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20억 지원 인연 돼 비서실장 된 것 아냐”
“불 켜진 아현동? 비서실장 된 후 실제 그래”
“구로을 출마 못한 것 동교동계 견제 때문”
“盧 지원설은 박지원 공작, 피해자는 이인제”
“16대 경선 이인제와 만나 사퇴하기로 합의”
“YS 악연, 박철언계 오해받아 사무총장 낙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윤진석·김자영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아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
시대산책 |김중권 편
- 노태우 ‘9‧18 결단’의 이유
- DJ에 20억 원 전달한 과정
-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배경
- 국민의정부 초대 비서실장
- 밤새 불 켜진 아현동 자택
- 포스트 DJ로 김중권 주목
- 16대 경선 중도사퇴 이유
- DJ와 달리 YS 악연, 왜?
1939년 경북 울진, 고려대 법대, 서울대 사법대학원 졸업, 감리교 신학대학 석사, 사법고시 합력, 공군 법무관, 서울고등법원 판사, 11‧12‧13대 국회의원, 국회법제사법위원장, 대통령정무수석, 단국대 대학원 교수, 일본 동경대 법학부 객원교수, 대통령비서실장,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세계대학생 평화봉사단 총재, 변호사, 대만 명전대학 종신명예교수 |
故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바랐던 포스트 DJ는 김중권?
16대 대선에서 포스트 DJ는 노무현에게 돌아갔다.
김중권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이하 김중권) 왜 바통을 이어받지 못했을까.
이런 물음을 던져본다.
DJ를 두고 화합의 정치인이라고들 한다.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민정계 TK(대구‧경북)출신이자 노태우 정부 인사인 김중권을 초대비서실장으로 발탁한 일이다.
DJ 초대 비서실장
김중권은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고려대 법대 졸업 후 서울고법 판사로 재직했다. 민정당 간판으로 11‧12‧1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뒤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다.
민정계 출신이다. 이런 그가 DJ 사람이 된 것이다.
동교동계도 놀라고 세상도 놀랄 일이었다.
그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결정적인 이유가 궁금했다. 세간에는 1992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 지시로 20억 원을 DJ한테 전달해준 것이 인연이 돼 훗날 비서실장까지 오르게 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어왔다.
-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1월 24일 마포구 소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이 점을 물었다.
“아닙니다.”
김중권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닐 때는 아니라고 곧장 받아쳤다. 과거에는 황소처럼 두툼하고 단단한 몸집의 네모진 풍채를 지녔다. 지금은 많이 말라 있다. 정치인 인상보다 학자나 성직자 분위기가 풍겼다. 여든이 넘은 나이다. 건강 비결을 물으니 골프를 잘 쳤다고 한다.
- 그러니까 제 말은 20억 원을 전달한 것이 인연이 돼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DJ를 돕게 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또, 그것을 계기로 국민의정부 초대 비서실장까지 임명됐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전혀.”
단호하면서도 조곤조곤한 어조로 다시금 반박해왔다.
- 그럼 뭡니까.
“그전에 20억 원을 왜 DJ한테 전달했는지부터 설명해야겠소.”
김중권은 이리 말하며 노태우 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때는 19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YS는 끊임없이 청와대를 공격했어요. 노태우 대통령 얘기만 나오면 ‘군 출신’이라며 차별화를 뒀습니다. ‘공정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관권선거를 없애고 중립내각이 필요하다고 떠든 겁니다. 자기는 당당한 모습으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지요.”
- 이길 자신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그때는 이미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김중권도 수긍했다.
“저쪽에는 DJ와 정주영이 나오니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들었겠지요. 멋지게 이기고 싶었던 겁니다.”
노태우 9‧18 선언
어느 날이었다.
여기부턴 김중권 증언을 토대로 풀어써본다.
#노태우의 9.18선언
하루는 대통령(노태우)이 불렀다.
“김 수석 빨리 와보세요.”
“네 각하.”
대통령실에 들어갔다.
“김 대표(YS)가 계속 중립선거내각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셔야 됩니다. 미루면 대통령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김중권은 직언했다. 노태우도 결심이 선 듯 눈빛을 빛냈다. 하루 이틀 지나고, 주례회동이 개최됐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 간 회동이었다. 노태우와 YS가 마주했다.
“당적을 정리하고, 중립선거내각을 구성하겠습니다.”
노태우가 말했다.
“찬성입니다.”
YS가 단박에 반겨했다.
“김 수석 들어오세요.”
이야기를 마쳤는지 노태우가 김중권을 불렀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노태우와 YS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9월 18일, 노태우는 민자당 당적을 정리하고, 관권선거의 폐단을 막고자 공명선거에 필요한 중립내각을 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9‧18 결단’이었다.
“나는 선거문화의 일대 혁신을 이뤄 고질적인 논쟁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 우리 정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확신합니다. 이번 결단은 대선을 맞이해 중립선거내각 구성제의 이득을 통해 공명선거의 의지를 천명해온 김영삼 총재를 비롯한 민자당의 신념과도 일치할 것으로 나는 믿습니다.”
- 노태우, 9‧18선언 관련 발언 중-
노태우는 10월 초 탈당계를 제출하기 위해 민자당을 공식 방문했다. 중립내각 구성을 위해 총리부터 내무장관, 정무장관, 안기부장 등을 새로 교체했다. 야당으로부터도 환영 세례를 받는 일이었다.
반면에 민자당 탈당 소식이 전해지자 당에서는 난리가 났다. ‘노태우 본인만 살려고 하느냐.’ 이런 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중권으로서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는 민자당의 YS, 평민당의 DJ,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이상 3당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오찬을 하면서 중립내각 구성의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DJ가 일어나며 “민주주의 청사에 길이 빛날 하나의 역사적인 결단을 하신 겁니다”라면서 치켜세웠다.
노태우는 금세 흡족해졌다. 얼마 안 있어 김중권을 방으로 불렀다.
# 김중권, 20억 전달
“김 수석이 김 총재(DJ) 좀 만나고 오면 좋겠어요.”
무슨 일일까. 김중권이 귀를 쫑긋했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야당이니 힘들 거 아니요. 조금 도와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정치자금법이 없을 때였다.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김중권도 맞장구쳤다.
“저녁에 다녀오세요.”
“예.”
김중권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얼마 안 있어 누군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왔습니까.”
“경호실에서 왔습니다.”
경호실 처장이었다.
“이걸 가지고 가라는 오더를 받았습니다.”
그는 와이셔츠용 선물 상자를 내려놓았다. 리본도 달리고 포장도 돼 있었다. 대번 뭐가 들어있을지 알 수 있었다.
‘대통령 자금을 경호실에서 관리하는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이렇게 순진하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알겠습니다. 두고 가세요.” 무덤덤하니 말했다. 이윽고 그날 저녁 야당 담당인 제3비서관(윤형규)을 데리고 DJ 있는 곳으로 향했다. DJ는 동교동 자택이 아닌 목동 처제 집에 있었다.
“대통령님이 총재께 드리라는 선물이 있습니다.”
가지고 온 선물 박스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DJ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모릅니다.”
“나는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심부름 온 사람인데 이것도 안 받으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앓는 소리부터 했다.
“총재님께서 며칠 전 대통령과 회동하셨을 때 9‧18 결단에 대해 높이 평가하시지 않았습니까. 대통령께서 많은 감명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부디 정표로 생각해 주십시오.”
김중권이 간곡히 청했다. DJ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이 섰는지 벨을 눌러 비서를 불렀다.
‘둘만 알아야 할 일을 제3자까지….’
김중권은 내심 당황했다. 곧바로 비서가 왔다.
“이 상자를 풀어보게.”
비서가 그 즉시 풀어 보이자 상자 가득 수표가 보였다. 세어 보니 100만 원짜리 수표 묶음 20다발이었다.
DJ 폭로, 왜?
“그 돈을 전달한 장본인이 나입니다.”
일을 소상히 전하던 김중권이 빙그레 웃었다. 살짝 흥분하면서 무용담을 전하듯 눈을 빛냈다.
“하루는 권노갑(DJ 오른팔, 비서실장) 씨를 사우나에서 만난 겁니다. 권 씨가 내 귀에 대고 ‘20억 원 준 것 고맙소’라고 하대요. 내가 또 얼마나 당황했겠소.”
-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시인도 부인도 안 하고 모른 척해버렸지.”
껄껄걸 웃었다.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는 비밀로 보고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허참….”
- 그런데 본인 입으로 말했잖습니까.
본인은 DJ를 말했다.
때는 3년이 지났을 무렵.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 비자금 수사’가 일파만파 커지고 있었다.
그날 DJ는 중국을 방문하던 중 기자들 앞에서 “지난 14대 대선 기간 노 대통령으로부터 모 비서관을 통해 20억 원을 받았다”며 “여야 대통령 후보들 모두에게 돈을 돌렸다고 생각해 위로금 조로 받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당시 김영삼 후보도 수천억 원을 받았다는 유력한 정보가 있으니 노 전 대통령은 이 점에 대해 사실을 명백히 밝히라”며 역으로 촉구했다. (훗날 알려진 것이지만 민자당은 선거 자금으로 3000억 원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박철언 전 정무장관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YS가 3당 합당 전후로 선거자금 4000억 원을 받았다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DJ는 왜 공개했을까. 그의 회고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0월 초에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 원이 시중은행에 차명으로 분산 예치돼 있다며 모 은행의 예금 계좌 조회표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나돌던 비자금설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깜짝 놀랐다. 즉시 검찰은 조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얼마 뒤 여당에서 비자금 중 일부가 나에게도 흘러 들어갔을 거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나는 중국 방문 중에 이 뉴스를 들었다. 사실 나는 14대 대선 즈음에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격려금을 받은 일이 있었다. (중략) 이것이 논란이 된 이상 나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선거에 임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공개했다.”
- DJ 회고록 중
즉, 더 큰 파장을 조기 차단하고자 빠른 시인에 나선 것이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노태우가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한 날이었다. DJ 폭로는 노태우 기자회견에 찬물을 끼얹는 일과도 같았다.
세상도 깜짝 놀랐고, 김중권도 놀랐다. 그는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오던 때를 상기했다.
# 기자들에 둘러싸인 김중권
“돈을 전달한 분이 맞습니까.”
기자들이 추궁해댔다. 다들 김중권으로 추정하는 눈치였다.
“나한테 왜 그럽니까.”
김중권이 시침을 뗐다.
“지금 총재가 청와대에 있는 모 비서관을 통해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상황입니다.”
“정확한 워딩이 뭡니까.”
“모 비서관 통해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둘러댄담.’
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그 순간 묘수 하나가 떠올랐다.
“이봐요. 내가 비서관입니까?”
기자들을 향해 반문했다.
“그 비서관이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수석비서관입니다.”
거기까지만 하고 더는 질문을 받지 않았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엉뚱하게도 DJ 폭로로 비밀이 밝혀졌다는 후일담이었다.
-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20억+알파’ 지원설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강삼재 총장(민자당 사무총장)이 제기한 것 말이요? 대통령이 20억 원만 줬겠느냐. 더 큰 게 있을 거다. 이러면서….”
- 네.
“사실이 아니에요.”
김중권은 “‘알파는 없다’고 했다”고 잘라 말했다.
국민회의 입당
- 암튼 그것이 인연이 돼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DJ 대선 전략 자문회의 의장을 했던 것이고요.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DJ와의 인연은 20억 원 지원 때가 아니에요.”
정정이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13대 국회에서 법사위원장을 한 적이 있어요. 날치기 정국임에도 나는 여야 간 충분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표결에 부쳤어요. 야당 인사인 김충재 의원 등은 위원장인 내가 의사봉을 칠까 봐 법사위원장실을 포위하고 따라다녔어요. 하지만 나는 끝까지 단 한 건도 날치기하지 않았어요. 이후 DJ가 그러더라고. ‘당신, 그때 다시 봤다.’ 혀를 내두르는 겁니다. 그게 DJ와 나와의 첫 번째 인연이었어요.”
- 국민회의 입당은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나는 원래 권영우 의원과 가까워서 그가 설립한 세명대학교 총장으로 갈 예정이었어요. 근데 DJ가 내게 직접 전화를 한 거예요.”
97년 12월경이었다. 서교호텔에서 만났다. DJ를 보좌하는 유재건 비서실장이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DJ가 선거를 도와달라는 거예요.”
-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저는 벌써 돕고 있습니다’라고 했지요.”
그때 김중권은 YS 국정 운영을 지보면서 몹시 실망하던 차였다. 그는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 다음 대통령은 DJ”라고 생각했다.
김중권의 생각을 읽은 DJ는 국민회의 입당을 재차 권유했다.
-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처음엔 거절했어요. 영남 정치인인 내가 호남과 연결된 당에 가면 그날로 죽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형선고와도 같았지. 정치를 안 할 것도 아니고 경상도에서 민주당 간판 가지고 당선될 수도 없고 말이에요. 그날로 나는 끝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DJ가 계속 설득해오더라고.”
그래서 입당을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 이후 대선캠프에서 전략자문회의 의장을 맡았지요?
“네.”
고개를 끄덕였다.
“DJ가 내게 무게를 실어주더라고.”
DJ는 김중권에 대선 전략자문회의 의장을, 이종찬한테는 기획위원장을 맡겼다. 회의실은 서교호텔 14층에 마련됐다. 이해찬, 정동영, 박상천, 김근태 등 쟁쟁한 멤버들이 참여했다.
- 어떻게 조율은 잘 됐습니까.
“야당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데 컨트롤이 됐겠소?(웃음).”
김중권이 피식 웃었다. 여당 입장에서 그는 굴러온 돌이었다. 텃새가 왜 없었을까.
-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DJ가 그걸(고충) 읽었던 것 같아. 전략자문회의를 주로 밤에 하는데 말이요. 회의하는 중간에 DJ로부터 가끔 전화가 오는 거예요.”
- 힘을 실어주려고요?
“그렇지. 명석한 두뇌를 가진 분 아니오. 통화하면 별말씀도 없으면서 전화를 해오는 거예요. 총재와의 대화니 다른 사람들이 긴장하지 않겠소. 그렇게 힘을 실어주시더라고.”
다시 생각해도 으쓱한 기분인 듯했다.
불 켜진 아현동
- 대통령 당선자 초대 비서실장은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원래 나는 대선만 돕고 대학(세명대 총장)에 복귀할 예정이었어요. 근데 선거가 끝난 다음날 전화가 오더라고.”
이번 역시 DJ가 직접 전화를 해왔다.
“내가 축하드린다고 하자, 한 번 만나자는 거예요. 12월 19일인가 만났던 것 같아요.”
만난 장소는 동교동 DJ 자택. 처음 집에 간 거였는데 인산인해였다. DJ는 김중권을 따로 만난 자리에서 새 정부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 깜짝 놀랐겠습니다.
“그럼요.”
-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내 첫마디였어요. 비서실장은 대통령 눈빛만 봐도 어떤 의중인지를 알아차려야 하는 자리 아니오. 나는 민주당이 뿌리도 아니고, 가신도 아니잖아요. 겨우 한두 달 같이 일을 해 본 건데 그런 내가 한다는 게 어불성설처럼 느껴지더라고요.”
DJ의 설득은 며칠간에 걸쳐 계속됐다. 정치생활하면서 국민분열, 지역분열로 고민이 많았다며 국민통합, 영호남 화합을 이루는 것이 숙원이라고 했다. 호남 출신 대통령과 영남 출신 비서실장이 조합을 이뤄보자며 강권해왔다. 또, 믿을만한 사람 중 청와대 경험을 가진 사람이 김중권 밖에 없다는 점도 발탁의 이유라고 말해줬다. 근래 만나본 인사 중 김중권만큼 정확하고 우수한 인물이 없다고도 했다.
DJ는 25일 크리스마스에 김중권을 불렀다. 부부가 같이 갔다. DJ는 김중권을 2층 서재로 데려갔다.
“내일 발표하겠소.”
그 말에 더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DJ는 다섯 명의 비서진 명단이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장성민·박금옥·이강래·고재방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동교동계 가신 그룹은 제외돼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최 모 특보도 명단에 포함돼 있었지만 검증 과정에서 제외했다.
김중권은 “나는 대통령이 하라고 해서 분부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오” 라면서 이 점을 강조했다.
- 비서실장에 내정된 뒤 ‘불 꺼진 아현동(김중권 자택)이 24시간 밝아졌다’는 얘기를 신문 기사를 통해 본 기억이 얼핏 납니다. ‘꺼진 권력’이 되살아나니 사람들로 북적였다는 내용이었는데 실제 그랬는지가 궁금하더라고요.
“맞아요.”
-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오던가요.
“아. 그럼요. 권력이란 게 참 무서운 거예요.”
복잡 미묘한 미소가 번져갔다.
동교동계와의 갈등
한편으로, 비서실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동교동계 가신그룹에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리는 권노갑부터 충격이 컸다. 회고록에서도 당시의 심정이 읽힌다.
“노태우 대통령의 정무수석비서관이었던 김중권 씨가 비서실장에 전격 임명된 것은 충격이었다. (중략) 김대중 당선자는 아마도 노태우 정권하에서 정무수석을 지냈던 김중권 씨의 능력을 높이 사서 기용한 듯했다. 하지만 병실로 찾아와 불만을 토로하는 당료들처럼 나도 그가 비서실장에 임명된 것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의 인격이나 자질이나 어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경력이나 능력이 탁월할지는 몰라도 그는 본래 우리 민주화 세력과 대립하던 5공 세력이고, 그것도 민정당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비민주화 세력의 본산이던 민정당 출신이 과연 민주화 세력이 출범시킨 새 정권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와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권노갑 회고록 중
DJ는 동교동계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김중권한테 힘을 실어줬다. 비서실을 중심으로 차기 정부의 핵심 과제나 방향 등을 설정하도록 지시했다. 밤새 켜져 있다는 북아현동 그의 집 분위기가 말해주듯 김중권은 DJ의 새로운 최측근이자 실세로 떠오르고 있었다.
본인 또한, “비서실장 중 아마 가장 강력한 비서실장이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DJ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DJ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는 뭐라고 봅니까.
“처음엔 나도 도무지 알지 못하겠더라고. 평생을 따라다닌 것도 아니고, 목숨을 바친 사람도 아닌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오.”
그러다 결론 내린 것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다.
지금도 대통령 부부와 첫 오찬을 하던 날이 눈에 선하다. 그가 대통령 내외 앞에서 강조한 말이 있다.
“대통령님, 굳이 제가 설명을 드린다고 하면, 오늘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지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겁니다. 오랫동안 청와대를 경험했습니다.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과 어려움에 처하는지를 제 두 눈으로 봤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앞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게하기 위해 저를 보낸 것 같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매달리라고, 파수꾼으로 보낸 것이 아니냐….”
그러자 앞에서 듣고 있던 이희호 여사가 김중권의 손목을 잡았다. 이 여사는 “김 실장님, 앞으로 이렇게 대통령을 모시면 됩니다”면서 부드럽게 응시했다.
“예. 성공한 대통령이 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중권도 약속했다.
“저는 이번이 마지막 공직입니다. 두려울 것이 뭐있겠습니까. 능력이 부족하면 물러서면 되고저로 인해 피로감을 느끼면 그만두면 됩니다.”
딱 선언했다. 이후 2년간 보좌했다.
- 실제 DJ는 어떤 사람이던가요.
“굉장히 합리적인 분이에요. 나도 판사 출신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것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입니다. 합이 딱 맞아떨어진 거죠. 신앙적으로도 맞아떨어지고. 난 거짓말을 안 해요. 그래서 DJ가 100% 믿은 겁니다. 나 역시 100% 존경했고 말이에요.”
깊은 신뢰가 묻어났다.
DJ가 그에게 왜 초대 비서실장을 맡기고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줬는가. 또 다르게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DJ 입장에서는 동교동계 가신그룹이 최측근이긴 하나 이들이 전횡하지 않도록 견제해줄 역할도 필요했을 터였다. 김중권은 적임자였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실제 그는 측근 그룹의 국정 개입을 막고 비리에 연루되지 않도록 잘 관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영남 후보론
- 또 하나 궁금한 것이 한화갑 대표와 인터뷰할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DJ가 영남 후보를 만들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 일환으로 박근혜까지 대통령을 만들어보려고 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진짜 중 진짜입니다.”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인지 김중권이 반색해왔다.
한화갑은 “DJ가 박근혜를 지도자로 키우려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한화갑은 2012년 18대 대선 기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했다. 그 또한 DJ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라종일 박사(DJ정부 때 국정원 1차장 역임)가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DJ를 만났는데 박근혜를 도와주라 그러더래요. DJ는 박근혜를 지도자로 키울 생각이었어요. DJ가 어떤 결심을 하고 허주와 권노갑 고문을 부르게 돼요. ‘박근혜를 키워야겠다. 대통령이 돼서도 국민 통합을 이룩할 수가 없다.
나의 최대 정적이었던 박정희의 딸을 정치 지도자로 키워낸다면 우리 국민들이 ‘아, DJ가 정말로 국민 통합을 하려는구나', 알아줄 것이다. 그러면 정서적으로 영호남 통합, 국민 통합도 되지 않겠나.’ 이후 권노갑 고문이 지령 받으면 허주가 구체화해 (박근혜 키우기) 실행위도 만들었지요. 책임자는 이혜훈(전 의원) 시아버지인 울산의 김태호(전 내무부장관) 그 양반이었고요.
그런데 2001년인가 권노갑 고문에게 위기가 오고, 2002년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 경선이 진행돼서 결실을 못 보게 돼요. 그런 얘기가 <1급 비밀, 그랜드 플랜>이란 책에 담겨 있어요. 김태호 전 장관의 보좌관을 했던 이태호 씨가 쓴 책이지요.”
- 한화갑, 2020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였는데, 이번에는 김중권을 통해 새로운 증언이 더해졌다. 그는 DJ가 차기 대선주자로 영남 출신인 김중권을 내심 밀고 있었다고 전했다.
비서실장을 맡은 지 한 1년 6개월 지났을 무렵이었다.
“한번은 DJ가 불러요. 김 실장. 꿈을 가지세요.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대통령 나가라는 뜻이란 걸 알았지요. 그분 꿈이 동서화합이잖아요. 호남 대통령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나는 마지막 공직 생활로 여기고 비서실장을 하고 있는 건데 DJ 권유를 따르기 어려웠어요. 한 6개월을 끌었지요. 그러자 다시 또 부르세요.”
1999년 11월 말경이었다.
“DJ가 ‘결단하라’는 거예요. 이듬해 16대 총선을 앞뒀을 땐데 민주당 간판으로 경상도에 나가 당선돼 돌아오라면서요.”
서울권으로 공천을 줬다면 무난하게 당선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험난한 과정을 통해 큰 인물로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 당시만 해도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자신감도 있었어요. 앞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울진군수로 당선된 적이 있거든요. 내가 지원한 후보였지요.”
고심 끝에 김중권은 용기를 냈다. 16대 총선에서 고향인 경북 울진군에 도전장을 냈다. 울진은 민정당 시절 그에게 내리 3선을 안겨준 곳이다. 16대 총선부터는 봉화군과 한 선거구로 묶이게 된다.
국민회의는 총선을 앞두고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 개편하는 신당 창당을 모색했다. 당명도 새천년민주당으로 바꿨다. 김중권도 신당 합류를 선언했다. 그는 “분명한 건 국민대화합이라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수행하기 위해 몸을 던져 총선에 임할 것”이라며 출마선언도 밝혔다. 선거 전략도 짰다. 영주와 양양, 청송, 영덕 등을 동북 벨트로 묶어 전선을 형성했다. 그 결과 선전했고 덕분에 네다섯 명이 승리했다.
하지만 김중권 본인은 정작 16표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간발의 차였다.
- 너무 아쉬웠겠습니다.
“아쉬웠죠. 여론조사를 해보면 내가 10% 이상을 계속 앞섰던 곳입니다.”
근데 선거 하루 전날 산불이 났다.
“삼척에서 불이 난 게 남쪽으로 남하해 울진 원자력 발전소 부근까지 덮친 겁니다. 울진군 공무원들은 물론이고 많은 주민들이 산불 끄는 데 동원이 됐어요. 고향에서 기권한 사람만 줄잡아 2000명 이상이었지요.”
- 운명이네요.
“운명이죠.”
담담히 말했다.
“만약 그때 내가 당선됐다면 ‘노무현 시대’는 오지 않았겠지요.”
- DJ가 꿈꾸던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게 노무현 시대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맞습니다. 아니었죠.”
노무현은 지역주의 극복을 기치로 당선된 경우지만 DJ와 달리 참여정부 시절 역으로 자신을 밀어준 호남을 배제해 지역을 갈라치기 한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민주당 당대표로
- 2001년 10‧25 구로을 재보선은 왜 못 나간 겁니까.
“생각조차 하기 싫은데….”
도리질을 쳤다. 그러면서도 길게 말을 이어가고자 입맛을 다셨다. 한번 답을 하면 막힘이 없었다.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는 재주가 있어 뵀다. 기억력이 좋았다.
그는 당대표가 된 배경부터 설명에 들어갔다.
김중권은 16대 총선에서 떨어진 뒤 DJ 권유로 8월 전당대회에 출마했다. 그는 “동서화합의 다리가 돼 정권재창출의 디딤돌이 되겠다”며 전당대회 출마 포부를 밝혔다. 한화갑·이인제에 이어 3위로 득표했다.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연말에는 DJ를 따라 해외 순방에도 나갔다. 11월 25일 싱가포르 호텔에 투숙했다. 문을 열고 나가니 화분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비 리본 위로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적힌 축하 난이었다. DJ가 보낸 거였다.
‘외국에 와서도 생일을 기억하다니…참으로 세밀한 분이다.’
감격하고 있는데, DJ는 만찬에도 초대했다. 대통령 부부가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맛있게 차려진 식사가 준비됐다.
# DJ와의 오찬
“다음 검찰총장은 누가 하면 좋겠소?”
DJ가 물어왔다. 중요한 인사 문제까지 협의하려는 대통령의 모습에 참으로 과분하다 싶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던 중 DJ가 지그시 김중권을 바라봤다.
“이번 순방 끝나고 돌아가면 당을 맡으세요.”
조용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권유였다.
‘이 말을 하려고 불렀구나.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어.’
가슴 밑바닥부터 뜨겁고도 진한 감동의 샘이 차올랐다.
새천년민주당은 신‧구간 갈등으로 점입가경이었다. 정동영 최고위원이 12월 초 천정배‧신기남 등과 함께 권노갑 최고위원의 2선 후퇴를 주장했다. 초선의원들 10여 명이 이 같은 주장을 문서화해 DJ한테 전달했다. 권노갑으로서는 자신이 발탁한 후배 정치인이 치받는 통에 괘씸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 얘기다. 권노갑은 재작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정동영이 사과해왔다”며 앙금을 깨끗이 털어낸 지 오래라고 한 바 있다.
당시 권노갑은 임명직 최고위원에서 물러났다. 이를 계기로 정부여당의 당정개편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새당대표로 김중권 지명설이 들려왔다. 동교동계로서는 탐탁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김중권 최고위원보다는 김원기 의원이 낫다고 추천했다. 내가 김중권 대표를 반대한 것은 정통성의 결여 때문이었다. 김원기 의원은 평민당 출신으로 정통성이 있지만 김중권 최고위원은 민정당에 몸담았던 사람이었다. 대통령은 내 건의를 듣고 알았다고만 말씀하셨다.”
- 권노갑, 회고록 중
2000년 12월 19일 DJ는 김중권을 새당대표로 지명했다. 동교동계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해외순방을 다녀온 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다.
당대표로 있던 중 2001년 구로구 보궐선거를 앞두게 됐다. DJ와 김중권, 한광옥(당시 비서실장)은 청와대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주례회동을 갖고 있었다. 김중권이 구로을 보궐선거를 보고하자 DJ는 “김 대표가 나가세요” 라고 지목했다.
김중권으로서는 속으로 반색할 일이었다. 원외 대표였기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 그런데…. 사람이 입을 조심해야 하는데….”
김중권이 말끝을 흐렸다.
“대통령이 나가라고 결정했고, 한광옥 비서실장도 뜻을 알았다고 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는 건데, 그 길로 기다리면서 입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괴로운 듯했다.
“당에 돌아와서는 그만, 박상규 사무총장에게 말해 버린 거예요. 알고만 있으라고 한 건데 이 양반도 입을 못 참고 기자들한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김중권의 구로을 출마설이 조심스럽게 거론되면서 계파 간 긴장감이 감돌던 때였는데, 박상규가 기자들을 만나 출마를 공식화해버리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 소식이 동교동 가신들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거기서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죠. 나도 말을 조심하는 사람 중 하나인데 그때 왜 입을 열었을까 싶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시 김중권은 당대표인 동시에 차기 대선주자로 부상되고 있었다. 견제 심리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동교동계를 비롯해 차기대선주자 진영에서도 불가론을 내세웠다. 적절한 균형을 맞춰야 하는 청와대로서는 반대급부의 목소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구로을 출마는 결국 무산됐다.
동교동계와의 갈등
- 밀어붙이면 됐을 것 같은데 뱃심이 약한 거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곧 죽어도 뱃심이 약하다는 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 글쎄요. 그랬으면 됐을 것 같습니다만.
“들어보세요.”
- 네.
“한광옥 비서실장이 범가신 그룹이잖아요. 그쪽(동교동계 가신그룹) 압력에 굴한 거예요. 구로을에 김한길 전 의원을 공천한 겁니다.”
- ‘김한길 공천’은 누가 주도한 겁니까.
“청와대 참모그룹에서 했어요. DJ가 아니라 한광옥 씨와 권노갑 고문(민주당) 같은 분들이 한 것이죠.”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미는 듯했다.
- DJ가 (김중권을) 밀었는데 그게 가능합니까. 가신들이 DJ 뜻을 꺾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에요.”
김중권이 맞장구쳤다.
“근데 그들이 DJ한테 그런 거예요. ‘김중권이 낙선하면 민주당으로서는 치명상을 입는다.’ 알다시피 구로을이 민주당 후보가 낙선할 지역입니까.”
기가 차다는 듯 반문해 왔다.
- 아니죠.
“기자 양반도 수하 사람한테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대뜸 이 말을 해왔다.
“내가 조직을 관장할 때 굉장히 엄격했어요. 틈을 안 줬지요. 밀어붙이기도 잘하고, 뱃심 있게 했단 말이에요.”
다시 한번 ‘뱃심’이란 단어에 힘을 줬다.
“가신그룹들이 계속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대통령을 움직이려고 할 때 내가 그걸 못하게 했어요. 안 그러면 오늘날의 김건희 여사 논란 같은 일들이 터지는 겁니다. 대통령과 영부인이 누구는 만나도 되고, 누구는 만나면 안 되는지 일일이 통제를 하는 게 참모그룹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게 안 돼 저 난리(디올백 논란)가 난 거 아닙니까.”
김중권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은 원로 중 한 명이었다. 돌아가는 정국에 대한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내가 비서실장일 때는 그러지 않았어요. 가신그룹들이야 국민의정부가 출범하는데 일등공신 아닙니까. 하지만 DJ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가신그룹들은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었습니다. 그러니 권노갑 씨가 볼 때는 대통령과의 접촉을 막아서는 내가 미운 겁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했다.
“참 무섭게들 나를 씹어댄 것으로 알아요. 권노갑 씨를 비롯한 분들이 나를 철저히 견제했어요.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이 박지원 씨였어요. 내가 비서실장 할 때 그 양반이 공보수석을 했어요. 하루는 박지원 씨가 회의를 건너뛰고 대통령 관저에 올라가 직보를 하는 겁니다.
이걸 허용하게 되면 청와대 공식 기능이 무너지는 거예요. 나는 용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음날 대통령께서 느닷없이 ‘김 실장. 박지원 수석 잘 데려다 쓰세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대통령님, 박지원 수석은 나와 경쟁관계가 아닙니다. 내 부하입니다.’”
- DJ는 뭐라던가요.
“아무 말씀 안 하시더라고요. 다음날 박지원 씨가 내가 있는 방으로 오는 겁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거짓말 않고 ‘실장님!’ 하는 거예요. ‘실장님 뜻에 어그러져서는 하루라도 근무할 수 없다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충성!’이라고 하더라고요.”
- DJ가 뭐라고 얘기한 모양입니다.
“그랬겠지요. DJ가 나를 얼마나 신임하는지 또 한 번 확인한 것일 테지요.”
하지만 견제가 계속됐다는 전언.
“청와대 정보가 박지원 씨를 통해서 동교동계 등으로 자꾸만 넘어가는 겁니다. 그런 사정을 제일 잘 아는 양반이 장성민 씨예요. 암튼 지금도 내가 모임에 나가지 않는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입이 쓴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 권노갑과 박지원도 사이가 안 좋지 않습니까.
“이후는 안 좋아졌지만, 그때까지는 아삼륙이었습니다.”
- 김효석 의원이라고 권노갑 라인이었습니다. 2001년경 정통부 장관에 내정이 됐다는 얘기가 있어서 인터뷰도 한 적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 시절 취재하던 때가 생각이 나서 여담으로 말했다.
“근데 나중에 양 모 씨로 바뀌지 않습니까. 뉴욕 한인회장하던 박지원 씨와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아요. 권력의 축이 권노갑에서 박지원으로 넘어갔구나 싶었죠.”
국민의정부는 2000년 3월 26일 개각을 단행했다. 정보통신부 장관은 엔지니어 출신의 양승택 박사가 발탁됐다. 국정원장은 장영자를 수사한 특수통 출신의 신건, 통일부장관은 햇볕정책 전도사로 불린 임동원, 과기부 장관은 과기통위원회 소속의 김영환 등이 임명됐다.
청와대 인사로는 박지원 초대 대변인이 정책기획수석 자리에 올랐다. 박지원은 DJ 입으로 불리며 여권의 실세로 부각되고 있었다.
박지원은 DJ를 따라 오랜 세월 고락을 나눈 동교동계 그룹과는 출발점이 달랐다. 그는 미국 한인회장을 맡을 당시 전두환 동생 전경환과 가까운 사이였다. DJ 사람이 된 것은 민주 투사였던 김경재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DJ와는 미국 망명 생활을 할 때 처음 연을 맺었다. 이후 빠른 속도로 최측근이 됐다.
국민의정부 시절 박지원의 힘은 셌다. 언론에서는 “김 대통령과 언제든지 단독 면담이 가능하며 신임이 두텁다”고 보도했다.
“하여간 (권력 투쟁이) 되게 치열했던 것 같아요.”
김중권이 말을 이어갔다.
“이인제 씨가 대선 후보가 되지 못한 것 또한 박지원 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16대 대선 경선
이야기는 2002년 16대 대선 때로 흘러갔다. 동서화합을 표방한 김중권을 비롯해 이인제‧한화갑‧정동영‧김근태 등 쟁쟁한 후보들이 경선에 뛰어들었다. 노무현도 출전했다. 처음엔 변방이었다.
- 초반 판세는 나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한화갑 씨는 호남이니 안 되고 이인제 아니면 김중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로서는 ‘노무현 시대’가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가 당대표였을 때 밑에 있던 사람들이 국민참여 경선(50대 50의 전국광역자치단체 순회 경선)을 준비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당시 보편적인 전대 방법은 후보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대의원 그룹을 모집하는 거였습니다. 사람을 얼마나 많이 모으고 발품을 파느냐에 따라 결정됐기에 나나 이인제 씨나 그쪽에 집중하고 있었죠.”
마른 침을 삼키며 다음 말로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가 만들어지고, 온라인으로 국민참여경선을 준비하는 줄은 몰랐던 겁니다. 수많은 대의원을 모집했지만 집계해 보면 그쪽(노무현)이 많았습니다. 경선할 때도 연설을 하면 노사모 쪽이 막 고함지르고 판을 쳤고 말입니다.”
- 제주에서는 한화갑이 1등을 했습니다.
“그렇긴 하지요. 두 번째 경선지인 울산에서도 내가 선전하긴 했습니다(웃음). 노조가 많으니 노 전 대통령이 이길 것으로 예상했는데 세어보니 스물몇 표 차이 밖에 안 나는 겁니다. 아주 근소한 차였지요. 상대도 놀랐습니다. 내가 선전할 줄은 몰랐던 겁니다. 나는 내가 계속 잘 될 줄 알았습니다. 착각한 것이지요(웃음).”
- 결정적으로 뒤집어진 것은 광주 경선 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광주에서 뒤집어졌지요.”
2002년 3월 16일 세 번째 경선지인 광주에서 노무현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1위를 차지했다. 한화갑‧이인제 순이 아닌 노무현‧이인제‧한화갑 순으로 집계됐다.
“나는 그것은 공작이라고 봐요.”
김중권이 주장했다.
“그것 때문에 이인제 씨가 안 된 겁니다. 공작을 누가 했느냐. 박지원 씨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일까. 당시 나돌던 설이 있었다. DJ가 노무현을 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것을 퍼트린 이가 박지원이라는 얘기로 들렸다. 이인제 또한 ‘DJ와 박지원이 노무현을 돕고 있다’고 발표하며 ‘DJ 노무현 지원설’에 가세한 바 있다.
“광주 반란을 알아야 합니다. 정동채 광주시장이라고 있었어요. 박지원이 정동채를 불러 ‘DJ 뜻이 누군 줄 아느냐. 노무현’ 이라고 한 것입니다.”
광주시장을 지낸 박광태 또한 관련 얘기를 전해준 바 있다.
“사실은 우리(광주 당원들)가 선거 때 이인제 후보를 밀었어요. 그런데 비서실장이던 박지원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대통령(DJ)은 노무현이다’ 그래서 ‘노무현이 무슨 대통령감이냐.’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반박했어요.
박지원은 ‘아니다. 대통령 뜻이다. 광주는 노무현으로 바꿔라.’ 그 시절 광주에서의 조직은 내가 다 쥐고 있던 판이에요. 결국 노무현으로 3일 만에 판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노무현이 압승했던 거예요.”
-박광태, 2022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이렇게 보면 DJ 지원설이 사실인 듯도 보인다. 하지만 권노갑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DJ는 무심이라고 했다. 그는 “DJ는 중립을 지켰다”고 피력했다.
김중권도 그리 보는 눈치였다. 박지원에 대해 ‘공작’이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 어쨌든 중간에 경선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노무현을 밀어주라는 청와대 오더를 받고 중도 사퇴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100% 아닙니다.”
김중권은 한화갑에 이어 3월 25일 사퇴를 선언했다.
- 그럼 뭡니까. 이미 안 된다고 본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디지털이고 우리는 아날로그였던 것입니다. 내가 탄력을 받으려면 경북이나 대구부터 먼저 열려야 했는데 자꾸 뒤로 밀려나는 겁니다.”
대구와 경북은 순회 경선 중반부 가서야 치러졌다. 그때까지 버틸 힘이 없었던 듯했다.
- 하지만 중도사퇴하면서 오히려 이인제가 아닌 노무현 쪽으로 당락이 바뀐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눠먹을 수 있던 경상도 표가 모두 노무현한테 간 게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도와준 거 아니냐는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게 아닙니다. 판세를 보니 (노무현 쪽으로) 다 결정이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수원 모처에서 이인제 씨와 만났겠습니까. 둘이 만나 ‘끝내자’ 는 얘기까지 나눴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인제는 4월 18일 대통령 꿈을 접기로 했다며 사퇴를 선언했다. 김중권 말로는 그전에 서로 사퇴하자는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이에 따라 노무현·정동영과의 2파전으로 압축됐다. 노무현은 서울에서 이기면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YS와의 연
- 또 하나 궁금한 게 민정계가 다수였지만 구심점이 없다고나 할까요. YS와 DJ쪽으로 이리저리 붙으며 뿔뿔이 흩어졌고 말입니다. 정치력의 부재로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DJ한테는 나와 이종찬 씨 둘만 갔지요. (그래도 많이 움직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건 훨씬 이후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YS 때는 3당합당 부터 이미 YS 판이었어요. 다음 대권은 YS였던 겁니다. 민정계에서는 박태준·이종찬 씨 등이 대선주자로 나서긴 했지만 대통령 뜻이 YS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 노태우는 3당합당 때부터 내각제로 가려했던 것 아닙니까. 대권을 YS한테 주려고 했다는 느낌은 안 드는데요.
“아닙니다. 처음엔 (YS한테) 있었습니다.”
- 왜 YS였다고 봅니까.
“그래야만 정권재창출이 되니까.”
심플한 답이었다.
“박태준 씨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안 겁니다. 다음 대통령은 군 출신은 안 된다고 공언하던 때였습니다.”
박태준은 군 출신이었다.
이날 인터뷰에서 김중권은 YS 얘기도 많이 했다.
“그분하고 나하곤 악연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악연.”
솔직한 감정을 표했다.
김중권은 민정당 시절 사무총장으로 내정됐지만 YS가 반대해 낙마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나를 박철언계로 오해한 겁니다.”
사무총장은 김윤환에게 돌아갔다. YS는 자신의 오해였다며 사과를 해왔다. 관계가 좋았던 적도 있었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14대 총선 후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발탁 되자 하루는 최형우 등 상도동계가 찾아왔다. 대선을 앞둔 만큼 YS 편으로 삼으려 했다. 충정 어린 얘기에 감화돼 김중권도 YS를 돕게 됐다. 하지만 YS가 대통령이 된 뒤 김중권은 지구당위원장에서 교체되고 공천도 받지 못했다.
“내가 YS 정권 탄생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인데…. 대통령(노태우)과 YS와의 관계가 껄끄러울 때마다 내가 나서서 중재 역할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런 나를 이렇게? 참으로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배신감이 컸다고 했다.
- 윤석열 대통령 후보 시절 만났지 않습니까. 3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화제를 돌려 물었다.
“공개하면 안 되지. 둘이 만나서 얘기한 건데…(웃음).”
인터뷰 후반부는 정치권에 전하는 원로로서의 조언이 더해졌다. “대통령과 영부인일수록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참모들은 대통령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전달하는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진언하는 자리입니다.”
영부인 논란부터 ‘윤석열·한동훈 갈등설이 대통령실과의 진실공방전으로 확산되던 때였다. “이런 문제들이 완화되려면 원로 그룹의 얘기도 귀담아들어야 해요,” 형식적인 만남이 아닌 고언을 듣는 자리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돌아보면 사심을 채우지 않고 공사를 돌본 것에 자부심이 큰 듯 보였다. 실세로 통하던 시절 유혹도 많았지만 법은 법대로 풀고 청탁은 받지 않았다고 했다. “역대 비서실장 중 그 부분만큼은 자유롭고 당당할 걸요?” 화통하게 웃었다.
자리에 일어나는 기자들에게 손수 사인한 책을 건넸다. 초록 잎사귀가 연상되는 표지 위로 <아침의 메아리>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삶의 경험과 학술연구, 성찰을 통해 얻은 교양과 지침, 교훈들이 모여 정갈한 책을 이뤘다.
“정부와 정부 관료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특히 비서실 직원은 역사의 한 부분을 만들어가는 주인의식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중권 <아침의 메아리> 중
어느 위치 역할에서든 귀담아들을 말이 많았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