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박정희> “애국시민의 자발적인 궐기가 내란음모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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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박정희> “애국시민의 자발적인 궐기가 내란음모라고?”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4.1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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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박정희 닮은 꼴, ‘전두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민주화의 열망을 무산시킨 박정희의 사조직 하나회의 폭거 (12·12사태)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후 정치권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정상적인 선거절차를 거쳐 합법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일파가 국군 통수권자인 최규하의 재가도 없이, 자기들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댁을 기습해 구속시켜놓고, 사후에 대통령까지 협박하여 형식적인 재가를 얻어 놓고 그 외의 상사들까지 제압하여 정권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전두환의 쿠데타였다.

1980년 여름 전두환이 계엄을 선포하고 김영삼 총재를 가택 연금하고 신민당 국회의원 대부분을 부정축재 등의 트집을 잡아 정치정화법에 묶어 정치활동을 못하도록 했다.

공작 정치에 길들여진 하나회의 전두환 일파의 공작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은 최규하를 협박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를 이어 기존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체육관 대통령이 됐다. 전두환은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을 협박해 법에도 없는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마치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고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혹독한 훈련과 기합으로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일파는 계엄을 선포해 놓고 김대중은 내란 음모죄로 ,김종필은 부정축재자로, 잡아가고 다음날부터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는 헌병 1개 중대로 가택 연금에 들어갔다.  

그리고 5월 18일 무장한 계엄군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을 죽였다.
정권야욕에 눈이 뒤집힌 하나회 출신 전두환과 그들 패거리들이 저지른 만행은 또다시 국민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선진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또 한 번의 절호의 기회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올바른 방향을 잡은 우리의 역사를 또 다시 꺾어 놓고 말았다. 

김대중의 사형 선고와 탄원서

10·26으로 박정희 정권이 종말을 고하면서 지난날 자유당 정권이 4·19로 무너졌을 때와 유사한 상황이 됐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과단성 있게 빠른 시일 내에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여야 하는데, 전두환 일파의 정치공작에 말린 것인지 또는 최규하 자신의 욕심인지, 민주화 시대에는 당연히 없애야 할 기존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체육관에 소집해 박정희가 한 것처럼 체육관 대통령이 됐다. 민주화는 서서히 물 건너가기 시작했다.

결국 최규하는 대통령은 되었지만 전두환과 그들 하나회가 쳐 놓은 공작에 걸려, 대통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력하고 씁쓸하게 무너져 내렸다.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최규하 권한 대행을 만나 과거 4·19후 허정 내각을 예로 들면서 신속한 대응을 촉구했을 때, 권한 대행으로 만족하고 당당하게 대처했더라면 전두환의 공작에 놀아나지도 않고, 국민이 소망하는 민주화도 이루어 졌을 것이다. 최규하도 업적을 남긴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화 세력의 대동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김대중은 민주화는 뒷전이고 자신의 정권욕에 모든
일정을 맞추어 결국 수권 야당인 신민당을 분열시킴으로써 또다시 박정희의 사조직 하나회 출신인 전두환에게 명분과 기회를 주어 결과적으로 그들을 돕고 있었다. 전두환 일파는 김대중에게 내란음모죄를 뒤집어 씌워 1·2심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부마사태도, 광주민주항쟁도 민주화를 바라는 순수한 애국시민의 자발적인 궐기였다. 맨손으로 궐기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의 애국운동이 어떻게 내란이 된단 말인가? 또 김대중이 무슨 내란음모를 했단 말인가?

소가 웃을 일이다. 최규하와 김대중의 안일한 대처가 전두환과 하나회에 정치공작의 빌미와 명분을 준 꼴이 되었다.

최규하가 신속히 민주화의 절차를 밟고, 김대중이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신민당을 단결하도록 적극적인 협력을 했더라면 비극적인 광주민주화운동도 없었을 것이고, 불쌍한 애국시민의 희생도 없었을 것이며, 김대중도 억울한 옥살이와 구차스러운 탄원서를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이 잘못일까. 부당한 사형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 김대중은 비굴하지만 살아야 했다. 살기 위해서 그는 죽기보다 싫은 탄원서를 전두환에게 내고 미국으로 갔다. 한심한 일이다. 그때 언론에 발표된 탄원서를 여기 싣는다.

『대통령 각하
본인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계엄포고위반 등 사건으로 1,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현재 상고 중에 있습니다.
본인은 그간 본인의 행동으로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국가 안보에 누를 끼친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국민 앞에 미안하게 생각해 마지 않습니다.
본인은 앞으로 자중자숙하면서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아니할 것이며 오직 새시대의 조국의 민주발전과 국가안보를 위하여 적극 협력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본인과 특히 본인의 사건에 연루되어 현재 수감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아량과 너그러운 선처 있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981년 1월 18일
 위 김대중』
1981년 1월 23일 석간 동아일보, 「탄원서」

유신선거를 본뜬 선거인단에 의한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

1981년 제12대 대통령 선거와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한다고 하면서, 대통령선거는 박정희의 유신정권 때 하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해체하고, 이름만 바꾸어 ‘대통령선거인단’이라고 했다. 이들 선거인은 국회의원 선거구 내에서 동 단위로 한 사람씩 뽑아 이들로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그들이 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뽑았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옹’하는 속임수를 썼다.

1981년 2월 25일 선거인단 회의에서 대통령선거를 하는데, 입후보 등록은 민주정의당에 전두환, 민주한국당에 유치송, 민권당에 김의택 세 사람이 하였는데 말이 경쟁이고 선거이지, 민한당의 유치송과 민권당의 김의택은 자기 쪽 선거인도 몇 사람 없이 완전히 전두환을 위한 들러리였다. 실제로는 전두환 단독출마나 다름없는 속 보이는 선거로 사상 처음 7년 임기의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은 박 정권 시절에 있었던 모든 정당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다. 전두환의 민정당, 유치송의 민한당, 김의택의 민권당으로 이름만의 정당 정치로 판을 바꾸어 출발했다.

박정희의 통일주체국민회의, 전두환의 대통령선거인단은 1회용 종이컵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선거인단은 이름만 다를 뿐 독재자의 민주주의를 가장한 공작적 사기단체인 것이 분명한데, 웃기는 것은 선거로 뽑는다니까 무슨 대단한 자리나 되는 줄 알고 그 지역에서는 제법 알려진 사람들이 앞 다투어 입후보 등록을 하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당선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중에는 이미 독재자의 지명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이 있는가하면, 출세에 눈이 먼 사람들이 한 여름 부나비처럼 덤벼들어 민주정치를 망치고 독재자에게 사기도 올려주고 명분도 주는 한심한 일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덤벼들었다. 당선돼 봤자 나라도 망치고 본인도 별 볼 일 없는 1회용 종이 컵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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