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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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 [특별기고]
  • 조찬옥 (사)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
  • 승인 2023.10.0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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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찬옥 (사)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

사회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에 주목한다.ⓒ픽사베이
사회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에 주목한다.ⓒ픽사베이

독일 사노당은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으로 1878년 철혈제상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규제법에 의하여 불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노당은 1889년에 파리에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통칭 제2 인터네셔날의 재창립을 주도하였고 8시간 노동을 주장하였다.

그밖에도 미국 총파업이 일어났던 5월 1일을 국제노동 시위일로 지정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서 국제적 지도력을 과시하였다. 독일 사민당은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1890년에 사회주의 규제법이 폐기됨으로써 합법적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의회선거에 참여하여 20%의 득표률로 35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독일 사노당이 의회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이때 마르크스는 이미 죽었지만 엥겔스는 살아있었다. 엥겔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재창당(실제 독일사노당의 이름만 바뀐 것이다)하면서 체택한 에르푸르트 강령(1891년)이 대부분 그들의 이론을 따라 작성되어 있음에 크게 고무되었고 런던에 있으면서도 이 당의 고문역을 맡기로 기껏이 동의하였다.

세계 최초 사회주의 혁명 레닌의 볼세비키는 1919년 제3인터네셔날(코민테론)을 출범시킨다. 하지만 같은 급진적 혁명을 추구했지만 레닌과 같은 전위대 주동의 혁명을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민주사회주의 세력들은 불참을 하였다. 1차 대전에 참여하면서 자국의 제국주의를 용인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 역시 불참하였다.

반면 반 제국주의와 반 자본주의를 지향한 식민지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많은 공산당은 볼세비키의 혁명 성공에 환호하며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였다. 그중에는 프랑스의 공산당도 있었다. 각 국가노동조합 혹은 사회주의 정당의 연합체 혹은 협의조직이였던 이전 제1, 2 인터네셔날과 달리 제3 인터네셔날은 위계질서를 갖춘 국제적 공산주의 정치조직이었다. 사회주의를 현실화한 소련 공산주의와 이에 동조한 공산당들이 이제는 국제사회주의 운동에서 지배적 흐름이 되었다.

혁명 성공 이후 코민테론의 맹주 볼세비키는 자신들의 혁명에 이어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뒤따를 것으로 기대했었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각지의 공산당은 볼세비키 당과 그들의 권력 장악 과정을 혁명에 대한 개념 혹은 사회주의 이행 모델로 삼았으며 각국 공산당의 정책들은 소련 공산당이 주도하는 코민테론의 지침에 따라 정해졌다.

1928년 코민테론은 기존의 국제노선 연대에서 벗어나 스탈린주의 노선으로 변경하먼서 소위 제3기(제1기는 볼세비키 혁명기 그리고 제2기는 자본주의 안정기)의 대두를 선언하였다. 이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 역사상 가장 분파적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사실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의 공산혁명은 원래 마르크스 엥겔스가 주장한 이론과는 다른 내용으로 혁명에 성공하였다.

노동자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 농민과 군인이 주축이 되어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던 것이다.

이들과는 달리 이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수정주의 논쟁은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시작되었다. 이 강령을 기초한 마르크스 엥겔스 두 사람은 초기 독일사민당에서 마르크스 교조주의와 수정주의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의 사상투쟁에서 맨 처음 시작되었다.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사회주의자 칼 카우츠키(Karl kautsky)이다. 칼 카우츠키는 체코계 오스트리아인이며 독일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한 철학자. 언론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다.

카우츠키는 다원주의자였다가 마르크스 이론가로 변신하여 다윈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리게된 인물이며 초기에는 교조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카우츠키는 189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죽은 후부터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가장 권위있는 마르크스 전파자 중 한사람이었으며 제2인터네셔날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 이론가로 사회주의 저널지인 새 시대의 창간자이기도 하였다.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권력을 쟁취했던 러시아 혁명지도자 레닌의 볼세비즘이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칼 카우츠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의 영향아래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하였고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의회주의로 대표되는 기회주의. 개량주의 영역에서 머물다가 21세기를 넘어서면서 우리 사회에서 잊혀져 갔던 인물이다.

그러나 칼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 정통파 이론을 대표하였고 초기 레닌의 마르크스주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당시 사회민주주의는 현재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와는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견지하는 대표적인 당파였다.

칼 카우츠기는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명실상부한 대표자였고 1875년 고타강령(독일 사회주의노동당을 1890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이라 개칭하면서 채택한 강령)으로 유명한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 후 1890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사회민주당이 1891년에 사회주의 이념을 더욱 발전시킨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에르푸르트 강령(독일 사회민주당이 1891년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종전의 고타강령을 대신하여 채택한 순수 마르크스주의적 강령)을 기초한 초안자이기도 하였다.
 

사회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에 주목한다.ⓒ픽사베이
사회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에 주목한다.ⓒ픽사베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의 정통파 마르크스 이론가로 활약한 칼 카우츠키는 사회민주당의 비정통파 이론가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과 이론투쟁을 전개하면서 베른슈타인의 비혁명적 사회주의화 노선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부분에서 이탈한 수정주의라고 비판을 하였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같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도 자기네들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세력을 비판하는데 수정주의랴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칼 카우츠키가 베른슈타인(독일 사회민주당의 비정통파)의 이론이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났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사회주의 세력 내부의 사상투쟁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초기 독일 사회주의자로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베른슈타인이 주창한 수정주의를 시초로 하는 비스마르크스사회주의를 뜻하고 있다. 그리고 이주장을 놓고 칼 카우츠키와 독일의 여성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논평을 벌이게 되면서였다.

베른슈타인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과 그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지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1차 대전 이후 공식적으로 수정주의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은 현재의 사회민주당과 달리 혁명적 맑시즘이 공식 이념이었다)모두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통 맑시스트가 예언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를 궁핍하게 만들지도. 재산 소유자의  숫자도 감소하게 하지 않으며 따라서 위기가 갈수록 심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적응력이 높아진다고 그는 보았다.

또한 베른슈타인은 민주주의의 절차안에서 사회주의의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을 중시하였고 정통 마르크스의 두 기둥인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비판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부의 집중과 사회적 궁핍화가 점점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점차 복잡해지고 적응력도 커지고 있다고 관찰하였다.

즉 그는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본주의가 붕괴되어 사회주의가 출현할 것을 기다리기 보다 현재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또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을 쇠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중간 계급과 농민들은 노동자들과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공통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전통적인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인 유물론 과 계급투쟁 그리고 자본주의 부정 등을 비판하며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당의 과제라는 저서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수정해야 된다고 보았다. 당시 사민당은 계급적 성격의 정당으로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는 있었으나 남 독일 농민들의 지지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베른슈타인은 농산층은 자본가 계급에 속하지 않음과 프티부르주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중간 위치에 속하는 소생산자)계층 자본주의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극복을 혁명이라는 폭력적 행동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행동을 통한 자생적인 운동으로 실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를 발표했을때 칼 카우츠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노자 룩셈부르크 등에게 십자포화 수준으로 공겍을 당했다. 나아가 멸칭적 표현으로서 수정주의자라고 하는 딱지를 붙이게 되었다.

베른슈타인을 수정주의 길로 안내한 곳은 결정적으로 런던이었다. 당시 사회주의자의 탄압법이 폐지되었고 당은 탄압법 시기를 거쳐오면서 실천에 있어서 의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으로 변모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이 시기에 영국에서 페이비언 주의자(점진적 사회주의 지향. 국가의 통제하에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봄)들과 교류를 하면서 한번은 런던에서 파업과 반대 연설을 하였는데 경찰이 베른슈타인을 제지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왕실의 경찰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베른슈타인은 아마도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영국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듯 하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사상적 조류 중 하나였던 페이비언주의는 사회주의 사상의 역사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주의와는 어떠한 연관도 없이 자생적으로 발전한 근대 사회주의의 한 조류였다. 페이비언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오로지 국가개입이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자체가 나날이 급속하게 집산화 하고 있으며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자기들은 단순히 그러한 과정을 촉구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 자본주의를 재조직화해서 점차 다른 사회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점진주의적 방법은 베른슈타인의 사상적 골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후퇴는 마르크스의 방법인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후퇴이기도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의 토대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경험주의와 추상적 윤리학으로 대체시켜 버렸다.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의 몇몇 예측들이 현실에서 사실이 아님이 예측되었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폐기하게 되었다. 중간계급의 소멸. 계급투쟁의 양극화. 착취의 증가 둥을 예언했던 맑스주의에 기반한 독일 사민당의 에르푸르트 강령이 경험적 근거로 볼 때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이러한 철학의 근거는 나는 반대투쟁이 모든 발전의 토대라는 것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의 원동력은 계급투쟁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맑스주의의 역사관은 사회를 구성하는 연관세력들간의 협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비유기적 진화론이다.

대신 베른슈타인은 대안으로 유기적 진화론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계급갈등이 타협을 통해 점진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점진적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맑스가 자본주의의 동학을 꿰뚫어보기 위해 도입했던 방법들을 부정하게 된다.

그것이 너무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발견한 자본주의 위기의 필연적인 요소는 자본주의의 내재한 법칙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요소들이 모든 계급투쟁의 양상을 결정한다거나 자연주의가 자동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의미의 결정론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베른슈타인은 몇몇 현실적 단편들과 가장 중요하게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폐기하고 당시 재유행하고 있던 칸트적 윤리학을 그 자리에 대체시켰다.

그래서 베른슈타인을 연구한 많은 사람들은 베른슈타인이 칸트에 대한 이해는 부정하고 불충분한 것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칸트주에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접촉은 그에게 비판적 정신을 일깨워 주어 그로하여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재검증을 시도하게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 라는 강연에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칸트가 한 것과 같은 방식을 맹목적으로 풀어갈 필요나 추종할 필요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한 것과 똑같은 비판적 정신을 가지고 문제들을 풀어가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또한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비판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였다.

첫째는 마르크스주의가 너무 결정론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사회적 생산의 하부구조와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이 너무 일면적이라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이상과 같이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비판하면서 인간은 정신적 요소에 의해서도 특히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해서는 윤리적 동기에 의해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제2인터내셔날 이후 마르크스주의에서 제기된 주요한 문제는 주관주의와 객관적인 대립이었다. 주관적으로 역사를 파악한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인간의 의지. 도덕적 문제로 해석하여 수정주의자가 된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객관주의자인 칼 카우츠키와 달리 둘이 상호의존성을 가졌다고 보았다.

수정주의는 결과적으로 윤리학을 사회주의에 재 소개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은 매우 신랄한 것이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희주의 운동에서 윤리학의 부활은 변증법적 승리의 확실성과 그 과학적 성격을 빼앗고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윤리학에 대한 강조가 사회주의의 승리에 대한 신념의 약화 등 다수에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부작용은 투쟁의 윤리적 가치와 목표의 도덕적 성격을 재인식 한데서 나오는 소득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정통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이탈한 뒤에도 자본주의의 부도덕성을 계속해서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제도는 계급 차별을 특징으로 하는 부도덕한 제도로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는 다수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한 대가로 소수의 자본가 계급을 살찌게 하는 제도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부도덕성을 대체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이렇게 자본주의제도를 비판하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관련하여 많은 부분에서 마르크스와는 다른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자본주의에 더해 사회주의적 방법인 각종 사회보장제도 도입과 보편화가 시도되면서 자본주의 진영국에서도 국민 다수가 원하는 제도와 방안을 받아들여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을 두루 활용하고 있다. 더욱이 사민주의 정당이나 국가에서도 집권한 이후에는 친자본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강화. 기업의 경쟁력 재고. 강세 정책. 자본가의 경영권 보장. 노동자 해고의 유연성.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따른 개방경제 등의 자본주의적인 입장이나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유럽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에서 존재하고 있다. 노르웨이 영국의 노동당.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사민당). 스웨덴의 사회노동당. 이탈리아 민주당. 프랑스의 사회당 등을 비롯한 유럽의 사민정당. 캐나다 신민당. 호주와 뉴질렌드의 노동당. 일본의 사회당(1990년대 중반 이후 무너졌음) 등이 있다.

심지어 독일은 헌법(기본법)에 사회민주주을 추구한다고 명시해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여겨지며 경제적으로 복지를 더 중시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다. 다만 동-서 독일의 이념대결을 벌였던 전력에다 반공주의적 색체가 깔려 있어 사회주의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민주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최종적인 목표로 추구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 자체를 타도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선에서 개량할 것을 도모하여 사회민주주의와 구분되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도 사민 정당들이 유럽 정치의 좌파세력을 주도하고 있지만 공산권 국가들의 붕괴 이후 점차 사회민주주의에서 민주사회주의로 그 성향이 전환되는 흐름이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의 뿌리는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등과 마찬기지로 마르크스주의다. 자본주의는 망한다고 호언했던 소련 동구권의 사회주의는 붕괴했으나 사회주의는 살아있다. 사회민주주는 개혁주의(Reformism)와 수정주의(Revisionism)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스스로 부정하고 극복하는 한편 자본주의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서구의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체제내의 정당으로 되어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개혁주의와 수정주의 창시자는 에드아르트 베른슈타인이다. 그래서 그를 민주사회주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이유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사회주의 사상가가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일에서 유명하게 된 것은 독일의 사회주의자로 수정주의를 제창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사회주의의 문제점)에 반론을 제시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아우구스트 베벨칼 카우스키 등과 연대해서 베른슈타인이 주장하는 수정주의 노선에 대항해서 단호하게 맞서 치열하게 투쟁을 하였다.

베른슈다인은 자본주의가 성숙하면 복잡한 메커니즘을 발달시킨다는 쪽이었다. 가령 신용같은 것이 제도 내에서 불안정성을 해결하며 무제한적 경제성장만 가능하다면 급작스런 위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이 아닌 진화가 사회변화의 핵심이 된다고 하였다. 현상 유지에 가장 많이 투자한 이들에게는 매혹적인 철학이라 하였다.

반면에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은 경제이론에 탄탄한 기반을 둔 의견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그녀는 자본주의에서 신용은 초과분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그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 했다.
그녀가 쓴글은 여러 세기를 지난 지금도 공명한다. 그녀가 예측한 신용 디폴드 스와프나 그 밖에 여러 복잡한 인위적 금융 메카니즘은 2008년 세계 경제를 마비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었다.
 

사회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에 주목한다.ⓒ픽사베이
사회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에 주목한다.ⓒ픽사베이

1898년 로자는 베를린을 정복하기 위해 이방인으로서 혼자 독일에 도착한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 혁명가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하운동에 참여 했으며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여했었다. 당시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로 사회운동의 확산이 가장 빠른 곳이었다. 법적으로 인정받는 사회민주당은 10만 명 이상의 당원이 있었고 90여개의 사회주의 노선과 일간지가 포진되어 룩셈부르크는 저널리스트이자 학자로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도우면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비판하게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에서의 첫 활동은 1898년 슐레지엔의 폴란드인 광부들을 상대로 한 사회주의 강연이었다. 대표자는 카톨릭 신앙을 가진 보수적인 광부들을 상대로 사회주의를 가르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 난색을 표했으나 그녀의 타고난 언변과 친화력은 광부들을 매료시켰다.

1905년에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바르샤바에서 혁명투쟁에 동참하여 체포되기도 하였다. 또한 1917년 2월과 10월에 발생한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을 감옥에서 맞은 로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환영하면서 도 혁명을 주도한 볼세비키의 독재화를 우려하였다.

1915년 감옥에서 집필한 (러시아 혁명 사후 1922년 출판)에서는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경의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세비키의 권위주의적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억압. 민족주의적 태도 등을 비판하고 혁명이 관료주의화되고 부르주아적 독재로 귀착될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

또한 거리에서 대중들에게 사회주의가 승리하는데 대중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러시아 첩보원이라는 의심스런 눈초리였다. 그녀는 혁명을 통해 전쟁종식과 프롤레타리아 정부수립을 목적으로 스파르타구스단(독일 공산당의 전신)을 조직하였고 1918년에는 독일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볼세비키는 왜 언론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금지하는 것일까? 정치에서 유익하고 건전하고 정화시키는 모든 것의 대 전재는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정 정파의 지지자들만을 위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모든이를 위한 항상 절대적인 자유다.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감옥에서 나온 로자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과 베를린에서 모여 스파르타구스 연맹의 기관지인 북은 깃발을 창간하고 사민당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독일의 새지도자로 취임한 안장을 만들던 프리츠 에버리트는 자유군단을 만들어 훈련시킨다. 내부의 적들 사회주의자와 유대인들을 향한 반격을 위해서 그리고 구스타프 노스케는 스파르타구스 단원들을 색출하기 위한 작업을 조용히 시작하게 된다.

한편 로자는 밤낮으로 붉은 깃발이란 원고를 쓰는데 몰두했다. 거리의 벽보와 언론을 통해 반혁명 프로파 간다(어떤 이념이나 사고방식 등을 홍보하거나 설득하는 선전)가 기승을부렸지만 그녀는 있는 힘껏 진실을 전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1917년 전쟁의 와중에 일어난 볼세비키 혁명으로 짜르는 퇴위되고 1년 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군항 킬에서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통치 능력을 상실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 황제는 사민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권력을 이양 하고 퇴위하기 이른다.

독일 사민당 세력에게는 공화정을 이루기 위한 획기적인 기회였지만 바이마르 초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에베르트는 생각이 달랐다. 군부와 결탁해서 급진주의 세력 박멸에 나서게 된다. 독일 우파들은 독일이 전쟁에서 진 이유를 노조와 사회주의자 유대인 탓으로 돌리면서 1919년 1월 로자와 그녀의 동지들을 지지하는 스파르타구스 군단이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키자 우파 의용군인 자유군단을 동원해서 무력진압에 나서게 된다.

파멸적인 전쟁으로 조국을 몰아넣었던 황제마저도 자국의 국민들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았지만 자유군단은 반란 세력들에게 무력사용을 마다하지 않았다. 1월 25일 스파르타구스단의 붕기를 분쇄하라는 제국 총리 에베르트의 명령을 받은 자유군단은 로자와 칼 리프크레히트를 체포해서 처형을 하였다.

로자는 자유군단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가는 동안 의도적으로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는 말을 마지마막으로 남기고 살해되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의 와중에 그렇게 죽었다. 그녀가 이세상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그녀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는 맞고 또 어떤 점에서는 틀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로자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와 외형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본질은 그대로이다. 대중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주의 경제 순환 특히 이윤추구를 위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계속되고 있고 경제 신화화와 낙수효과 같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선전들이 난무할 뿐이다. 군산복합체는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자신의 이익을 불려줄 먹잇감을 찾고 있으며 허울 좋은 신용사회의 허상은 비등점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1세기 만에 돌아온 대혼란기에 로저의 이상적 사회주의가 제어할 수 없는 야만의 시대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낯설게만 들리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들의 생각일 것이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찬옥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 사단인 동교동계 소속으로 현재는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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