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민의 의학이야기> 필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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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민의 의학이야기> 필름의 추억
  • 이창민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3.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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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창민 자유기고가)

모두 퇴근해 불 꺼진 병원 구석 창고에 흰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들이닥치더니 이내 부스럭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는다. 한창 연말 분위기에 젖어 다른 사람들은 유흥가에서 흐느적대고 있을 12월의 어느 날 밤. 우리의 불쌍한 인턴 선생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홀로 병원 사진 창고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그렇다. 우리의 인턴 선생은 내일 수술 예정인 환자의 X선 필름을 찾고 있는 중이다. 추운 겨울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에는 방울방울 구슬땀이 맺히고, 내일 회진 전까지 사진을 찾지 못할 경우 떨어질 교수님의 불호령을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진다. 분명 필름이 없어진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건만 어쨌든 필름을 제시간에 갖다 바치지 못하면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 되고야 마는 우리의 불쌍한 인턴 선생. 90년대 종합병원 인턴의 서러운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바야흐로 서기 21세기. 비록 어린 시절 상상한 것처럼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로봇이 비서 노릇을 해주는 세상은 아직 아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반신반의 하던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을 보면 세상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많은 발전을 이룬 것이 분명하며 이러한 변화의 속도는 날이 갈수록 가속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의료 부문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더 눈에 띄게 병원에 변화를 준 발명품이 있으니 기존의 필름을 대처하는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이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단순히 생각하면 이것은 기존의 필름 카메라에서 현재의 디지털카메라로 전환된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기존의 필름카메라는 사진 촬영 후 사진관에서 사진 출력을 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사진을 볼 수 있었지만 디지털 카메라는 이러한 과정 없이도 바로 모니터를 통해 사진을 볼 수 있는 원리와 유사하다.

기존 필름 사진은 그것을 보관해야 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웬만한 병원에는 이를 보관하는 방을 따로 두어야 했다. 하지만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으로 전환된 상태에서는 모든 사진 자료를 컴퓨터에 저장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기존 필름을 보관하던 방은 자연스럽게 다른 공간으로 활용이 된다. 필름 사진은 출력 과정을 거친 후 사람이 직접 이것을 진료실로 가져와야 했다. 따라서 이에 소비되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고 매번 사진이 나올 때 마다 일일이 사람이 운반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하지만 현재의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에서는 사진이 촬영되자마자 바로 전산망을 통해 전송이 되므로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도 즉시 사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은 컴퓨터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는 한 촬영한 사진을 분실할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글머리에서 소개한 과거의 인턴 선생이 현재의 의료 환경에서 일을 했다면 굳이 불필요한 고생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이 의료 기관에 급속도로 파급되고 있고 많은 병원에서는 이미  완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인 반면 아직 기존의 필름 사진을 사용하는 의료기관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러한 첨단 장비가 진료 환경에 편의를 제공해 준 것은 맞지만 기존의 필름 사진이 정확도 면에서 뒤쳐진다고 볼 수는 없으며 아직까지 사진을 판독하는 것은 기계가 아닌 사람임을 고려할 때 기존의 필름 사진을 평가절하 할 이유는 전혀 없음을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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