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와 해모수의 초파일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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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와 해모수의 초파일 인연
  • 환타임스=조성제 舞天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0.05.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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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제의 무교이야기 생생지생<2> 불교의 연등과 무교의 인등의 유래는?
부여의 시조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날이 부처님 오신 날로 정해진 까닭은?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거리에 매달린 연등들이 부처님 오신 날, 즉 사월 초파일이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연등에 관한 기록을 보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연등행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당시는 석가탄신일이 아닌 정월 대보름인 상원(上元)날에 개최되었다. 이는 중국 상원날의 연등회 풍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석가탄신일보다 더 성행하였다.

그러다 고려 태조 왕건이 상원 연등회를 법으로 정착시켜 온 국민이 참여하는 국가적인 축제인 연례불교행사로 만들었다. 즉 온 국민이 참여하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인 정월 대보름인 상원의 풍속과 불교의 의식을 가미한 왕실이 주최하는 행사였다.
 
당시 사월 초파일에는 사찰별로 소규모 연등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다 사월 초파일 연등행사가 왕실 행사인 상원의 연등행사보다 능가하는 사찰의 연등행사로 발전하게 된 시점은 바로 무신집권 시대로 최우(崔祐)가 권력을 잡았을 때부터다.
 
최우는 왕실이 주체가 되는 상원의 연등행사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사월 초파일일 연등행사를 개최하였다. 또한 그 시기에 몽고의 간섭으로 왕실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는 상원 연등행사가 자주 중단되자 점점 더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상원의 연등회는 당연히 고려 왕실과 관련이 있으므로 구습이라 하여 즉시 폐쇄되어 버리고 사월 초파일 연등회만 존속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등의 모양도 용과 봉, 호랑이와 표범, 새, 짐승, 물고기 등의 모양과 마늘, 박, 학, 잉어, 자라, 병, 항아리, 북 모양의 등을 다양했다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연등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을 들어 하나같이 똑같은 모양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축복하는 의미보다는 사찰의 수입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월 초파일은 불교의 교조(敎祖) 석가모니께서 B.C 623년 중인도 히말라야 남쪽 기슭 가비라성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아래에서 성주 정반왕과 왕비 마야 사이에  태어난 날이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천성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 한다.

석가모니의 처음 이름은 싯달다, 생후 7일째 어머니와 사별하고 이모 손에서 자랐으며, 장성하여 선각왕의 딸 야수다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그 후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보고 29세 때 출가하여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배움을 얻고 35세에 정각하여 부처(佛陀, Buddha, 깨달은 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녹야원에서 사성제(四聖)를 비롯한 삼법인설, 팔정도, 십이인연 등의 설법을 설한 뒤 45년간 인도 각지를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였다.

그 후 석가모니는 B.C 544년 2월 15일 80세의 나이로 구시나라의 바라쌍수 아래에서 입적하였다.

불교는 석가모니가 입적한 후 916년이 지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의 전진(前秦)으로부터 순도가 불상과 경전을 가져오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특히 삼국 중 신라는 불교를 배척하는 세력들이 강하여 이차돈이라는 순교자를 내기도 하였다.

그 후 불교는 국교가 되어 우리 민족 종교인 무교를 대신하며 그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면서 많은 발전을 하여왔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많은 사찰을 비롯한 무교인 집에도 등불을 밝힌다. <설일체 유부경전>의 기록에 보면 불교에서 이 날 등불을 밝히는 것은 아사세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동참한 모든 불제자들이 기름등을 켜서 법회자리를 밝힌대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각 사찰마다 등불을 밝히는 뜻은 화엄경을 보면 “믿음을 심지 삼고, 자비를 기름으로 삼아 생각을 그릇으로 하고 공독의 빛으로 하여 삼독(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없앤다.” 라고 하였다.

또 대열반경에는 “중생은 번뇌의 어두움 때문에 지혜를 잃는데 비해, 여래는 방편으로 지혜의 등을 켜니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든 중생의 번뇌와 삼독으로 인해 불성보배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곧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시어 중생들이 지혜로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하여 주신 것이라 한다.

불교는 많은 사상과 문화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으며 지금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4월 8일에 대하여, 또 연등에 대하여 우리 무교및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번 살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나라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는 태국(음4월 15일)과 경론에 기록된 2월 8일, 또 1956년 네팔 카투만두에서 열린 제 4차 불교대회에서 정한 5월 15일 등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부처님 오신 날을 음력 4월 8일로 정했을까?

어떤 날을 정하여 부처님 탄신을 축복하던 상관없는 일이지만 4월 8일은 우리 민족에게 뜻 깊은 날이기에 하는 말이다.

<고구려국 본기 제 6편>을 보면 고구려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으며 <조대기>에선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 일찍이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 시조라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管境)이 교화 되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 오심은 임술년(B.C 239년) 4월 초 여드레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4월 초 여드레는 부여의 시조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날로써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오면서 고구려 왕족의 선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날을 부처님 탄신 날로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부처님 탄신일에 밝히는 연등 역시 우리 무교의 인등(因燈)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이유로 우리 무교의 조왕신을 들 수가 있는데 조왕신은 한인천제의 대리자로써 조왕신에게 제사할 때는 당반(鐺飯:속칭 노구메)을 사용하였으며 장등(長燈)으로 불을 밝혔다. 이것을 인등(因燈)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인등(因燈)은 신등을 말하는데 즉 한인천제(桓因天帝)의 등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도 인등(因燈)이라 하여 사찰이나 무당 집에서 많이 밝히고 있다. 또 사월 초파일에는 특별히 연등이라 하여 사찰이나 무당 집에서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 연등을 밝히는 이유를 앞에서 설명을 하였지만 우리 무교에서 연등 혹은 인등 불을 밝히는 진정한 뜻은 한인천제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한인천제에게 바치는 불인 것이다. 등불을 밝힘으로써 한인천제의 높은 덕과 사상을 널리 기린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불교는 민중들에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하여 민족종교인 무교의 많은 부분들을 인용하였고 무교와 더불어 흥망을 같이 하며 오랜 세월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무교는 생생지생(生生之生)의 큰 뜻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무교의 일부분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관세음보살 등 여러 불상들을 다른 신명들과 같이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신당에 부처님을 모셨으니 사월 초파일 행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신당에서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는 것을 보면 어딘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조성제 舞天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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