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병묵 기자·홍세미 기자]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은 필리핀보다 대한민국에서 산 세월이 더 길다. 필리핀보다 한국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이 의원은 누가 봐도 대한민국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의원에겐 ‘외국인 이민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이 의원은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외국인으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때문에 이 의원 주위엔 논란이 많다. 그에게 주어진 잣대의 기준은 더 엄격했다. 같은 말도 이 의원이 하면 특별하게 들렸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슈가 됐다. 그간 위안부 기림비 유보 입장, 학력 위조 논란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눈도 다 내린 후에 쓸어내는 법. 이 의원은 논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해명은 뒤늦게 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한 듯싶다. 지난 2일 이 의원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시사오늘>을 맞이했다.
-실제로 보니까 더 미인이다.
“인터뷰가 참 오랜만이다. 그래서 화장도 좀 했다.”
-국회의원 된 지 2년 됐다. 느낌이 어떤가.
“이제 ‘절반 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정치에 입문했을 때, 선배 의원들이 적응하는데 6개월~1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나는 보통 의원들 적응 기간보다 2배인 1년~2년 정도 돼야 적응할 것이라고 들었다. 그 땐 걱정이 많이 됐다. 적응하는데 2년 걸리면 국회의원 임기인 4년 동안 ‘뭘 하겠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빨리 적응하고 싶었다.”
-대외활동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방에서 공부부터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첫 행사를 나간 2012년 5월에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전엔 내가 유명인인 줄 알았다. 행사를 주최한 단체의 회장이 나에게 한 마디도 안 하고 갔다. 막상 밖으로 나가 보니 유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방에서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토론회, 간담회 등 행사가 있으면 다 나갔다. 바쁘게 사람들 만나고, 들어야 할 이야기도 듣고 하니까 보람 있었다.”
-활동하는 상임위원회는 마음에 드나.
“처음엔 문화관광체육위, 방송통신위에 가고 싶었다. 다문화라는 것 자체가 정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문화교류, 방송을 통한 인식 개선을 하고 싶었다. 그 땐 가고 싶었지만, 문광위 같은 곳은 초선의원이 가면 ‘깔려 죽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외교통일부에 갔다. 탈북자나 일본 위안부 관련 일을 했다.
일본 위안부 같은 경우는 수요 집회에 나가서 할머니들과 같이 시위도 했다. 2012년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소송걸 때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그래서 2013년에 소송을 건 할머니들이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바로 성과가 나타나서 뿌듯했다.“
-위안부 기림비에 반대했다는 논란이 있지 않았나.
“좀 억울하다. 내 입장은 기림비를 짓지 말자고 한 게 아니라, 국회 안에서 짓자는 것을 좀 더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짓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그때 여성가족위원회와 외교위를 겸임했다. 매번 위안부 할머니 얘길 나눴다.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내가 위안부 기림비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처음엔 위안부 기림비를 ‘국회 안’에 세우자는 의견이었다. 기림비 설치를 ‘국회 안’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국회 안은 일반인들이 드나들기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니다. 들어올 때 제한도 있다. 이왕 세우는 거 유동인구가 많은 광화문이라든지, 외국인들 많이 오는 명동 같은 곳에 세우면 더 의미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달에 유보 의견을 내고 다음 달에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세우는 것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유보 의견을 낸 다음 달에 여의도 공원에 기림비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기림비뿐만 아니라 위안부 공원도 만들자고 추진했다. 이 의견은 본회의를 통과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국회 안에다 어정쩡하게 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보다 이자스민 의원에게 잣대가 엄격하다고 생각하진 않는가.
“나만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의원들보다 내가 하는 말에 민감한 것 같다.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도 크게 이슈가 되는 것 같고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다.”
-왜 크게 반응한다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은 나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보는 것 같다. 민감한 문제일수록 한 마디 하면 크게 반응한다. 일본 위안부 문제도 ‘외국 사람이니까 위안부 잘 모를 것이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필리핀이랑 일본이랑 사이가 좋아서 일본 두둔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
나는 필리핀 국회의원도 아니고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다. 나를 비판하는 시선들을 많이 안다. 난 내 기사 댓글도 다 본다. 도대체 왜 날 싫어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지인들은 댓글을 보지 말라고 하지만,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아야 개선도 할 것 아닌가.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읽지 않는 것은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런데 심심해서 악플 다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누군가 신고를 해서 악플러를 만나봤는데, ‘심심해서’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이럴 땐 마음 아프다.”
-필리핀도 일본 위안부가 많다던데.
“많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 위안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현재 살아계신 분은 한 분뿐이다. 따지고 싶어도 쉽지 않다. 위안부 문제로 필리핀과 일본 간 사이가 좋지 않다.”
-학력 위조에도 휘말렸다.
“깜짝 놀랐다. 국회의원을 하기 전에도 인터뷰를 많이 해왔고, 그때마다 생물학과에 졸업했다고 얘길 했는데 갑자기 당선된 후 논란이 일었다. 인터뷰 할 때, 꿈이 뭐였냐 물어보면 ‘의사되려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생물학과 졸업했다면서 어떻게 의사를 꿈꿨냐고 물어봐서 필리핀 교육 과정을 설명했다. 필리핀은 의대를 가려면 보통 생물학과 4년 다녔다가 따로 시험을 봐야 한다. 한국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의대로 바로 들어가지 않느냐. 그게 다르다.
그런데 기자들은 길게 쓸 수 없으니까 의사되기 위해 공부했다고 썼다. 그래서 의대 나왔다고 오보가 났다.
이게 문제가 안 됐다가, 공직자가 되려니까 논란이 됐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 민감하다고 느꼈다. 위안부나 학력 위조나 논란이 일어서 깜짝 놀랐다.”
-그때 바로 해명하지 않았다.
“진정되고 난 후에 해명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땐 오히려 내가 섣불리 나섰다간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을 만들 것 같았다. 그래서 들어오는 인터뷰 다 거절하고 있다가, 이렇게 좀 잠잠해졌을 때 차분히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한국은 다문화사회? 이자스민이 말하는 한국
-한국을 다문화사회라고 한다. 사람들 인식이 많이 따라온 것 같은지.
“나한테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한국에서 사니까 어때요?’다. ‘20년 전이랑 비교하면 언제가 더 좋아요?’ 라고 묻는 것이라면 처음 왔을 때가 더 좋다.
그때는 한국어 배운 적도 없고, 드라마, 신문 보면서 독학으로 한국어 배웠다. 지금은 외국인 상대로 한국어 배우는 학당도 많다. 하지만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은 20년 전이 더 좋다. 나를 볼 때 느껴지는 눈빛과 대우는 20년 전이 훨씬 좋다. 다문화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별로 안 좋아 지는 것 같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방송과 언론 보도 때문인 것 같다. 사실 방송에 나오는 다문화 가정은 ‘매 맞는 아내’, ‘왕따당하는 아이’와 같이 불쌍하게 비춰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송 거리가 안 되기 때문에 더 부각해서 보여준다. 사실 외국인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저를 봤을 때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저 외국인을 본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하지만 방송으로 다문화가정을 본 사람들은 ‘다문화 가정은 다 저렇게 불쌍하구나’, ‘다문화 가정은 남자가 여자를 사오는 거구나’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다문화 가정을 볼 때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 같다.”
-TV에 나오는 다문화 이미지가 어떤 것 같나.
“방송에선 까무잡잡한, 불쌍하게 보이는 가족들을 내보낸다. 다문화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사실 베트남, 중국, 일본의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보면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다. 그냥 어울려 놀다 보면 누가 다문화 가정 아이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까만색’이면 다문화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공익 광고엔 ‘다문화 가정 불쌍하다. 우리는 차별하지 말자’는 것이 많이 나온다. 이런 것들은 다문화 가정을 ‘낙인’찍는 것이다.
지난번 <러브 인 아시아>에 출연할 때도 제작진이랑 참 많이 싸웠다. 다문화가정을 되게 불쌍하게 표현하려고 하더라. 방송은 ‘웃기는 것’ 아니면 ‘울리는 것’ 둘 중 하나다. 때문에 극대화시키는 것 같다. TV에서 너무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니까 다문화 가정을 볼 때 일반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것 같다.”
-언제 그런 편견을 느꼈는지.
“다문화 가족을 대놓고 편견 갖고 차별하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옆집 사는 아주머니가 우리 시어머니에게 ‘국제결혼이 더 좋다. 이중 언어 배우고 살림도 잘하고 얼마나 좋냐’고 칭찬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장난으로 ‘아주머니 막내아들 결혼 안 하셨죠? 필리핀 여자 소개시켜 줄까요?’라고 했더니 한사코 거절하시면서 ‘우리 아들은 한국 여자랑 결혼해야 돼’라고 하더라.
본인과 상관없는 위치에 있는 다문화 가족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가족으로, 동료로 다문화 가족이 들어온다고 하면 싫어한다. 그런 면에서 차별을 느낀다.
-다문화 가족은 한국에서 어떤 불편을 겪는다고 생각하는가.
“이민 온 사람들이 TV에 나온 한국 이미지와 달라서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막상 말할 곳이 없다.
언어도 문제다. 저는 남편과 1년 반 정도 연애를 하다가 결혼했지만, 결혼부터 시작한 다문화 가족이 많다. 그런 분들은 언어 면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해결하기 쉽지 않다.
귀화를 선택한 부모들은 이 차별과, 문제를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아이들은 본인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그런 대우를 받는다. 그 아이들을 위해 문제가 개선돼야 한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 것 같나.
“정부가 도움을 줘야 한다. 사실 다문화 가정과 일반 가정과 수입이 똑같다고 해도 출발선이 같지 않다. 언어부터 문제가 발생하니까 할 일은 일반 가정보다 더 많다. 만약 엄마가 한국어를 못 하면 한국어 배워야 하는 시간과 비용이 들고 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또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다문화 부부가 있다. 아이가 고등학교 들어갈 때쯤엔 아빠가 60세 가까이 된다. 그러면 엄마가 일을 해야 되는데, 한국어도 잘 안 되고 하면 일자리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다문화 가정을 일반 가정과 출발선이 같게 하고 싶다. 그렇게 출발선을 같게 하지 않으면 계속 다문화 가정은 도태된다. 그렇게 한 번 저소득층으로 떨어지면 ‘빈곤의 대물림’이 지속될 것이다.
한 번 빈곤 가정에 빠지면 나오기 쉽지 않다. 국가의 임무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 같다. 국가는 다문화 가정을 책임 져야 한다. 이게 복지 같다.”
정치인 이자스민, 여당과 야당의 경계선을 허물다
-당선됐을 때 현지 반응이 어땠나.
“엄마가 TV로 먼저 당선 사실을 알았다. 그때 엄마가 전화로 ‘왜 이제 얘기하냐’고 하시면서 좋아했다. 필리핀 현지인들보다 교민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교민들이 한 20만 명 정도 살고 있는데, 국제결혼을 한 사람들 중에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나 보다. 현수막도 많이 걸리고 좋아하는 분위기다.”
-왜 새누리당으로 갔나.
“새누리당에서 제안이 왔다. 당시 민주당에선 이민자가 국회의원을 맡기엔 시기상조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한나라당은 전환용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 같다.”
-야당에 더 가까운 정책을 내세운다.
“다문화 가족을 비롯한 소외계층 프레임은 사실 야당에 가깝다. 그런데 나는 이런 소외계층엔 여야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다문화 관련 문제는 내가 독보적인 것 같다. 민주당에서도 다문화 전문성을 인정한다.”
-친한 의원들은 누가 있나.
“비례대표들은 기본적으로 친하다. 따로 모임을 가지고 있다. 약 70명 정도 되는 초선의원들이랑 친하다. 조금 젊은 층인 이재영 의원, 김상민 의원이랑 친하다. 민주당에선 정호준 의원 같은 분과 친분이 있다. 초선 여성 의원 모임인 ‘새누리 17’이라든지 ‘약지(약속 지키미)26’ 같은 모임에 참여 중이다.”
-여야 구분이 없는 것 같다.
“내 활동엔 여야가 없다. 그게 좋은 것 같다. 저한테 찾아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정책과 생각은 정치적 요소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여유롭다. 야당 의원들도 그렇게 생각해서 나한테 쉽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한국 사회생활을 해보니 어떤가.
“난 필리핀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거기가 어떤지 모르겠다. 18살 때 한국에 왔다. 내가 알고 있는 사회생활은 한국이다. 1995년에 왔으니까 필리핀에서 산 세월보다 한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길다. (웃음)사람들은 나에게 필리핀 생활을 물어보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노래를 잘한다고 들었다.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나.
“필리핀은 노래 잘 부르는 사람 굉장히 많다. 나 정도면 보통이다. 필리핀은 아주 뛰어나게 예쁘거나 노래를 잘 불러야 연예계로 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빼어나게 예쁘지도, 노래를 잘 부르지도 않아서 꿈을 접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가 연예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대하셨다. ‘너 무대 올라가면 내 딸 아니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그냥 꿈을 접었다.”
-새누리당 밴드 만든다는 얘기가 나온다.
“박창식 의원이 지금 밴드 포지션까지 다 만들었다. 나는 보컬만 하면 된다고 하더라.”
좌우명 : 행동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