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파와 안철수 현상②>누가 ‘안철수’를 불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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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신파와 안철수 현상②>누가 ‘안철수’를 불렀는가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2.11.23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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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의 ‘폐쇄성’과 시대정신 못 읽은 쇄신파…추락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유진산, YS DJ 쇄신요구 받아들여 ‘40대 기수론’ 탄생

#1.“박정희의 3선개헌 강행을 통한 위장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체감한 우리 야당은 빈사상태에서 헤매는 민주주의를 기사회생시키는데 새로운 결의와 각오로 앞장서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섰습니다. 나는 짙은 의무감과 굳은 결단, 그리고 벅찬 희생을 각오하면서 71년 대통령선거에 신민당이 내세울 대통령 후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2.“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은 젊은 세대의 진출을 완강히 거부하는 당내 일부  지도층의 자세에 기인한다. 나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 같이 최후 승리의 날까지 싸워 나갈 것이다. 싸우다 죽더라도 사술만 논하는 마키아벨리는 되지 않겠다.”

1970년 정치쇄신을 이끌었던 김영삼(전자) 김대중(후자)의 대통령 출마 선언문이다.

당시 40대였던 두 사람의 정치쇄신은 ‘박정희’와 당내 중진의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40대와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박정희는 이에 대해 “애송이 같은 X"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유진산 이재형 정일형 등도 강하게 반발했다. 유진산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평가절하했고, 이재형은 “시기적으로 보아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정일형도 여기에 가세해 “당풍쇄신이라는 커다란 과업을 앞두고 있는 이때 당 진로의 방향설정에 혼란을 가져올까 염려된다”고 반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군정을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자’는 쇄신의 목소리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이내 당내 중진들은 ‘40대 기수론’에 손을 들어줬다.

유진산이 대선경선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이민우 유치송 등이 불출마를 번복하라며 유진산을 압박했다.

유진산은 이들에게 “ 신민당이 사당(私黨)이냐. 국민 목소리를 들어봐라”며 불출마를 고집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다.

박찬종 등 단일화 요구에 YS, ‘DJ요구’ 수용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자, 김영삼-김대중의 야권단일화을 촉구하며 쇄신파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당시 박찬종 조순형 등이 주도했는데, 이를 통해 이들은 거물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쇄신파의 요구가 거세지자, 1987년 10월 22일 후보단일화를 위한 경선을 담판짓기 위해 김대중과 만난 김영삼은 ‘김대중의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해 버렸다.

당시 야권이던 통일민주당은 56곳의 창당지구당과 36곳의 미창당지구당으로 나눠져 있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후보 경선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36곳의 미창당지구당 위원장을 선임해야 했다. 김영삼 측은 김동영이, 김대중 측은 이용희가 협상자로 나섰다.

김동영은  50 대 50으로 하자며 18곳씩 나눠서 임명하자고 했고, 이용희는 창당지구당의 지구당위원장 수가 김영삼 측이 많다며 23곳을 달라고 했다.

이를 놓고 갈등이 생겨나자, 후보단일화는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쇄신파의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김영삼이 김대중 측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일이 발생한 것.

물론 야권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쇄신파의 요구는 정치쇄신을 주도해 나갔다.

민주 평민 등 쇄신파 야통 요구에 김영삼, ‘소선거구제’ 수용

노태우 정권이 탄생하자, 민주당과 평민당의 쇄신파들은 야권 통합 운동을 벌였다. 민주당에선 노무현 김정길 장석화 등이 나섰고, 평민당에선 박영숙 이상수 문동환 등이 나섰다.

야권통합을 위한 제1과제로 김대중이 이끌고 있던 평민당 측 쇄신파들은 ‘소선거구제’를 요구했다.
당시는 한 지역구에서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호남과 수도권 일부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는 평민당은 소선거구제를 고집했다. 전국에서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던 민정당이나 민주당은 당연히 중선거구제를 고집했다.

쇄신파들의 요구에 김영삼은 ‘소선거구제’를 수용해 버렸다. 쇄신파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당내 중진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에선 최형우가, 평민당에선 이중재가 나서서 야권통합 운동을 뒷받침해줬다.

1990년 3당합당 이후 민자당 내 민주계를 중심으로 이뤄진 쇄신파들은 ‘군정종식’을 기치로 내세웠다.
내각제 각서 파동이 언론에 유출되자, 서청원 최기선 김운환 강삼재 등은 탈당이라는 배수진을 치며 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들의 저항에 부딪힌 노태우는 ‘항복’을 선언하며, 내각제는 없었던 일이 됐다. 이때도 이들 쇄신파를 떠받쳤던 인물은 최형우다. 당내 중진이자 민주계의 좌장이었던 최형우는 이들과 함께 탈당이라는 배수진을 쳤다.

▲ 김영삼과 김대중은 1970년 정치쇄신을 이끌어 ‘40대 기수론’을 만들어 냈다. 사진은 당시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DJ에게 악수를 건네는 YS.ⓒ사진제공=김영삼 자서전
19대 국회서 쇄신파 ‘전멸’

김대중 정부 이후에도 한나라당과 민주당 쇄신파들은 크고 작은 정치쇄신을 요구했다.
한나라당의 경우, 16대 국회에서 ‘미래모임’, 17대 국회는 ‘수요모임’, 18대 국회에서는 ‘민본21’이라는 쇄신파들이 있었지만, 당 지도부에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는 실패했다.

미래모임을 주도했던 김부겸 김영춘 전 의원 등은 한나라당을 떠나 민주당에 둥지를 틀었다. ‘정치개혁’이란 구호가 얼마나 척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렇다면 쇄신파들의 요구가 정치권 내부에 스며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주류 정치인들의 폐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쇄신파들의 요구가 자신을 향한 칼날이라고 생각한 당 내 주류는 이들의 목소리에 절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다.

대표적인 게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원희룡 전 의원의 경우다. 원 전 의원은 2010년 서울시장 후보경선과 2011년 한나라당 대표경선 전당대회에 출마했지만 낙마했다. 그의 낙마는 개혁의 몰락을 의미했고, 19대 국회에서는 쇄신파 자체가 없어졌을 정도다.

신율 교수는 이에 대해“쇄신파들의 목소리는 항상 그렇게 묻혀왔다. 지금은 대선정국이라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아마도 지금 누군가가 활발히 움직인다면  당을 해치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쇄신파들이 시대정신이나 국민여론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전원책 변호사는 “소장파나 쇄신파로 불리는 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은 지금 인기영합주의에 빠져있다. 쇄신해야 될 대상이 정작 그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쇄신파들 중에는 좌든 우든 이념을 가지고 정의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극히 일부다. 쇄신파들은 지금 개인적 탐욕으로 움직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들 쇄신파들을 받쳐줄 중진 정치인이 없는 것도 문제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김영삼 대통령 때는 최형우 전 의원이 나서서 쇄신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줬다. 지금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결국 쇄신파들을 통한 국민의 목소리가 정치권에 반영되지 않자, 2011년 10월‘안철수 현상’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게 일반론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그동안 쇄신파들의 크고 작은 요구들은 많이 반영돼 왔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 이후 여당이든 야당이든 주류 정치인들의 폐쇄성과 시대정신을 정확히 읽지 못한 쇄신파들의 부재로 인해 정치권 전반에 정치혐오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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