었습니다. 말썽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요. 저는 잘했다고 봅니다."

김 실장은 이 대목에서 "YS가 지자체를 하려고 했을 때도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 받기 싫은 것이다. 금융실명제를 할 때도 경제수석이 반대했다.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할 때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YS는 자신의 의지대로 했다. 대통령 중심제에선 대통령의 의지가 그 만큼 중요한 것이다"고 말했다.

주제를 다시 김 실장의 유인물 배포 활약으로 돌렸다.

-유인물을 돌리다가 적발 되면 어떻게 됐나요.

"형사들이 저를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잡히면 전단을 한 장만 가지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천장을 뿌렸다고 하면 형사들이 그 걸 회수하느라고 죽어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회수 못하면 보안사 사람들이 아버지 뻘 되는 형사들에게 함부로 닦달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단을 호텔에 자주 뿌렸습니다. 그 때 호텔 직원들 중에는 전문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독재정권에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제가 호텔에 나타났다고 하면 경찰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복사하다가도 많이 잡혔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복사기가 지금과 달라 1장씩 뽑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지요. 저는 잡히면 '이건 사모님이 주신 것'이라고 해요. 주범이 사모님이 되고 저는 종범이 되는데 주범을 못 잡으면 종범을 처벌할 수 없었어요. 그런식으로 빠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김 실장은 80년대 중반 운동권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성균관 대학 뒷골목에서 대학생들과 자주 만나 얘기를 많이 나눴다고 한다. 거기서 현 정치 상황에 대해 학생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는 자신을 월부책장사라고 소개했다. 당시에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김영삼-김대중'으로 나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자신이 YS계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인근의 대학로에 있는 복덕방에 가서 전단지를 복사하기도 했다. 중간에 경찰에게 발각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복사되어 나온 전단지를 자신의 후배에게 미리 넘겨줬고, 그러면 후배는 이것을 가지고 멀찌감치 떨어져 상황을 살폈다. 만약, 복덕방에 경찰이 들이닥치면 이 후배는 그냥 자신이 갖고 있는 전단지만 가지고 자리를 떴다.

김 실장은 "일제 때 박헌영이 제일 감옥에 많이 드나들었다. 그런데, 이원종 전 수석에 따르면 박헌영 이후에 가장 많이 경찰서를 드나든 건 김기수라고 한다. 유인물 배포 때문에 수도 없이 경찰에 잡혀갔다"고 말했다.

-YS가 대통령이 된 직후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청와대 수행실장을 했습니다. 그때 '홍인길 최기선 김기수' 3인조가 야당과 접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김근태 등 동교동계와 말트고 지내는 게 저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김동영이나 한화갑은 윗 수준에서 서로 접촉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제가 김근태와 친했습니다. 김근태 마지막을 제가 봤습니다. 지난해 말 YS가 감기 증세로 잠시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때 인재근 여사가 왔다갔다 하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제가 김근태 입원실에 들어갔더니 못알아보더라고요. 제가 '김 의장, 상도동 기수다'라고 말했는데 못알아보더라구요. 김근태는 동교동계·상도동계를 그냥 따라다닌 사람이 아닙니다. 나름 주관이 있는 인물이었어요. 원래 김근태가 일신제강에 다니다가 미국 뉴욕지사로 나가려고 했는데 형님 문제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못 나갔어요. 연좌제는 YS 집권기인 95년에 해제했습니다."

김 실장은 이날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에 대해 "동교동계 '오리지날'을 모두 제거했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을 따라 다닌 사람이다"고 지적했다.

그는 YS가 집권 중 필리핀을 방문해 '나이키' 상표가 붙은 운동화를 신고 조깅을 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었던 것에 대해 "그 신발은 부산에서 보낸 것이었다. 국산이었다. YS가 입고 신은 신발과 옷은 모두 국산이었다"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YS계의 핵심 인물인 김동영과 김덕룡,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하게 발음되어 자꾸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에이'와 'DR'로 불렀다는 얘기도 해줬다. '도에이'는 '동영'의 일본식 발음이고 'DR'은 '덕룡'의 영문 이니셜이다.

 

윤종희 기자 yjh_1120@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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