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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산되집기(17)>박태권 민산 전 중앙본부장
˝3당합당 없었다면 노태우에서 김복동-정호용으로 이어져˝
˝하나회는 무서운 조직…YS가 집권하자 마자 하나회 쓸어버린 건 다 이유가 있어˝
2012년 05월 29일 (화) 윤종희 기자 yjh_1120@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산 되짚기' 17번째 주인공은 박태권 민산 전 중앙본부장이다. 박 전 본부장은 민산 조직 확대에 대단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YS) 후보가 당선되는 데 그의 역할이 컸다. 박 전 본부장은 13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문민정부 시절 문화부 차관을 역임했다. 충남도지사도 지냈다. 그는 YS의 최측근이었던 최형우 전 의원의 직계로 알려졌으며 상도동(YS)계 동국대 사단에 속한다. 박 전 본부장과의 인터뷰는 2012년 5월 11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박태권 전 민주산악회 중앙본부장은 민주산악회는 민주화운동의 큰 집이고 본거지이고 요람이었다고 정의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산에 가입한 시점은 언제부터입니까.

"민주산악회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점은 1983년부터일 것입니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민주화운동 기치를 든 것이죠. 당시 워낙 관조직과 군조직이 막강하다보니까 일반적 방법으로는 민주인사들이 만나서 얘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산에서 모이면 정보기관의 도청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때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미국에 있을 때였기 때문에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했습니다. 동교동(DJ)계에서는 김상현 전 의원이 거들었습니다."

민주산악회의 공식 출발은 1981년 6월 9일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서울외교구락부에서 민주산악회 조직을 선언하고 김동영, 최형우, 문부식, 김덕룡과 함께 북한산을 등반하면서부터다. 박 전 본부장이 말한 '1983년'은 민산 조직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낸 시점을 뜻하는 것 같다. 

"민산 초창기에 저는 김동영, 최형우, 김태룡, 황명수 등 원로들을 뒷받침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 제가 30대 초반이었던 만큼 유인물 작성 등 젊은사람의 역할을 하면서 이 분들을 지원했습니다."

"전두환정권 감시 따돌리고 YS 사무실 마련…정치적 탄압 초래"

민산이 이처럼 활동을 시작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민주화 세력은 번번한 사무실 하나 얻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YS가 민주화운동에 필요한 사무실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정권의 방해가 보통 심한게 아니었어요. 서울시청 뒤에 YS의 민족문제연구소가 있었지만 아주 작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30평 이상 사무실을 얻게 되면 그 빌딩 주인이 정보기관에 보고를 하게 돼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빌딩 주인이 사무실을 내주겠습니까. 한번은 YS가 서소문에 있는 대한빌딩 사무실에 입주하지 못하게 되자 그 앞에서 깡통에 소변을 보며 버틴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힘든 상황이었지만 박 본부장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사무실을 확보한다. 

"그 때 저는 닭사업을 했는데 김동영, 최형우, YS에게만 보고하고 극비리에 사무실 확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수출회사 사무실을 얻는 방법으로 완전히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실에 YS 방 등을 마련했지만 외부에서는 전혀 모르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87년 3월 경으로 기억하는데, 시청 뒤 코오롱 빌딩 건너 편에 있는 빌딩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 사무실이 민주화의 산실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박 전 본부장이 이렇게 사무실을 확보했지만 그가 운영하던 회사에는 즉각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렇게 사무실을 얻는 바람에 회사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해 냉동차를 경기도 광명 소하리에서 사서 의정부로 넘어오는데 바로 뽑은 새차가 매연이 심하다고 폐차처리를 하라고 하는 겁니다. 5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냉동차가 필요할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냉동차를 구입했는데 처음에 2대 그 다음에 4대 등…, 그런식으로 폐차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에 대해 나중에 민주화 보상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민주화를 위해서 했을 뿐인데…."

박 전 본부장이 운영하던 회사는 '마니커'로 유명한 '금화유통'이었다. '마니커'는 닭고기 회사로 널리 알려졌다. 그가 닭고기 사업에 뛰어든 배경은 이렇다.

"저는 젊은 나이에 해외로 많이 다니면서 선진국에서는 닭고기가 보편화된 것을 보고 느낀게 많았습니다. 하지만 70년대 우리나라 닭고기 유통 실정은 재래시장에서 살아있는 닭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털을 뽑아서 파는 방식이었어요. 정서적으로도 좀 그렇고 보다 위생적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나라에서 닭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천호그룹 이계조 회장을 어렵게 만나 닭고기와 관련한 해외자료 등을 보여주며 설득했습니다. '닭고기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데 함께 하고 싶다고요. 그 때 만든게 '마니커'입니다."

"1987년 대선에서 군부가 DJ 지원"

그는 1987년 대선 상황으로 화제를 돌렸다.

"1987년도에 민주화 열기가 정점을 이루면서 군부독재가 백기를 들었고 헌법을 고치게 됐습니다. 헌법 개정의 핵심은 우리 나라를 이끌 인물을 칼을 든 독재자의 손이 아닌  국민의 손으로 뽑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그해 1월 15일 경으로 기억됩니다.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엄동설한이었음에도 여름철 장맛비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하늘에서도 눈물을 흘렸다고 저희들이 얘기했었습니다. 그러다 6월 항쟁이 일어나고 5~6월이 정점이었는데 그 때 이한열 군이 사망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박 전 본부장은 잠시 감정이 복받치는 듯 했다. 그러면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YS가 출마하고 DJ는 출마하지 않는 것으로 돼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부가 DJ를 지원하면서 DJ가 출마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민주화가 됐음에도 표가 갈려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때부터) 민주산악회를 활용해 정권창출을 해야된다고 판단, 관련 프로그램을 작성해 최형우와 YS에게 보고했습니다. 제가 민산 조직 운영과 관련한 보고서를 정말 많이 작성했습니다. 밤새 코피를 흘려가면서 몰래 썼습니다. 보고가 끝난 뒤에는 그 서류가 정보기관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태워 없애느라 바빴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게 없는데, 그 점이 참 아쉽습니다."

-3당 합당 이후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사실, 제가 3당 합당을 주장했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서를 작성해서 김동영·최형우 두 분에게 보고하니 좋다고 했습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에서 민주계는 전체의 3분의 1에도 못미쳤습니다. 나머지는 민정계와 공화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YS가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서라도 민주산악회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저가 지금 기억하기로는 1989년 쯤에 본부장을 맡았는데 민산 전국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시·군 마다, 시·도 마다, 그리고 직능별로 해서 지부가 300개가 넘었습니다."

그는 이날 "3당 합당 협상 과정에 통일민주당 총무격으로 참여했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3당 합당이 없었다면 노태우-김복동-정호용 등등으로 군부 대통령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들이 하나회 조직이다. YS가 집권하자 마자 하나회를 싹쓸이 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민산, 민정계 성향 대의원들 설득작업 진행"

박 전 본부장의 노력으로 조직이 확대 된 민산은 민정계 성향 대의원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썼다.

"저희는 전국에 있는 민정계 성향 대의원들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민정계 성향 대의원의 종교가 기독교이면 민산 회원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 사람을 맡았습니다. 민정계 성향 대의원이 중앙대를 나왔다면 민산 회원 가운데 중앙대 나온 사람이 그 사람을 맡았습니다. '현미경 전술'을 썼습니다. 그리고 민주산악회에도 핵심조직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 경선을 의해 정신력이 강하고 똘똘한 사람에 대해 특수교육을 시켜서 민정계 대의원을 공략했습니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사람(민정계 대의원)은 우리 대원 3~4명이 붙어서 서울에 올라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민산에 대한 민정계의 방해는 없었나요.

"민주계 지구당 위원장이 있는 곳에서는 민산이 잘됐는데 민정계 지구당 위원장이 있는 쪽은 잘 안됐어요. 그런데 민정계 지구당 위원장 지역에서 활동하던 민산 회원이 어느날 공기업 이사로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의 회유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기업 이사로 간 사람들 가운데서도 나중에 국회의원 된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1992년 선거할 당시 민정계 위원장 쪽이 사람 동원과 관련해 협조를 안 하면 민산이 대시 가서 민산 깃발로 덮었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 관련 모임 사진 등을 보면 (민자당 깃발보다) 민산 깃발이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산 조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제가 지방에 내려가서 민산을 얘기하면 '그런 말 그만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체육관 선거가 치러지는 분위기였고 정보기관이 활개를 치던 시절이라 지방에 내려가서 아는 사람에게 '당신이 좀 민산에 들어와서 활동하라'고 하면 '그런 말 하려면 그냥 가시오'라고 했어요. 그랬던 분들 중에 민산에 들어와 나중에 국회의원이 돼서 고맙다고 제게 말하는 분들도 있어요. 민산의 영향력이 커졌을 때는 '민산 지부장 자리를 달라'고 저를 쫓아다닌 분들도 있었습니다."

"1997년 이인제 500만표는 민산회원들 표"

그는 민산 조직 확대에 자신이 기여했다는 점에 자부심이 상당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97년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가 500만표를 얻었는데 그것은 민산 회원들 표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인제 의원이 저한테 형님이라고 합니다. 요즘도 저와 함께 하자고 합니다. 당시 500만표는 민산의 '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어디가면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는 '본부장님 예전에 제가 어디어디 민산에서 활동했습니다'라고 많이 말합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민산은 무엇인지 정의해 주십시오.

"민산은 민주화운동의 큰 집이고 본거지이고 요람이었습니다."

-민산의 정점에는 YS가 있습니다. 가까이서 본 YS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YS가 국가를 맡는 차원의 큰 책임 앞에서는 사적인 부분에 초연하고 냉정한 분입니다. 대통령에 당선 된 직후 정권 인수위가 조각 작업을 하는데 저도 참여 했습니다. 그 때 자리가 장관급에는 21~22개, 차관급에는 40여개 등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들 자리의 절반 이상에 민산 회원을 올렸는데 결국 민산 회원이 차지한 것은 청와대 수석 두개, 장관 두개, 차관 두개, 도지사 두개에 불과했습니다. YS가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민산이 별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민산이 다 해먹었다'는 식으로 말들을 하더라구요."

"YS 집권 후 민산이 다 해먹었다는 건 어불성설"

박 전 본부장은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YS 집권 후) 노병구 위원장(민주동지회 전 회장)이 마사회 감사 자리로 가니까 그 쪽 노조에서 '군화가 가니까 등산화가 왔다'고 난리였어요. 꽹과리 치고 데모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해결하겠다는 생각에서 마사회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제가 마사회에 도착해서 직원들이 모여있는 강당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를 가로막고 못들어가게 해요. 그래서 '내가 (문화부) 차관으로 왔는데 왜 못들어가냐'고 하면서 밀치고 들어갔습니다.

강당에서 처음에는 직원들을 치켜세우는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사회를 유지시킨 건 다 여러분 덕분이다'는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나'하고 강당이 흔들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앞에 있던 테이블을 제끼고 직접 마이크를 들고 소리쳤습니다. '여러분들이 민주화운동 하면서 최루탄 가스 맡아봤느냐. 군부독재에 삿대질 한번 한 적 있느냐. 군부독재 아래서 먹고 산 게 아니냐' 그랬더니 고개를 못들어요."

-최형우 전 의원의 직계로 알려졌습니다. 최 전 의원에 대해 말씀 해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좌(左)동영 우(右)형우'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김동영 전 의원은 차원있는 대화를 잘하고 술도 잘마셨기 때문에 협상 분야를 많이 맡았습니다. 반면, 최형우 전 의원은 진짜 보스 기질이 있었습니다. 한두번 만나면 충성심이 생기게 했습니다. 의리가 두터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따르는 만큼 조직 관리를 주로 했습니다. 진짜 사나이 다운 사나이입니다. 조직원들을 자기 몸 이상으로 아낍니다. YS는 스폰서(돈)를 받으면 하루 이상 가지고 있지 않고 나눠줍니다. 아침식사에 10명정도 부르는데 거기서 나눠줍니다. 사적으로 챙겨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형우 전 의원은 집에 가기 전에 불러서 바로 나눠줍니다. 돈이 들어오면 자기 손에 있는 일이 없습니다. 최형우 전 의원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고 의리가 정확했습니다."

박 전 본부장은 YS가 집권 직후 민산 해체 명령을 내린 것과 관련, "민산을 최형우가 발판으로 삼았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또 "민산이 해체 뒤에도 각 지역마다 산악회는 운영되고 있었다"면서 "그 영향력이 살아있었다"고 전했다. 앞서 그가 '1997년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가 500만표를 얻은 것은 민산 덕분'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형우, 진짜 의리의 사나이…한두번 만나면 충성심 생겨"

박 전 본부장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다. 그에게 세종시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 좁은 나라에서 세종시가 왜 필요합니까. 정부·부처가 세종시에 가면 인건비가 줄어듭니까. 세금이 줄어듭니까. 세종시는 지금이라도 취소해야 합니다. 과천에 해놓고도 안 된다고 하는 판입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각각 서울과 세종시에서 화상으로 회의를 한다고 하는데 그런 화상 회의를 하는 순간 도청될 것입니다. 제가 충청도 출신이지만 세종시는 잘못됐습니다."

그는 이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일화도 소개했다.

"13대 총선을 앞두고 부산에서 허삼수와 붙을 사람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김광일 전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을 이력서를 가지고 왔는데 사진도 없고 글씨도 사실 엉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노 전 대통령이 공천을 받고 당선됐습니다. 선거 직후 당선자 축하파티에서 제가 초선 줄반장이었는데 노 전 대통령 머리가 '산적'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렉스턴 호텔 지하 이발소에 데려가 이발을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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