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vs 계몽' , 역사속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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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vs 계몽' , 역사속의 진실은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2.2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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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방응모 친일 논란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국내 최대, 최고(最古)의 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업자 방응모(1883~1950?)와 김성수(1891~1955)의 친일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방응모의 전기인 ‘계초 방응모전’(조선일보사, 1980년 초판)에는 방응모를 일제 암흑기에 조국에 한 줄기 빛을 던져준 언론의 선각자로 그리고 있다. 김성수의 전기인 ‘인촌 김성수’(인촌기념회, 1976년 초판)에서도 김성수를 국민계몽에 앞장선 교육자이며 언론인이자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실천한 독립운동가로까지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기와 평전들이 그렇지만 ‘계초 방응모전’과 ‘인촌 김성수’도 방응모와 김성수를 위인으로 추앙하는 편향된 관점에서 씌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조선일보사와 인촌기념회가 전기 집필을 주관했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 인촌 김성수 생가에서 열린 '중앙교우회 선생 추모회'. 마이크 잡은 이는 이강수 고창군수.     © 뉴시스


방응모와 김성수의 친일 논란은 지난 달 8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 이하 ‘편찬위’)가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열고 두 사람을 친일 인사에 포함시키면서 다시 불거졌다. 편찬위의 보고대회가 있은 직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훼손’이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편찬위가 밝힌 방응모의 친일행위는 1933년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 부사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두드러졌다. 방응모는 1883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 신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서당에 다닌 것으로 전하며 나이 마흔까지 이렇다 할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 운영한 것이 사업다운 첫 사업으로 보이며 수금 사정이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고 가산이 압류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2년 만에 지국 운영을 그만두고 당시 조선 전역에서 유행하던 금광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집문서를 저당 잡혀 마련한 돈으로 덕대(德代) 생활을 시작했다. 덕대란 남의 광산을 도급 맡아 일정한 금액을 내고 채광하는 방식인데 주로 영세업자들의 광산사업 방식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방응모는 금맥을 발견하면서 일약 조선 최고 갑부 반열에 등극했다. 금광을 매수해 교동(橋洞) 광업소를 설립했고 1931년 무렵에는 조선 5대 광산 중 하나로 종업원 수는 1,100명에 이르렀다는 보고서가 있다.
 
방응모, 금광 판 돈으로 조선일보 인수

방응모는 한창 성업 중이던 교동광업소를 1932년 135만 원(1937년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이었다.)을 받고 일본중외광업주식회사에 판다. 잘 나가던 광산을 갑작스럽게 판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금광 매각으로 방응모는 일약 조선반도 제일의 거부로 변신해 있었다.

방응모가 광산을 판 돈으로 언론사업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처음부터 조선일보 인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 계기는 광산 매각 계약금을 받기 위해 상경했다가 당시 조선일보 사장인 조만식을 만난 것이다. 조만식은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의 인수를 방응모에게 제안했고 방응모가 이를 받아들였다.

1933년 1월 자본금 20만 원을 일시불로 불입해 ‘주식회사 조선일보’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같은 해 3월 경영권을 인수, 부사장에 취임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태평로 1가 부지 1,400평을 매입, 당시로서는 일대에서 가장 높은 4층 건물의 사옥을 짓기 시작했다.

이어 당대 최고의 논객이던 동아일보의 이광수와 서춘을 부사장과 주필로 영입해 필진을 강화했는데 이들은 방응모와 한 고향 출신이다. 활자제작과 윤전기 구입 등 시설투자에 50만 원을 들여 회사의 면모를 일신하고 같은 해 7월 사장에 취임하면서 방응모 체제의 조선일보가 탄생됐다.

방응모는 조선일보 인수 2년 뒤인 1935년 경기도 수원에 97만 평 규모의 대규모 간척사업을 추진했는데 이에 들어간 비용이 조선일보 인수 비용과 맞먹는 50만 원이었다. 이듬해에는 함경남도 영흥 일대에 3,200만 평 규모의 조림사업을 벌였고 장차 신문용지 확보가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방응모 간척, 조림 사업 조명 필요, 일제 말 친일은 논란 계속

편찬위가 밝힌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1933년 3월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한 것이 최초다. 이후 조선신군봉찬회 발기인 겸 고문, 경성군사후원연맹위원, 조선춘추회 발기인 겸 간사,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으로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또한 구두연설과 기고를 통해 “안으로는 신체제의 독립, 밖으로는 혁신 외교정책을 강행해  하루바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해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국민은 이 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해야 한다”(1941년 11월)며 일본의 2차 세계대전 도발을 옹호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1945년 8월 말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폐간됐던 조선일보를 같은 해 11월 복간했다. 이듬해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돼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성수는 방응모에 비해 출생부터 상세한 행적이 알려져 있다. 전북 고부군에서 김경중의 큰아들로 태어났고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가 되면서 양쪽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03년 13살에 다섯 살 연상인 고광석과 결혼했는데 그의 장인 고정주는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진보적 인사였다.

16세 때는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 다니면서 평생의 친구인 송진우를 만났다. 김성수는 생부와 양부, 장인 모두 지주이면서 계몽운동의 지도자였던 가족관계로 인해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에 일찍이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 일본 유학 후 중앙학교 인수로 교육운동 전개

일본에 유학해 선진적 교육제도의 필요성을 인식한 김성수는 1914년 7월 귀국 후 사립학교 설립을 추진했지만 총독부의 허가가 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립학교 설립안이 거절된 직후 민족 사학이었던 중앙학교를 운영하던 중앙학회에서 김성수에게 학교의 인수를 요청했다.

아직 24세의 어린 나이였던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한다고 하자 집안에서는 무모한 행동이라면 반대했다. 유일하게 그의 양부만이 김성수의 견해를 존중했고 다른 가족들도 결국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중앙학교는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로 발전했다.

중앙학교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복을 입혀야 한다는 생각에서 김성수는 1919년 경성직류주식회사를 인수해 경성방직으로 전환시키는데 이것은 순수 한국인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대규모 기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이 시행되면서 평소 신문사 설립에 관심을 가졌던 김성수는 1920년 동아일보를 설립한다. 이후 재정상의 어려움과 총독부의 간섭으로 여러 차례 정간과 발매금지 처분을 겪어야 했다.
 
동아일보는 민족지를 자처하며 문맹타파 운동과 조선어학회와 함께 한글운동 캠페인도 벌였다. 1932년에는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고 1946년 미군정청의 종합대학 승격 인가를 받아 현재의 고려대학교가 됐다.
 
▲ '친일인명사전'에는 김성수, 방응모, 장지연 등 일제시대 대표적 언론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 뉴시스


평생의 절친한 친구였던 송진우가 1945년 12월 암살된 후에는 정치 전면에 나서 1946년 한민당 수석 총무가 됐고 1951년부터 이듬해까지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김성수, 1936년 이후 친일행적 드러나

이상이 김성수의 일반적인 이력이다. 그러나 편찬위는 김성수가 친일을 했다는 다수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편찬위는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 김성수의 친일행각이 본격화됐다고 보고하고 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의미를 선전하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시국강좌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1938년 이후로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 참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및 평의원,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감사 등으로 친일단체에 몸담았다.

징병제를 옹호하는 기고를 통해서도 친일에 가담했다.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 격려문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이를 실천할 지름길로서 황국신민의 서사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할 것’을 당부한 사실도 있다.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는 ‘대의에 죽을 때까지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인은 3,000년 동안 의무를 수행하여 권리를 얻었지만 조선인은 단시일이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일본인의 오랫동안의 희생에 필적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편찬위와는 별도로 지난달 27일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성대경, 2009년 11월 30일 활동종료, 이하 ‘진상규명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 1,005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 명단에도 방응모와 김성수의 이름이 올라있다.
 
진상규명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중이던 지난 2003년 국가기구로 출범했다. 설치 근거가 된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은 친일행위를 일제에 주도적, 적극적, 중심적으로 협력한 경우로 좁게 한정한데다 친일의 판단근거를 공문서 위주로 제한하다 보니 편찬위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인물 4,389명에 비해 4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 됐다.
 
따라서 진상규명위가 발표한 1,005명의 친일인사는 편찬위 발표 명단에 비해 친일의 강도가 상당히 높다고 봐야 한다.
 
조선, 동아일보 “국가정통성 훼손” 반발

그러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조선일보는 지난 1일자 신문에서 “일제 말 강요에 의해 학병 권유 강연에 나갔거나 총독부 관변단체에 이름을 올렸어도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고 나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재들을 길러내고 6·25전쟁 때 벼랑에 몰린 대한민국을 구하고 종교, 예술, 언론 각 분야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토대를 만든 사람들을 가혹하게 친일 인사로 낙인찍었다”며 친일명단에 오른 인사들을 비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고 “좌파계열이거나 월북해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 이름은 교묘하게 빠졌다”며 색깔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진상규명위의 보고서가 발표된 다음날인 지난달 28일에는 “김성수와 방응모는 자신의 전 인생과 전 재산을 민족 언론, 민족 학교의 건립에 쏟아 부었다”며 미화하기까지 했다.

동아일보도 지난 1일 ‘과거사 바로 세우기를 바로 세우기’라는 제목의 칼럼(최정호 객원 대기자)을 싣고 친일 인물들을 ‘겁탈당한 피해자’, ‘강도 피해자’라고 비유하면서 진상규명위의 과거사 바로 세우기가 피해자(친일 인물)가 가해자(일본)에게 10만 원을 주었는지, 100만 원을 주었는지를 밝히는 데에만 엄청난 예산과 시간을 쏟았다고 비난했다.

같은 칼럼에서 동아일보는 진상규명위가 진짜 친일파와 무늬만 친일파를 가려냈어야 한다면서 김성수, 방응모, 현상윤, 백낙준, 김활난 등을 언급했다. 김성수와 방응모는 무늬만 친일파라는 항변이다.

김성수를 옹호하는 세력 중에는 그의 친일 기고들이 대필됐다거나 친일 관변 단체에 이름이 올라간 것도 김성수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믿을만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방응모가 금광으로 번 막대한 재산을 조선일보 인수와 인재 등용·육성, 간척사업, 조림사업 등에 투자한 것은 친일을 위한 것이라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김성수 역시 중앙중고와 보성전문 인수를 통한 민족 교육 창달, 동아일보 창간, 경성방직 창업 등은 분명 일제치하 민족 계몽과 문화사업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무보다 숲을 볼 줄 아는 시각이 중요

그들의 공적 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친일행각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것이 자발적이건 강요에 의한 것이건 친일행각의 존재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동아일보는 적어도 강요에 의해서 친일행각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강요에 의해서 친일에 가담한 행위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제시대를 군사독재시절 정도의 시대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일제 치하에서 친일을 거부하고 절필하거나 목숨까지 바쳐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을 생각한다면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는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이 중요하다. 친일논란에 있어서는 나무만을  보다가 숲을 못 보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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