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예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 곧 속죄”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함석헌과 한국교회> “예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 곧 속죄”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8.08 14: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죄는 참말로는 없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함석헌이 앞에서 말한 대학생하기수양회에서 한 마지막 날 강의 내용은 속죄론이었다. 이 강의내용은 <말씀>창간호(14-246)에 실렸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죄를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종래의 모든 종교가 죄와 싸운 방법은 한마디로 하면 권선징악인데 이것으로는 죄를 없앨 수 없다고 말한다. 먼저 앞의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옛날 사람들이 죄란 것을 가슴에 꼭 안고, 그리고 그것을 피해보려고 눈을 감아도 보고, 달음질도 해보고, 애쓰면서 하지 못하던 것을, 예수는 그 죄의 실재성을 빼앗음으로써 스스로 없어지게 했습니다.

죄의 실재성을 무엇으로 빼앗았나.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으로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아버지로 아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안 것입니다.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한테 인격적인 태도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음으로써 그를 아버지로 알아보았고, 아버지를 앎으로써 그의 가슴에 사뭇 들어갔습니다. 거기 죄가 있을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품속에서 왔노라 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죄는 믿지 않는 자에게만 있습니다. 죄가 따로 있는 것 아니라, 믿지 않는 그 심정, 그것이 곧 죄입니다. 고로 믿는 자에게는 죄가 실재하지 않습니다. …… 예수께서 실재하는 죄를 없앤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이면 없앨 수가 없습니다. 본래 없는 죄기 때문에, 불신 속에만 있는, 망상 속에만 있는 죄기 때문에,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음으로써 그를 아버지로 알아보았고, 아버지를 앎으로써 그의 가슴에 사뭇 들어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죄가 설 곳이 없기 때문에 그 경지가 곧 구원이다.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에는 재판도 없고 감옥도 없다. 잘못이 있어도 사랑으로 해결하지 재판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아들이 잘못해도 사랑으로 꾸짖지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에 감복하여 아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속죄는 하나님 사랑에 감격하여 예수의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죄에서 건진다 함은 함석헌의 말대로 과거에 지은 죄과(罪果)로 인해서 받을 형벌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죄과를 생산하는 산 죄 곧 죄의 성격으로부터의 해방도 의미해야 한다. 지은 죄뿐만 아니라 지을 죄도 없애야 참된 구원이다. 속죄는 예수가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됐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인격이 그를 닮아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수가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됐다 하는가?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가 “유대인에게 속죄의 깊은 뜻을 체험시키는 데 편리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익숙한 ‘그 낡은 행위’를 비유로 삼아 새 진리를 체험시키려 한 것이다. 예수가 사랑의 종교, 사죄의 종교를 주장하다 죽은 것이 구약의 제사제도에 비유하면 제물이 된 셈이란 말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때부터 20여년 후인 1976년 4월에는 <씨알의 소리>에 올린 ‘누가 이 참의 바통을 받을 것인가’(12-204)라는 글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의 의미를, 구약의 제사제도를 비유로 드는 방법으로가 아니고, 다음과 같이 사실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그러니까 참을 위하면 위할수록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악한 놈인 것처럼, 나라를 모르는 놈인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받아야겠으니 어떡하나? 그렇지만 오해를 받으면서도 참을 증거해야 한다.

그게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묻는 말에 예수가) 잠잠하고 말 안했다는 것은 그래 그런 거다. 말해서, 변론해서, 그 사람에게 (진리가) 들어가나? 예수가 그때 생각하신 것, 당했던 문제는 그것이었다. 빌라도를 미워했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인간성을 눈 뜨게 할 수 있겠나, 말은 성경에 그렇게 나온 것이 없지만 문제가 거기 있다 그 말이야.

그 길이 다른 길이 아니고 십자가의 길이지. …… 그 사람의 양심을 때려야 되겠는데, 양심 때리려면 어떡하지. 말로 될 수 있으면 하지만, 말로 하다 안 되면 양심대로 내가 지키다가 죽어서, 죽은 모양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밖에 길이 없다.

그렇게 해도 안 깨닫는 놈이 있지만 그래도 인간인 다음에 대개는 된다. 예수가 죽음으로 인해서 도리어 이겼다는 것, 거기 있는 거다. 지금도 수천 년이 됐는데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자꾸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약하다면 아주 한없이 약했는데 그래도 역시 그게 이긴다.

지금도 예수님께 가까이 지내면 지내는 만큼,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역시 사람의 맘을 열고 사로잡는 데는, 건져주는 데는, 그게 제일 힘이 있다. 내가 희생이 되는 지경에 가면서라도 미운 생각이 없어. 거기 잘못을, 잘못이라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고해줘서, 그렇게 하고 죽으면 애매하게 죽었을수록, 당장은 죽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 때 가서라도 양심은 깬다. 당장 하던 그 사람의 마음은 안 될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 주위에 있는 이 나라의 양심은 깨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대속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예수는 우리에게 구주라 할 수는 없고 다만 인류의 훌륭한 스승일 뿐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순교를 했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의 스승일 뿐만 아니고 구주다.

함석헌의 말대로 “서양말에 순교자라는 말은 증거라는 말에서 나왔다. 그럼 참을 증거하려면 순교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예수는 순교를 했기 때문에 참을 증거했고, 참을 증거했기 때문에 세상이 그에게 복종하여 정말 임금이 됐다.” 그의 순교가 우리의 인격적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구주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한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여러분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습니까?”(9:13-14)

구약의 제사제도도 이제는 대속의 관점에서만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 속죄제물은 우리의 죄 때문에 진노하신 하나님을 달래는 수단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다. 제물(짐승)이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라면 짐승을 바치는 것은 곧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아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야말로 곧 구원의 경지다.

제사를 통해 이루어진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제물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여 자신과 교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6·25동란 때의 일이다. 우리 동네에 들어온 인민군이 온 동네의 개는 모두 잡아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나갔던 우리 집 개가 피투성이가 되어 절뚝거리면서 들어왔다. 인민군에게 잡혀 먹히기 직전에 도망쳐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 그 개를 인민군의 몽둥이로부터 보호할 수가 없었다.

인민군의 횡포를 저지할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의 힘없음 때문에 우리 개가 무지막지한 인민군의 몽둥이에 맞아죽는구나 싶었다. 그때는 교회에 나가지 않을 때인데도 나는 “하나님, 제 잘못입니다. 우리 개를 살려주십시오.”라고 연상 기도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개가 인민군의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는 것이 나의 잘못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 개가 당하는 고통을 나의 잘못 때문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죄를 상기시키는 데 피 흘림의 위력은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들어내는 사건이다. 우리 개가 피를 흘리는 것이 남의 잘못 때문인데도 나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될 정도라면, 하물며 나의 잘못 때문에 우리 개가 피를 흘릴 경우에는 나의 죄책감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기로 얼마나 굳은 결심을 하겠는가?

구약의 제사제도를 머리로만 이해하려 하지 말고 실제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짐승의 흐르는 피와 불타는 살을 보는 사람 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새 사람이 될 각오를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제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짐승의 피도 그러한 힘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인 예수의 피야 말해 무엇 하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