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클럽]친목 모임에서 대표 언론단체로
스크롤 이동 상태바
[관훈클럽]친목 모임에서 대표 언론단체로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3.21 14: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훈토론회, 대통령 후보의 ‘통과의례’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관훈토론회에 참석한 이명박 전 대통령 ⓒ 뉴시스

1987년 ‘1노3김’ 대선후보 관훈 토론회.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후보에게 패널들은 12·12 사태와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캐물었다. 또 김대중 후보에게는 조선일보 논설위원 김대중이 연달아 날카롭고 민감한 질문을 던져 국민들의 흥미를 끌었고, 김종필 후보에게는 5·16 쿠데타, 한일 회담 등에 대한 ‘책임론’을 제기했다. 김영삼 후보에게는 인기 여배우와 전 야당 당수의 딸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당시 TV 토론을 지켜봤던 한 60대 남성은 “나중에 정치 보복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감한 질문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기자들의 비판 정신이 살아있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말했다.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 이 토론회를 주최한 사람들,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거침없이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이 바로 ‘관훈클럽’의 회원들이다.

관훈클럽은 1957년 1월 11일, 18명의 언론인들이 언론 연구와 친목 도모를 위해 창립한 모임이다. 관훈클럽이라는 이름은 창립된 곳이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이라는 이유로 붙여졌다. 6개월 동안 미국에서 선진 언론의 체계와 문화를 접할 기회를 얻었던 젊은 기자들은 귀국 후 ‘한국 언론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자’는 일념으로 관훈클럽을 출범시키고, 매달 한 번씩 모여 공부한 내용을 발표하고 토론을 벌였다. 또 그 성과물을 묶어 회지를 만들었으며, 언론에 관한 전문연구지 <신문연구>를 발간했다. 이런 일을 반복하는 사이, 클럽의 창립 멤버들은 ‘젊은 기자’에서 베테랑 기자가 됐고, 관훈클럽은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단체가 됐다.

위기도 있었다. 자금이 풍부할리 만무했던 ‘기자들의 모임’ 관훈클럽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창립 20주년인 1977년에는 ‘기금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관훈클럽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것은 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도움 덕분이었다. 자신의 동생이자 관훈클럽 창립 멤버였던 정신영 기자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데 대해 항상 안타까움을 품고 있었던 정 전 회장은 1억 원을 쾌척해 관훈클럽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후 관훈클럽은 정 전 회장의 기금으로 ‘신영연구기금’을 설립해 언론인의 저술출판과 해외연수를 지원하고, ‘관훈언론상’을 제정해 공적이 뛰어난 언론인에게 시상했다. 관훈토론회도 활발히 개최, 대통령 후보를 비롯해 추기경, 국회의장, 국무총리, 장관, 감사원장, 정당대표 등 저명인사들의 ‘검증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6·25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7년 ‘햇병아리 기자’들이 만든 작은 모임이 대한민국 언론을 상징하는 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 관훈클럽 사무국이 위치한 한국프레스센터 ⓒ 시사오늘
▲ 한국프레스센터 14층의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사무실 ⓒ 시사오늘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