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YS아들 아닌 정치인 김현철로 살 것”
김현철, "YS아들 아닌 정치인 김현철로 살 것”
  • 정세운·최신형 기자
  • 승인 2010.12.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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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여의연부소장
중앙조사연구소 통해 평민당 제1야당 예측 맞아떨어지자 힘얻어
2008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컴백…19대 총선 거제출마 선언

김현철 여의도 연구소 부소장에게는 ‘문민정부의 황태자’란 비판적 시선이 존재한다. 사실 ‘정치인 김현철’보다는 ‘YS의 아들’로 인식돼 있는 게 사실이다. 따가운 시선 때문이었을까. 김 부소장은 10여년간을 음지에서 생활했다. 2008년 10월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정치판에 다시 들어온 김 부소장은 19대 총선을 앞두고 거제시 출마를 서두르고 있다. ‘공천’과 ‘당선’ 등 아직 갈 길이 멀다.

그가 이런 난관들을 넘어 원내에 진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김 부소장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김 부소장에 대한 인터뷰자료를 찾다 특이한 점이 발견됐다. 김 부소장은 1988년 국내 첫 정치 전문여론조사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든 주인공이다. 과학적 기법을 선거에 연결한 선구자인 셈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대한항공빌딩 사무실에서 김 부소장과 만났다. 김 부소장은 거침없이 자신과 관련된 정치역정을 털어놨다.
 

▲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YS의 아들이 아닌 정치인 김현철로 살고 싶다고 밝혔다 ⓒ시사오늘 권희정

13, 14, 15대 총선출마 모두 불발


-‘김현철=YS아들’이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닙니다. 솔직히 말해 ‘정치인 김현철’로서는 상당히 불이익인 듯싶습니다.

“YS아들이란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버님의 정치역정이 높고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아버님을 빼놓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 자체를 부인하거나 그럴 이유는 없고 자연스럽게 역량을 발휘해야죠.”

-언론을 보면 YS가 김 부소장의 정치행보를 돕기 위해 물밑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버님을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얘깁니다. 부모입장에서야 잘되길 바라겠죠. 하지만 실질적으로 제가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신경을 쓴다든지 하는 건 없습니다.”

김 부소장에게는 원내에 진입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YS로부터 적극적인 출마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김 부소장이 고사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쳤다. 1992년 14대 총선 때는 YS가 대선에 출마하게 되자, 아버지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에 애착을 가졌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민정계인 곽정출 의원에게 돌아갔다.

1996년 15대 총선이 다가오자 김 부소장은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란 책을 내며 출마의지를 다졌다. 당시 신한국당은 경남 거제가 지역구인 김봉조 의원을 경남지사로 보내고 그 자리에 김 부소장을 앉히는 전략을 짰던 것 같다. 하지만 김 의원의 거부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솔직히 13대 총선때 아버님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려고 했는데, 지역구가 부산 사하구인 겁니다. 그곳은 서석재 의원의 지역구예요. 아버님이 무주공산인 곳을 권유했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서 의원 때문에 차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가 아버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적극 권유했던 때입니다.”

-김봉조 전 의원께서는 왜 경남도지사직을 거부했을까요. 요즘 보면 국회의원들이 광역단체 시장이나 도지사에 출마를 하지 못해 안달이잖아요.

“그 분은 민선시장의 파워가 어떻게 전개될지 실감을 못한 것 같습니다. 아버님도 아주 그것을 답답해 하셨어요. 왜 좌천시키는 것으로 생각을 하느냐고 그랬죠. 덕분에 김혁규 전 지사만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김 부소장은 YS가 당시에도 자신의 출마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솔직히 아버님이 당시 대통령이었는데 나섰으면 안 될 일이 없었습니다. 아버님께 ‘저를 양지로 보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NO’였습니다. 저의 출마 얘기가 돌자 언론은 ‘대통령 아들이 출마하면 수도권에서 20석은 잃어버릴 것’이란 보도를 내보냈죠. 이런 것들이 아버님이 결단하는데 큰 몫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정치권을 보면 전부 YS가 발탁했던 사람들이 당 요직에 있습니다. 굳이 김 부소장에게만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섭섭하지는 않습니까.

“솔직히 그간 많이 섭섭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야말로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습니다. 지금은 아주 적극적으로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김 부소장의 정치이력은 사실 길다면 길다. 그는 처음부터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에서 MBA를 취득하고 취직을 하기위해 여러 곳에 원서를 냈다. 하지만 야당총재의 아들이란 이유로 취직길이 막혔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입사원서 부친 성명란에 할아버지 함자와 아버지 함자 하나씩을 따서 ‘김홍삼’이라고 기재했다. 우여곡절 끝에 쌍용증권에 공채로 입사했지만 1987년 대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선거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1987년이 김 부소장의 정치시작인 셈이다. 자연스레 지난 정치이야기로 옮겨갔다.

-87년 선거를 뛰어보니까 당선, 낙선 등이 감지되던가요.

“저는 처음부터 힘들겠구나 생각했어요. 다만 당시 야당을 실질적으로 이끈 분이 아버님이었기 때문에 대권후보가 되는 것은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대중씨는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있다가 들어와 평민당을 급조했죠.”

18년 만에 부활된 대통령직선제 아래에서 치러진 87년 13대 대선의 가장 큰 이슈는 ‘군정이냐, 민정이냐’였다. 군출신인 집권여당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맞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는 김영삼(YS)과 김대중(DJ)이라는 두 대권주자가 있었다. 당시 국민의 염원이라 할 수 있는 ‘군정종식’은 야권단일화가 이뤄지면 가능할 듯 보였다. 박찬종 등은 삭발을 하며 ‘단일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둘은 끝내 야권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아예 통일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자체가 없었다. DJ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딴 살림을 차렸다. 4자필승론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선에 참여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다. 영남에서 노태우와 김영삼이 표를 나눠 갖고, 충청에선 김종필이 표를 독식하면, 호남과 수도권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은 DJ가 당선된다는 논리다. 
 
▲김 소장은 15대 총선에서 개혁공천으로 당시 신한국당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개혁공천으로 15대 총선서 수도권 승리”


-‘군정종식’이 YS의 큰 정치프레임 아닙니까. YS가 후보를 양보할 생각은 안했습니까.

“아버님은 의회민주주의자입니다. 후보는 경선에 의해 선출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이 조금 불리하더라도 동교동쪽에 많은 것을 양보하려고 한 것으로 압니다.”

통일민주당은 56곳의 창당지구당과 36곳의 미창당 지구당으로 나눠져 있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후보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36곳 미창당 지구당 조직책을 만들어야 한다. 상도동측 김동영 의원은 50대 50으로 하자며 18곳씩 동교동과 나눠서 임명하자고 했다. 반면 동교동측 대표였던 이용희 의원은 창당지구당의 지구당위원장 수가 상도동이 많다며 23곳을 달라고 했다.

주장이 엇갈리자 양측 간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나 10월 22일 후보경선을 단판짓기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난 YS는 동교동측 안을 수용해 버렸다. 상도동 내부에서조차 “YS가 후보를 양보했구나”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김 부소장은 이런 YS의 행보를 말하려는 듯싶었다.

-김 부소장이 아버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게 아마도 13대 총선을 앞두고 아닙니까.

“88년 대선 당시 갤럽이 노태우 후보의 지지율 조사를 했는데 나중에 발표하고 나서 정확히 맞았잖아요. 그때 내가 충격을 받았어요. 주먹구구식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여론조사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어 아버님을 측면에서 도왔죠.”

87년 대선이 끝난 뒤 김 부소장은 여론조사를 통한 과학적인 선거에서 졌다고 패인을 분석해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었다. 김 부소장이 만든 중앙조사연구소가 이듬해 총선에서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이때부터 상도동 내부에서 김 부소장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김 부소장은 여론조사의 정확도를 더 높이기 위해 새로운 통계프로그램을 들여오거나 개발하기도 했다.

“당시 통계프로그램은 ‘SPSS’ 밖에 없었습니다. 모집단을 더 크게 할 수 있는 기법을 만들려고 모색했고 그걸 선점 한 거죠.”

-중앙조사연구소를 더 발전시킬 생각은 없었습니까.

“지금 생각을 해보면 참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3당 합당 이후에 연구소를 당에 흡수시켰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여론조사 기관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여론조사뿐 아니라 기획이나 출판 등을 포함한 정치아카데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큰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지금도 정치아카데미를 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명망가들이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전문성을 살리지 못하고 망가집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는 정치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e-정치'를 발전시킨 1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김 부소장께서 너무 저평가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정치에 입문을 아직 하지 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제가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면 양지로 나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된거죠. ‘오페라의 유령’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대 뒤에서만 활동을 했습니다. 공적인 활동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과거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고….”

-음지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님의 그늘이 컸습니다. 저는 그늘에 가려져서 양지에 나오고 싶었지만 나올 수 없었습니다.”

김 부소장은 “아까 어디까지 했지”라고 말을 끊은 뒤 “독재정권시절에는 단일대오를 형성하기위해 보스나 계파정치가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상황도 나아진 게 없다”고 진단했다.

-계파해체에 대해 찬성한다고 보면 되는 겁니까.

“쉽지는 않지만 계파가 현재처럼 진행되면 정치가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보스 한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당은 안 됩니다. 아버님이 정치할 때는 독재정권에 반대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닙니다. 계파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고, 그 계파를 뛰어넘는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렇게 할 사람이 없다면 제가 들어가서 계파와 보스정치를 타파하는데 일조를 할 생각입니다.”

-김 부소장도 원내에 진입하게 되면 옛 민주계 인사들과 인적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정치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결국 김 부소장도 계파정치를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들과 뭉칠 수밖에 없죠. 그렇지만 하나의 계파정치를 만드는 것이 아닌 인적네트워킹의 개념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지금도 쇼셜네트워크(SNS) 등이 활성화 되지 않습니까. 지역과 계파, 정당을 넘어서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5대 총선 때를 보십시오. 여당이 수도권에서 이긴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개혁공천을 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공천을 받았던 인사들을 ‘96학번’이라고 칭했다. 총선이 96년도에 치러졌기 때문이다.

“96학번들이 지금 정치전면에 서있습니다. 당시 공천은 그만큼 개혁적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포함해 이재오 특임장관과 김문수 경기지사 등 한나라당 내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이 김 부소장이 말하는 ‘96학번’, 15대 총선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정치인이다.

“개혁공천을 통해 여당이 수도권에서 승리를 거뒀지요. 이회창씨도 15대 총선을 통해 컴백시켰죠.”

-15대 총선에서 승리를 했지만 이회창씨 영입이 결국 대권패배로 이어진 것 아닙니까.

“그건 (97년)대선으로 넘어가서 그런 건데, 저는 사실 이회창씨를 대권으로 연결 지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97년 15대 대선에서 집권여당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놓고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최형우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김덕룡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이홍구 등 이른바 9룡을 형성하며 각축전을 벌였다.

이들 중 최형우가 가장 많은 대의원의 지지를 받으며 앞서 나갔으나 정치권에선 ‘YS가 최형우를 주저앉히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해 초 최형우는 뇌일혈로 쓰러져 대권후보에서 일탈하게 됐다. 일련의 사건을 알고 있는 필자에게 그냥 넘어가기 힘든 부분이다. 
 

▲김 소장은 97년 대선에서 공정경선을 치렀다면 이수성이 당선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창은 대선이 아닌 총선용”

-97년 신한국당 경선이 공정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아버님이 이회창씨를 대표에 앉히셨죠. 솔직히 그것만 해도 벌써 불공정한 겁니다. 저는 이회창씨를 총선용이라고 생각했지 대선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보문제 등으로 어렵게 됐고 사실 한보사태와 저와는 상관도 없지만, 여론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이회창씨는 예정된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엔 9룡이라고 해서 예비후보들이 많았습니다. 경선만 제대로 됐다면 본선에서 질 수가 없었죠. 당시 분위기가 너무 이회창 씨에게로 흘러갔고, 이 후 이인제씨와 손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걸 놓쳤죠. JP까지 놓치고 역으로 DJP 연합으로 이어져 패배를 자초한 겁니다.”

-최형우 전 장관이 쓰러진 게 YS가 대통령 출마를 막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잘못 알려진 겁니다. 쓰러지기 전 이미 킹메이커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공정 경선을 했다면 최형우 전 장관이 되지 않았을까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15대 총선 때 새로운 주류를 형성했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이재오나 서청원, 이인제 등이 최 전 장관을 지지했었죠.

“최 전 장관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인물로 최 전 장관을 생각한 거죠. 최 전 장관이 당을 맡고 후보는 제3의 인물로 하자는 쪽으로 이뤄져가고 있었습니다.”

-최 전 장관이 뇌일혈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회창씨가 후보로 선출되기 힘들었겠죠.

“아마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회창과 최형우,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게 된 것은 이회창이 94년 문민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한 후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형우와 잦은 언쟁을 주고받으면서 부터다.
주무부처인 내무부와 사전 상의 없이 이회창은 관변단체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다 최기선 인천시장과 박태권 충남지사가 도내시장·군수를 모아놓고 ‘고향의 밤’ 행사를 연 것과 관련해 야당이 항의를 해오자 최형우는 “통상적인 업무행위”라며 최기선과 박태권의 편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이회창은 “사전선거운동으로 오해받을 행위를 하지 말라”며 야당 손을 들어줬다.

-YS가 당시 ‘이인제’를 지지했다는 얘기도 돌았습니다.

“이회창씨가 이미 후보가 됐기 때문에 이 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이인제를 주저앉히려고 했습니다. 이회창씨를 불러 ‘이인제를 잡아야 승산있다’고까지 했는데 이회창씨가 이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김 부소장께서는 당시 누구를 지지했습니까. ‘이홍구’라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이 아닙니다. 대권주자는 경쟁체제로 경선을 치러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정경선을 치렀다면 누가 됐을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수성’이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봅니다. 인품도 좋고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JP도 민주당 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거고…, 역사는 바꿔졌을 겁니다.”
 
▲김현철은 여론에 밀려 조세포탈죄라는 죄명을 만들어 구속됐다
당시 대선경선을 앞두고 ‘김현철’은 이홍구를 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면서 한보사태가 터졌다. 물론 한보배후로 야당은 김현철을 지목했고, 여론재판을 받아 ‘마녀사냥’식으로 구속됐다.

“한보와 저는 검찰조사에서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났지만, 아직까지도 한보의 ‘몸통’인 것으로 잘못 인식돼 있습니다. 여기서 법리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를 구속시키기 위해 ‘조세포탈죄’라는 죄명을 만든 것 아닙니까.”

당시 변호를 맡았던 여상규 변호사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김현철을 변호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변호사로서 기소장만 봐도 이 사건은 명백히 무죄라 확신한다. 표적수사고 짜 맞추기 수사의 전형이다. 법리해석을 잘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한보문제가 불거졌을 때 청와대에서 ‘구속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조세포탈혐의가 적용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분명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검찰조사를 받으러가기 전 아버님이 전화로 ‘난 아무 힘이 없다. 잘 다녀오라’고 말했고 내가 갔다 와서 인사드리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죄를 찾지 못하자 대선잔금을 가지고 조세포탈 혐의를 씌운 겁니다.”

“박근혜 대세론은 거품”

-한나라당 18대 대선후보 경선이 올바르게 치러질까요. 지금까지는 ‘박근혜 대세론’이 우위인 것 같습니다.

“언론 등에서 대권주자 1위로 박 전 대표를 부각시키기는 하지만 거품이 많다고 봅니다. 가장 큰 핸디캡은 세종시 문제로 수도권 지역의 유권자들한테 표를 잃었다는 겁니다. 현실정치를 논하자면 이렇습니다. 대구경북(TK)과 부산경남(PK)이 한목소리를 내면 아직도 필승구도입니다. 하지만  PK민심이 박 전 대표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충청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충북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충남은 민주당에 가깝습니다. 자유선진당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정확히 말해 충청권 전체로 보면 민주당에 가깝습니다.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은 30%가 나오지만 실제로는 20%로 보는 게 맞습니다.”

-‘박근혜 대세론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됩니까.

“이회창 대세론만큼 이나 박근혜 대세론도 흔들릴 수 있다고 봅니다. 박근혜 지지율도 공고하지 못합니다. 다음 대선에서는 여야가 45% 대 45%의 지지율을 가져간다고 보면 됩니다. 나머지 중도 10%가 중요합니다. 6·2지방선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한나라당의 평상시 지지율이 40%가 됩니다. 민주당이 20~25%입니다. 실제 개표결과 민주당은 한 10%가 업(UP)됐는데, 한나라당은 그대롭니다. 평상시는 20% 차이가 나는데, 선거만 하면 근접합니다. 결국 10%를 누가 가져가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것으로 봅니다.”

-박근혜 대항마로 김문수 경기지사가 뜨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분도 대항마 중에 한 명이지만 득표의 확장성에 있어 약간 의문이 듭니다. 손학규 대표가 야권주자로 나온다면 이미지나 색깔이 일정부분 겹쳐 수도권에서 힘겨운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박근혜 대항마로 누가 좋다고 생각합니까.

“박 전 대표를 위해서라도 많은 후보들이 나와 경쟁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지난번 총리를 지낸 정운찬이든, 지금 김황식 총리는 대권후보로 보기는 어렵지만, 박세일 전 의원의 경우도 괜찮다고 봅니다.”

-폭발력이 있을까요. 대선을 치르려면 외곽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폭발력은 만들어 지는 겁니다. 본인도 한반도선진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박 교수의 경우 지난 17대 때 국회에 진출해 정책위의장을 역임했고, 당시 수도분할을 두고 ‘한나라당이 취할 포지션이 아니다’라며 의원직을 벗어던져버렸습니다. 아마 정책에 반대해 옷을 벗은 정치인 1호일 겁니다.”

-19대 총선이 대선의 가늠자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친이 중심으로 공천권이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고 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친이가 공천권을 독점한다고 하면 분당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위험한 얘기입니다. 분당하면 안 됩니다.”

김 부소장은 “2008년 18대 총선 공천하듯 무식한 방법으로는 못할 것이고, 아마도 친박을 포용하는 쪽으로 공천권이 행사될 것”이라며 “분당을 해서 나가는 쪽은 무조건 망한다”고 진단했다. 김 부소장은 ‘손학규’를 가장 경쟁력이 큰 야권후보로 꼽았다.

“한나라당 지지자 중 A후보를 지지하는 쪽과 B후보를 지지하는 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7년 대선 경선 당시)이명박 후보가 싫었는데, 다른 정당 후보를 찍겠다는 의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묘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A가 후보로 경선에서 선출되면 다른 당 후보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야당의 후보로 누가 나오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많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손학규 대표의 경우 골수 민주당 인사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까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거부 정서가 적은 편입니다. 자기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될 경우, 그 표가 손 대표에게 갈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손 대표가 민주동지회에 잘 나오다가 민주당 쪽으로 간 이후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건가요.

“저는 손 대표가 편협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도동에 인사를 오겠다고 하면서 아직까지 오지도 않고 있습니다. 손 대표가 인위적으로 민주당 색채를 만들려다보면 아무것도 얻는 게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과 같은 스탠스는 답답합니다.”

김 부소장은 그러면서 ‘토끼이론’을 내세웠다. 집토끼는 보수고 산토끼는 진보라고 가정했을 때 들도끼가 중도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집토끼의 표를 얻어 당선된 MB정부가 들토끼를 잡으려고 헤매다가 집토끼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기 컬러가 있어야 하는데 한나라당은 그게 없습니다. 무슨 수식어가 그리 많은지…, ‘중도개혁보수’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실체가 없는 들토끼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집토끼까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19대 총선에서 거제에 출마할 생각이라고 김 소장은 전했다

“1988년과 2000년 두 차례나 납치당할 뻔”


-거제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공천이 전제된다는 가정하에서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정당정치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19대 총선 때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출마할 겁니다. 공천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 부소장은 “솔직히 공천을 받지 못하면 무소속 출마도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부터 무소속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왜 거제입니까. YS의 생가 때문인가요.

“부산이나 수도권 출마를 권유받기도 합니다. 예전의 거제가 아닙니다. 외지인들이 한 70%고 토박이가 30%에 불과합니다. 그런 면에서 상징성만 있지, 유리한 점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선조대대로 살아왔고 아버님 고향이고 생가가 거기에 있고 제 본적지가 거제입니다. 출마가 늦었기 때문에 거제에서 나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김 부소장은 거제출마를 여러번 시도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2002년부터 거제시에 살았다. 아파트도 얻고 연구소도 세우고 표심을 얻기 위해 분주히 뛰었다. 그는 아마도 19대 총선에 출마하게 된다면 이 같은 활동이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천을 받지 못할 가능성은 없나요.

“100%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공천 받을 거라고 봅니다.”

-당헌당규 문제는 해결됐습니까.

“2008년 총선 당시 당헌당규가 잘못된 거죠. 이한구 의원이 발의한 건데, 그 전 재보선에서 참패를 했거든요. 그때는 야당이어서 강력한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빠른 질문이 될 수 있는데, 원내에 들어가면 가장 하고 싶은 입법이나 정책이 무엇입니까.

“계파정치와 지역정치 등은 금권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타파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제가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2009년 10월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김 전 대통령이 “김대중이 1년 6개월 동안 뒷조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DJ 정부의 탄압이 심했나요.

“민주계 출신들이 많이 구속됐어요, 누가 봐도 민주계 탄압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부소장께서도 불이익을 당하셨나요.

“98년에 등산을 하려고 구기동 파출소 근처를 지나다가 납치를 당할 뻔했습니다. 경찰복장을 한 사람이 차를 세워서 기사한테 ‘지명수배 돼 있다’면서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순식간에 차에서 기사를 끌어내리고 두 세명이 합세해 내차로 나를 납치한 겁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전기충격기, TNT 탄약을 비롯해 각종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에 잡혔는데, 그 사람 하는 말이 ‘홍인길 전 수석에게 앙심을 품고 한 거고 나머지는 내가 다 고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홍 전 수석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이 왜 나를 납치합니까.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피고용자들은 전직경찰, 공수부대 출신 등이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DJ가 승리하자 ‘DJ비자금’과 관련해 ‘김현철’이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인해 여러 차례 압박을 가해왔다고 김 부소장은 믿고 있었다.

 “2000년 10월 미국에서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까지 태워다주고 집에 들어오는데 누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한 10여명이 됐습니다. 무작정 자료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아버님이 그 사실을 알고 민주계 인사를 불러다 모으곤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내가 미국에서 ‘DJ 비자금’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후에 이성헌 의원에게 전해들었습니다.”

-DJ 비자금과 관련한 자료는 갖고 있습니까.

“없습니다.(웃음)”

-DJ자서전에 보면 YS에 대한 잘못된 얘기들이 있습니다. 가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DJ가 사면복권되면 후보를 양보하겠다고 YS가 약속을 했는데 지키지 않았다’고 서술돼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대응하지 않으면 역사로 굳어질 수도 있는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금 동교동계와 화해를 하고 있는 시점에 자극적인 말을 해 화해무드를 깰 필요가 없습니다. 또 DJ가 고인이 된 상태여서 대응키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여야를 떠나서 YS가 영입한 사람들이 대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DJ에 비해 YS문하생들이 많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차이는 문지방 높이라고 봅니다. 상동동계는 자유분방해 정치지망생을 포함해 누구든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반면 동도동계는 좀 경직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하질서도 엄격하고….”

-YS가 전 재산을 기부한다고 하는데, 서운하지 않습니까.

“서운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아버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따라야죠. 그 재산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평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완성의 뜻을 그렇게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상도동측 김기수 비서실장은 지난 3일 “YS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키로 했다. YS 집과 거제도 땅 등은 김영삼 민주센터에, YS의 증조부가 세웠던 신명교회와 교회토지는 그 교회 장로회에, 거제생가는 거제시에 기부를 하거나 이미 끝난 상태”라고 밝혔다. YS의 재산은 상도동 집을 포함해 약 50억원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YS, DJ는 한국정치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치인 김현철은 이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두 분은 동지도 됐다가 적도 됐다가 하는 애증의 관계죠. YS는 의회민주주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 분입니다. 정당발전을 위해 노력하신 분도 아버님이고, 의회라는 틀 속에서 정치를 했습니다. 반면 DJ는 장내에 있었던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원내 활동이 짧습니다. 물론 DJ의 경우 납치사건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활동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분을 인도의 네루와 간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간디는 선각자였고 네루는 간디의 정치적인 제자였다.

네루는 정치인이고 의회민주주의자였습니다. 지도자는 국민들의 눈높이를 맞춰가면서 반보 앞서가야 합니다. 한 발 앞서가면 혁명가가 되기 쉽습니다. 바로 의회라는 틀을 지켜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두 분은 성격이 너무 다릅니다. 아버님은 감각적으로 정치를 하고 정치적인 센스가 뛰어납니다. 정치적인 결단을 내릴 때 그 누구보다도 판단력이 뛰어납니다. DJ는 논리적입니다.”
 
▲김현철은 YS와 DJ를 네루와 간디에 비교해 설명했다

“YS와 DJ는 네루와 간디”


-YS가 2012년 대선 때 특정 후보를 지지할 거라고 봅니까.

“아버님은 다음 선거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박 전 대표가 불리하지 않을까요. YS가 박 전 대표를 지지할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데요.

“아버님이 초창기에 박 전 대표를 좋게 생각했습니다. ‘전화문제’로 섭섭한 게 있었고, 세종시 문제도 그렇고….”

2006년 5월31일 박근혜 전 대표가 유세도중 ‘면도날테러’를 당하자 YS가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병문안을 했다. 얼마 후  박 전 대표는 YS에게 전화를 해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답하면서 말미에 ‘오늘 전화드린 것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했다. YS가 이에 상당히 불쾌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 부소장이 말하는 ‘전화문제’는 이를 말하는 듯싶었다.

-참여정부 시절 수도이전이나 세종시 등의 목적은 국토의 균형발전입니다. 둘 다 반대를 하는데 그럼 지나친 수도권 집중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적 대안이 있습니까.

“지금은 세계화, 지방화가 같이 가고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중앙정부를 거치지 않고 다른 나라와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균형발전이라는 게 지방의 재정자립도가 너무나 취약하기 때문에 한 번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행정구역개편 등이 같이 따라가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대 선거마다 시대정신이 있었습니다. 97년에는 수평적 정권교체, 2002년은 세대교체, 2007년은 경제살리기라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2012년에 새로운 시대적 화두는 어떤 게 될 거라고 보십니까.

“‘통합과 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통합과 협력의 축이 같이 가지 않으면 세계 주류로 갈 수 없습니다. 통합과 협력이라는 것은 한국사회의 지역, 빈부, 계층 간의 갈등구조를 일치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간단한 질문 몇 가지 하고 끝내겠습니다. 산행을 즐기는 것으로 압니다.

“북한산을 주로 갑니다. 매주 가지는 못하지만 자주 갑니다. 산행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산과 권력의 속성은 비슷합니다. 아무리 빨리 올라가도 언젠가는 내려옵니다. 권력의 속성처럼.”

-문민정부 당시 실세 소리를 들으면서도 차는 소나타를 타고 다녀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집안사람들이 그런 것에 무딥니다.”

-상도동 정치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까.

“김동영 전 장관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친척인줄 알았습니다. 세뱃돈을 주시던 게 기억이 납니다. 커가면서부터 최형우 전 장관도 기억에 남습니다.”

-소망교회에서 결혼했는데, MB정부에서 논란이 됐던 그 소망교회입니까.

“맞습니다. 당시 와이프가 소망교회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김 부소장은 자신이 쓴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이란 책에 사인을 해 필자에게 선물했다. 97년 ‘국정을 주물렀다’는 국민의 따가운 눈총 속에 10년이 넘게 음지에서 생활해야 했던 김현철. 19대 총선출마가 그에게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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