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5)>민주장정 50년의 첫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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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5)>민주장정 50년의 첫 싸움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1.2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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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민주장정 50년의 첫 싸움

혁신 정당을 택했다

나는 사회대중당 공천으로 당선된 전국 도의원 2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1960년 당시까지도 우리 사회의 각 분야별로 본 근대화 현대화의 척도는 거의 이조말기와 대동소이하다고 보았다. 대개혁이 필요하고 정당은 영국의 노동당 내의 패이비안(Fabian)협회(19C 末 Sidney webb과 Bernard shaw가 제창함)에 관심이 컸다. 나는 개혁 정당으로 사회대중당을 택했다. 나는 윤길중, 고정훈, 양선생을 존경했고, 도의원 출마의 변은 두가지를 내세웠다.

첫째, 도의회가 한량들의 사교장이 되지 못하도록 쇄신하겠다.

둘째, 도의회를 도정 개혁을 위한 정책토론장으로 만들겠다.

제3대 도의원 73명 중 대졸 도의원이 10명이 넘었다. 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당적을 넘어서 나의 제의로 9명의 도의원이 골덴 작업복을 입고 등원했다. 나는 김영삼 의원이 주도하는 청조회 팬이었다. 그 이유는 26세의 젊은 의원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헌법파괴행위를 직접 경무대를 방문해서 만류한 사실은 당시 젊은 정치 지망생들에게는 큰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 경북도의원시절(1960. 10) (골덴 옷입고 등원)

세가지 개혁안 제안 극적 의결

(1) 5·16 쿠테타로 도의회 생활은 짧았지만 보람있고 열정적인 활동이었다. 나는 세가지 ‘안’을 발의하여 다행히 모두 관철시켜 승리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61년도 도세수입에 소달구지에 신설되는 세금이었다. 농민들의 손과 발에 세금을 매기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판 가렴주구”라고 결론짓고 징세 철회를 요구했다. 동조하는 의원이 없었다. 나는 본회의에서 밤 12시가 넘으면 회기를 다시 소집해야 하며 그 기간이 1주일 걸린다는 틈을 이용해서 소위 필리버스터(filibuster : 소수의 의사진행방해) 전술로써 압박했다. 이호근 지사는 그의 명함에 ‘유 의원의 긴급동의를 수용하겠다’ 고 적어서 발언 중인 나에게 남봉진 과장이 가져왔다. 남봉진 과장은 후일 경기지사를 역임했다.

(2) 제53차 제3차 회의에서 온 세상이 데모화된 사회상을 수습하기 위해서 나는 이호근 지사에게 건의했다. 장면 정부의 경제 제일주의 정책을 사회 안정 제일주의로 바꾸자는 경북도민의 뜻을 건의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호근 지사는 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나는 당적이 사회대중당이었고, 데모와 무질서와 혼란은 위험수위까지 이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사회대중당의 정책이 마음에 맞지 않아 혁신 우파인 통일사회당으로 옮겨 윤길중, 고정훈 선생들과 뜻을 같이 했다. 그 당시 오만 명 정도가 데모를 할 때는 최일 의원과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데모 군중 맨 앞, 선두에 서서 선도하기도 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 와서 “조재천 장관 집을 불 지르자. 시청을 포위하자” 라는 과격하고 끔찍한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통일사회당으로 당적을 옮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대중당의 성급한 통일안과 중립화안은 국민을 불안케 했다.

(3) 54회 제 1차 회의(1961.3.13)에서 나는 사전에 협의와 토의 없이 김정호 선배 의원과 나의 외우 강철호 의원의 동의를 얻어 소위 당시의 ‘2대 악법’ 철회 건의안을 전격 제안했다. 약 7~8시간의 격렬한 찬반 토론과 집권당 민주당의 사생결단의 반대 토론에도 불구하고 동 제안은 의원 55명 중 가 30, 부 12, 기권 13으로 통과 되었다. 당시 여야의 의석분포는 여당의석이 많았다.

전국지인 매일신문에서 독재를 상징하는 구 정권의 유령 ‘경북도의 반공 데모, 규제법안 철회 건의안 가결’이란 사회면 톱기사가 9단 기사로 실렸다. 그날 도지사는 정부로부터 부담스러운 압력을 받았으며 민주당 도의회, 원내 총무 김인갑 의원은 원내 총무직을 사임했다. 주병환 민주당 도당 위원장이 급거 서울에서 대구에 왔다. 그날 저녁 김정호 의원, 강철호 의원, 최일 의원, 서정학 의원, 이시호 의원과 나는 대포집에 모여 “앞으로도 국회가 못하는 일을 아우들인 우리가 하자”고 건배잔을 높이 들었다. 의회 정치의 진수를 체험했다. (경북도의 제 1차 회의록, 1961년 1월 13일)

반공특별법안 및 데모집회규제법안 철회건의안 제안 사유 (제안자 유성환)

▲ 농민들의 소달구지에 과세하는 경북도의 계획을 좌절시킴 (1961) 경북 도의원 때

370만 도민의 의사를 집약 표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미국의 제퍼슨도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언론매체의 소중함을 일깨운 말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반공특별법안과 데모집회규제법안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 여론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국론 분열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공산주의를 막는 것은 현행 국가보안법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국민의 여론이다.

경북 도의회는 다음과 같은 주문으로 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한다.

『주문, 정부는 내주에 국회에 제안 예정인 반공특별법과 데모집회규제법을 철회하라』

1961년 5월 경북 도의회는 5·16 군사 쿠데타로 강제 해산되었다. 나의 도의원 생활은 6개월이었다. 당시 나는 29세였다.

 

내가 겪은 5·16쿠데타

체포령과 뜻밖의 구원자 (체포령 때문에 죽는 자식 최후를 못봐)

대구에서 5·16 쿠데타군은 나를 체포령 제 1호쯤으로 규정했다. 잡히면 앞산골짜기에서 총살한다는 것이 쿠데타 초기의 대구의 살벌한 분위기였다. 나는 밤낮없이 옮겨 피해다니며 도피했다. 도의원 배지를 팔아야 했다. 南양과의 사이에서 돌이 가까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그 애가 “경기”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며칠 안 가서 죽었다.

▲ 5·16쿠데타 직후 나를 구해준(左)반형식(의원), (右)저자

나는 그때 도피중이었는데, 돈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다는 비밀연락이 왔다. 나는 미국의 외삼촌께서 보내준 webster 영영사전을 청구대학 모교수에게 억지로 맡기며 돈을 장만하였으나 부족하였다. 나의 성주초등학교 동기생인 오복득 간호부장의 대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애 이름을 내가 존경하는 “링컨”의 이름을 따서 “링건”으로 작명하였는데 요절하고 만 것이다. 나는 도피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 “링건”의 최후를 보지 못해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반가운 소식이 왔다. 내가 체포령1호에서 해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강철호 동지의 전화내용은 이러했다. 소위 구정치인들을 체포하는 특별위원회의 한 사람인 반형식이란 수사관이 합동회의에서 유성환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1961년 1월 28일 도의회에서 한 발언기록을 제시해서 유성환은 체포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1월 28일 발언내용은 이호근 지사에게 “정부의 경제 제일주의 정책을 미루고 사회안정, 치안제일 주의 정책을 건의할 용의가 없느냐”는 것인데, 반형식 수사관은 민주당의원이 다수이면서 한 사람도 시국 수습책을 내어 놓지 않는데, 사회대중당이면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을 평가한 것 같았다.

수개월 후 그가 제대한 후 나는 인사를 하러 갔다. 인사를 하고 나이를 물으니 37세라고 했다. 나는 즉시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나는 그 때 만 30세였다. 어느날 경찰관 조양래 군이 나를 보고 “너는 우째 반형식의 나이도 모르고 형님, 형님 하고 따라다니냐. 반군은 고등학교 내 후배인데 우리보다 여섯 살이나 적다” 나는 분하고 성이 나서 반형식을 불렀다. “너 오늘 내 주먹맛 좀 먹어!” 내 주먹이 막 나가는데 반형식은 벌써 몸을 약간 숙이면서 “오늘부터 즉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사과를 하는 바람에 우리는 웃었다.

우리 둘은 평생 친구가 되었으며, 12대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에서 서로 만났을 때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7개월의 중노동과 나의 군번

▲ 7개월의 중노동 끝에 현장에서 각혈로 쓰러짐(1962.9 경북 영주) (左가 저자)

 1962년 2월말 나는 국토건설단에 입단했다. 1950년 학도경찰로서 가야산, 수도산에서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한 것을 병역필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한 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 병역미필자가 되어있었다. 1일 2~3 루-배를 150m 또는 200m 떨어진 곳까지 흙을 파서 실어나르는 운반 작업은 내게는 중노동이어서 한계점에 왔다. 위장병으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나는 작업 7개월만에 작업장 한복판에서 대 각혈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보내는 곳도 없는 무서운 곳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달려온 南양의 간호를 받았으나, 그때는 아무런 약이 없었다. 나는 국토건설단 중앙본부장 이규광 부장께 도움을 청했다. 불과 4~5일 뒤 그 분의 비서 전수복 군(나의 초등학교 동기생)을 영주지단에 보내어 나를 대구로 귀가시키고 2개월 뒤에는 제대증까지 보내주었다. 나의 군번은 91010995였다. 12대 의원 때 어떤 모임에서 이규광 부장께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이규광 부장은 나와 같은 성주 출신이었다. 이 시기에 어머님은 나를 뒷바라지 하시느라고, 그 큰집을 팔아야 했다. 그 뒤에도 집을 세 번이나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모두가 나를 성공시키겠다는 어머님의 꿈 때문이었다.

내가 떠나면 저 이 곁에는 아무도 없어예

1962년 11월경 나는 비산동에서 집세가 싼 단칸방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1963년 1월경, 그 동안 병원치료를 받지 못해선지 어느 날 또 대각혈을 하게 되었다. 5·16혁명의 강제노동은 잔인했다. 중노동이었다. 각혈하는 양상이 너무 심해 나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국건단 모 부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은 이후, 나는 매주 한 번씩은 육군 특무대 소속 문상사로부터 감시와 주의를 받으며 일을 했다. 작업에만 열중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중노동을 회피할 방도가 없어 실로 무리한 강제노동을 7개월간이나 해냈던 것이다.

비산동 나의 병실, 양팔석 군의 집 한칸 방에는 이불, 농, 화장대, 책상 하나 없는 텅빈 방이었다. 조그마한 높이 50cm 정도의 얇은 궤짝이 있을 뿐 그 궤짝 전면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자그마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나는 南양의 코트를 이불 대신으로 덮고 자니 남양은 이불 없이 여러 가지 헌 옷을 덮고 잤다. 내 각혈이 때로는 케네디 사진에 튀어 참으로 난처했다.

1월 중순 각혈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박규식과 황태성이 문병차 왔다. 나는 반가워 우는데 우는 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몸의 각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두 친구와 방준석과 나는 중학교때 4인 그룹을 조직했었던 친한 멤버들이었다.

다음날 강철호 내외가 왔다. 쌀이 떨어지면 양식을 나눠먹던 사이였다. 그들이 가고나니 병실은 더욱 적막했다. 그럴 즈음 어머님과 동생 복환이가 왔다. 복환과 어머님이 들어오시려는 순간 나의 각혈이 시작되었다. 예부터 폐환자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내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각혈하는 것을 보셨지만 이번만은 어머님도 놀라셨는지 멍하니 앉으셨다가 돈도 좀 안주시고 성주로 가버리셨다.

절해고도에 있어도 절해고도가 친구가 되지만 어머님이 그냥 가시니 그런 섬도 없는 나 혼자뿐인 것 같은 처절한 처지였다. 박창규, 도창렬 의원, 황태성, 박규용 등 친구들이 약값을 얼마씩 보내주어 참으로 감사의 우정을 가슴깊이 느꼈다. 각혈은 하루에 한 두 번 하는데 이번에는 南양의 오빠 남대진과 남양의 외사촌 오빠 권학수가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부엌으로 南양을 불러내어 문병은 커녕 “유서방은 폐암이다. 어서 멀리 가거라. 아니면 집에 오너라.”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제 다 끝이구나.’ 인간이 하는 언어를 마지막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南양의 말, “내가 떠나면 저 이 곁에는 아무도 없어예” 두 오빠는 몇 번 더 말하더니 가버렸다.

남양의 성경구절 같은 말이 남양과 나를 영구히 한 몸 되게 했다.

내가 만일 살게 된다면…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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