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수는 전국구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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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수는 전국구로 나가야 한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4.2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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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제8대 국회의원 선거와 5·6 파동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가 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의 승리로 끝이 났다. 공화당은 대통령선거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야당에 패배의 후유증을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대통령선거 개표와 결과 발표를 하면서 1971년 5월 1일자로 1971년 5월 25일에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유진산 총재는 제1야당의 당수로서 전국 각 선거구에 공천자 내랴, 공천자들에게 지원할 정치자금 만들랴, 각 지역에 지원유세 나가랴 정신없이 바빴다. 유 총재가 노구를 이끌고 체력도 보강하며 시간도 돈도 만들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영등포 갑 지역에 지역구후보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마침 공화당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장덕진 씨가 영등포 갑구 조직책으로 나와 있어 유진산 당수는 지역구를 포기할 것이라는 둥 유진산 당수와 모종의 묵계가 있어서 나왔을 것이라는 둥 별별 이상한 모략적인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     © 시사오늘


 
마침 선거구역에 변경이 생겨 내가 사는 신길동은 영등포 을구로 바뀌어서 나는 자연히 영등포 갑구 조직에서 떨어져 중앙당 일만 하고 있었지만, 영등포 갑구에 속한 당원들과 간부들과는 예나 다름없이 만나며 친하게 지내고 있어 그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유진산 총재가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로 갈 경우 나서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뜻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 경쟁에 뛰어들어 장덕진 씨와 싸워보겠다는 생각을 하며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공천권을 가지고 있는 총재지만 막상 자신의 공천문제는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당의 원로들 중에도 당수는 당연히 전국구로 나가야 한다고 권하는 쪽과 당수가 지역구로 나가 지금까지 퍼지고 있는 헛소문을 잠재워야 한다는 쪽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그러던 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록 마감시간에 쫓긴 전국구 문제를 김대중, 양일동 씨에게 위임했다. 그 두 분이 등록마감일에 가져온 상황을 유진산 총재는『해뜨는 지평선』410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도 아침 일찍부터 내객은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세 차례의 재촉에 10시경이 되어서야 梁·金 양씨가 찾아왔다. 전국구 1번 김대중, 2번 유진산으로 된 명단을 보니 모두 54명이 막연한 순서로 적혀있었고 당 원로인 박순천 여사는 35번째 기록되어 있었다.”
후보등록 마감일에 유진산 총재는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고 영등포 갑구는 고대 학생회장이었고 6·3 세대인 박정훈 씨를 공천해 등록을 마쳤다.
 
그날 저녁 상도동 유진산 총재 댁은 난리가 났다. 그 지역을 노리던 모측 사람을 중심으로 상도동 총재 댁에 몰려와 화분을 내던지고 유리창을 깨는 등 참으로 어수선한 폭력사태로 얼룩졌던 것이다. 이것을 5·6 파동이라고 한다.
원래 양일동 씨가 총재는 당연히 전국구로 나가 당수로서 해야 할 산적한 일을 해야 한다고 권하는 쪽이었고, 김대중 씨도 대통령선거 종반에 기자회견을 통해 “당수는 전국구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 바있다.

『해뜨는 지평선』405쪽을 보면 이에 관한 내용이 있다.
“내가 지역구에서 나 혼자 열심히 뛰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중요하지만, 당수 된 사람의 입장에서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전국의 각 지구당 후보자를 도와서 다수당이 되어야 하겠다는 나의 집념이 더욱 큰 비중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전국구 각색의 걱정들을 함께해야 하고 또한 당무는 당무대로 신경을 써야 했으니 내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뜻에서 “고대 학생회장을 지낸 6·3 세대의 대표로서 박정훈 군을 영등포 갑구에 나가게 하고 나는 전국구로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고 유진산 당수는 밝혔다.
나는 나를 공천하지 않은 것은 섭섭했지만 야당 당수가 지역구에 매이는 것보단 전국구를 택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 5·6 파동으로 유진산 당수는 당수직을 사임하게 되고 당은 한바탕 소용돌이를 치면서 선거는 끝이 났다.

선거가 끝나고 당에서는 5·6 파동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중앙상무위원회를 2~3일간 계속하면서 경위를 따졌다.

“당수를 2번에 넣었다는 것은 납득이 안된다”
 
제7대 대통령선거운동을 할 때의 일이다.
“유권자 여러분, 우리 김대중 선생에게 표를 몰아주어 기필코 당선시켜 국민적 소망인 평화적 정권교체를 꼭 이룩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같은 유진산 총재가 아들 같은 김대중 후보를 앞세우고 이렇게 외치며 돌아다닐 때 모여든 국민은 더 많은 박수와 갈채로 환호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김대중 후보가 이렇게 인사할 때 청중은 또 박수갈채와 환성으로 화답했다.

“아버지 같은 고령의 우리 당수님을 모시고 젊은 내가 대통령후보의 자격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된 것을 무한의 영광으로 여기는 반면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선거운동을 하고 비록 패배는 했지만 전래의 동방예의지국의 예법으로도 그렇고 조직상으로도 당수가 당연히 전국구 1번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김대중 씨가 위임받은 전국구 서열에서 자기를 1번으로 쓰고 당수를 2번에 넣었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김대중 씨가 유진산 총재의 전국구출마를 앞장서서 권하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또 적극적으로 총재를 전국구 1번으로 추천했더라면 야당에도 우리나라 정치에도 민주발전에도 크게 공헌했을 것이라고 한다면 내 생각이 너무 고루하고 평범한 것일까?

전국구 2번 문제에 관하여 당의 조사위원회와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김대중 씨는 그 2번은 당수를 전국구로 공천하자는 뜻이 아니고 당수가 추천할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해명해서 듣는 사람들이 실소를 한일이 있었다. 그나마 2번 추천도 당수 자신의 전국구 추천이 아니고 당수는 지역구로 나가고 다른 사람을 당수가 추천하도록 배려했다는 뜻이니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야박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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