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권선징악으로는 죄를 없앨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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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권선징악으로는 죄를 없앨 수 없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8.0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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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죄는 참말로 없다-2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다음에는 권선징악으로는 죄를 없앨 수 없다고 하는 함석헌의 말을 들어보자.

“종래의 모든 종교가 죄와 싸운 방법은 한마디로 하면 ‘권선징악’입니다. 선한 것은 될수록 상을 주고, 악한 것은 될수록 벌하여서, 세상에서 죄를 몰아내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세를 위해서는 부귀와 감옥을 두었고 내세를 위해서는 천당과 지옥을 두었습니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이것은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심이 개조되고 인생에서 죄가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인격은 자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자도 인간인 이상 자유를 요구합니다. 고로 마땅히 당할 벌인 것을 자인하면서도 (타의로) 벌을 당할 때는 반항하는 것이요, 마땅히 받을 상인 것을 자인하면서도 자기 행한 선에 대해 상을 줄 때는 양심은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거나) 반항하면 상벌의 의미는 없어집니다. 세상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은 이 반항하는 인격, 눌린 양심입니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눌린 양심입니다. 소화되지 못한 식물과 돌지 못하는 어혈이 체내에 독소가 되는 것처럼, 눌리고 벌 받은 양심이 인생사회에 가지가지 해독을 일으키는 독소가 됩니다.”

함석헌은 죄와 싸우는 데 가장 유치한 방법이 권선징악이라는 사실에 가장 먼저 착목한 이가 예수였다고 말한다. 고래의 모든 성현이 하지 못하던 것, 죄를 없애는 일을 그가 한 것은, 그가 참 사랑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했고,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히어 돌에 맞아 죽게 된 윤락의 계집을 그 앞에 세워도, 그는 죄인을 보지 않고 그 가슴속에 영원의 사랑의 님을 찾아 헤매는 깃이 상한 영혼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의 이 ‘알아주는 맘’이 죄인을 새사람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속죄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 곧 속죄의 경지인 것이다. 
 
함석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요컨대 형벌로는 죄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겉에 나타나는 사람의 죄를 보지 않고 그 사람 속에  맑은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주는 마음이 있어야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전통적인 대속이론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대속이론은, 형벌은 그 원인이 된 범죄를 없애버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야 성립하기 때문이다. 권선징악이, 곧 형벌이 죄를 없앨 수 없다면 십자가의 예수는 더욱 우리의 죄를 없앨 수 없다. 죄인을 처벌해도 형벌이 그 죄인의 죄를 없앨 수 없는데, 하물며 죄 없는 예수를 처벌하는 것이 어떻게 예수 아닌 다른 사람의 죄를 없앨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인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1969년에 출간한 <해석의 갈등>(Le Conflit des Interpretation)에서, 함석헌과는 다른 각도로 접근하면서, 형벌로는 죄를 없앨 수 없다고 말한다.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형벌 관념 속에는 어떤 신화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형벌로 죄를 속(贖)한다는 이론은 사실은 신화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형벌 신화라고 부른다. 사실이 아닌 신화로 죄를 없앨 수는 없다.

그에 따르면 죄는 도덕 악이고 형벌은 물리적 악이다. 죄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도덕 악이다. 따라서 외형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더라도 정당방위라면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행위이므로 처벌받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정신박약자나 과실범도 원칙적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이러한 원칙은 현대의 형법이론일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지켜온 원칙이다. 남에게 해악을 끼쳤지만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약시대에도 도피성을 설치했다. 형벌이 물리적 악인 점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형벌에 들어있는 고통은 마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육체적 문제다.

그렇다면 형벌로 범죄를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리적 악으로 도덕 악을 보상하여 지워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질이 다른 한쪽 악이 어떻게 다른 쪽 악을 없앨 수 있겠는가?  다만 죄인이 형벌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드릴 때에만, 그리하여 그의 양심이 범죄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때에만, 한 쪽 도덕적 선이 다른 쪽 도덕적 악을 보상하여 범죄를 없앨 수 있다. 
 
그런데도 종교에서 언제나 형벌이 범죄를 없앤다고 생각하는 것은 형벌이 속죄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신화의 옷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 리쾨르의 말을 들어보자.

“신성한 세계에서 흠과 정화의식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흠이란 무엇인가? 얽히고설킨 금기로 이루어진 질서에 때가 묻은 것이다. 정화의식은 그 때를 지우는 행위다. 정화의식 역시 제의 법에 따라 정해진 여러 가지 행위로 이루어졌는데, 그러한 정화행위는 흠 있는 행위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형벌은 그처럼 지우고 없애는 행위 가운데 하나다. 신성한 질서 속에 생긴 흠을 없애고 또한 그 흠의 결과를 없애는 것이 형벌이고, 그때 그 형벌을 속죄라 부른다. 그렇게 보면 신성한 세계에서 속죄는 상당히‘합리적’인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오성의 차원에서 분석할 때 형벌의 합리성을 찾을 수 없었는데 신성한 세계에서는 형벌이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폴 리쾨르의 말을 요약하면, 형벌이 범죄를 없앤다는 형벌논리는 오성의 차원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데, 종교의 차원에서는 어떤 신성한 힘이 작용하여 오성의 논리를 누르고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벌논리는 신화 차원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오성의 차원에서는 대속이론의 토대가 무너지고 만다. 대속이론은 신화적인 논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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