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 장외투쟁…YS식 승부수 띄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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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 장외투쟁…YS식 승부수 띄우나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3.08.22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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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과 김한길, 목숨 걸고 싸워 군정종식 이룬 김영삼처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민주당이 장기전을 불사한 장외투쟁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 보인다.

김한길 대표는 22일 국정원 국정조사 종료 이후 민주당 진로 모색 관련, 원내외 병행투쟁 방침과 함께 "천막에서의 장외투쟁 강도를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알렸다.

김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 인사말에서 "단기간 승부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서울광장에 천막을 칠 때 미리 장기전을 각오했다. 여기서 결고 멈출 수 없다"며 첨예한 대치정국이 불가피함을 시사했다.

그는 또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당의 명운을 걸어야 한다"면서 "저부터 민주주의 회복에 정치적 명운을 걸겠다.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한 민주당 대표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최근 민주당은 장외투쟁 수위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전날만해도 민주당은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및 9월 정기국회 개회 준비를 위한 일환으로 주중에는 원내투쟁, 주말에는 장외투쟁을 병행한다고 말했다.

▲ 우측부터 민주당 김한길 대표, 전병헌 원내대표.ⓒ뉴시스.

지난 21일 전병헌 원내대표는 취임 100일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광장 투쟁이 지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국회 투쟁이 필요하고, 광장 투쟁이 있어야 새누리당의 독선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며 "주중에는 국회에서, 주말에는 광장에서 병행투쟁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방침은 정기국회를 앞둔 시점에서 투쟁만 고수할 경우 자칫 여론 상의 역풍을 맞을 수 있음을 우려해 병행 투쟁은 지속하되, 장외 투쟁의 수위는 낮추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장외투쟁을 높여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 또한 만만치 않아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의 적잖은 갈등이 예고되기도 했다. 온건파가 민생 회군에 방점을 찍었다면, 강경파는 민주당의 존립을 걸고 장외투쟁에 올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단식투쟁과 의원직 총사퇴까지 언급하는 등 장외투쟁을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고 핏대를 높였다.

강경파에 속하는 이춘석 의원의 경우 상임위원장-간사단 비공개 연석회의에서 "국회의 입법 기능을 포기하더라도 장외투쟁에 올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결국 김한길 대표는 이번 의총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당내 갈등을 조기에 수습하고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 온건파와 강경파의 의견을 고루 수용하면서도 크게는 장외투쟁에 중심추를 두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장외투쟁에 올인하자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고, 김 대표가 강경파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을 거라는 관측이다.

이에 따라 민주당이 정국 대응과 관련, 과거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보여준 승부사적 투쟁을 선택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실제 신민당 총재 시절 YS는 야당이 정치사적 고비를 맞을 때마다 목숨을 건 투쟁으로 군사정부와 싸워 성공을 이룬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YS 투쟁의 면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은 아래와 같다.

▲ 83년 5월 YS는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인다. ⓒ김영삼 회고록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은 박정희 전두환과 집요하게 싸워 마침내 ‘군정종식’을 이뤄냈다. 그 싸움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YS의 맞은 편엔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YS가 눈엣가시였다. YS를 구속시키기도 했고, YS를 향해‘초산테러’ 등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정치공작을 일삼아 YS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YS는 끊임없이 싸웠다. 이를 보다 못한 박정희 정권은 1979년 ‘YS제거’를 위해 융단폭격을 가했다. YS의 오른팔이었던 김덕룡 문부식 등이 구속됐고, 서석재 문정수는 지명 수배됐다. YS가 이에도 굴하지 않자 신민당 총재직을 빼앗고, 의원직마저 박탈시켰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태는 부메랑이 돼 박정희 자신이 죽임을 당했다.
박정희 죽음 이후 전두환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YS는 1983년 5월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인다. 그리고 이 단식투쟁이 밑거름이 돼 ‘민주산악회’와 ‘민추협’, 그리고 신민당 창당을 통한 2·12 선거돌풍을 일으키며 전두환 정권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6·10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정세운 시사평론가)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마포당사에서 전당대회가 열렸다. 앞서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권, 타락, 부정, 불법을 자행하고도 공화당이 68명밖에 당선이 안됐다. 반면 신민당은 공화당보다 1.1%를 더 얻어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불신임을 받았다. 신민당은 유신정권의 대체세력으로 국민의 엄청난 성원을 받은 선거 결과였다.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정권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앞장서는 김영삼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한마디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종소리였다. 김영삼은 당선 연설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오늘의 결의는 우리 신민당이 곧 여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며, 수권 준비태세가 돼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노병구 전 민주동지회 회장)

최근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도 MBN <시사데이트>에 출연, "YS가 전면에 나서면서 87년 직선제 개헌운동을 이끌었고, 6·10항쟁과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6·29 선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호평한 바 있다.

그는 이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말기인 유신정권 시절 강력하게 대항한다는 이유로 1979년 우리나라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역 의원으로서 제명당한 의원이 김영삼 의원"이라며 "강력한 야성으로 선동가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민주당의 이번 결정은 숱한 사선을 넘나들며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군정종식을 이뤘던 YS처럼 가진 역량을 모두 걸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전면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거듭 내비친 게 아니냐는 의견이다. 김한길 대표 역시 근래 계속 제기된 민주당 리더십의 부재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부러지더라도 휘어지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피력한 것으로 풀인된다.

한편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MBN 방송에서 "민주당은 요구사항이 뭔지도 모르고 투쟁하고 있다"며 "김한길 대표가 지금이라도 자기가 해야 될 일이 뭔지를 확실히 정해야 한다. 당내 여러 계파들에 휘둘리는 대신 분명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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