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 관계 [방과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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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관계 [방과후활동]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3.07.18 2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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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어떤 행위와 그 후에 발생한 사실과의 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는 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인과관계'의 뜻을 이와 같이 풀이한다. 하나 또는 수개의 사건이 특정 사건을 야기할 때 그 전후 사건간 관계를 인과관계라 한다.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이따금 목격되는 원인 불명 사건들도 그 배경이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 확신한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인간 사회에선 인과관계가 종종 조작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주된 원인은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가려지고, 부차적 원인이 핵심으로 지목돼 사건의 본질로의 접근이 어려워진다. 그렇게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가 반복되면 당해 사건은 물론, 앞으로 벌어지게 될 미래의 사건·사고들의 본질도 흐려질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사례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현재를 다스리고 수정해 미래를 준비하는 게 사회 발전의 기본인데, 인과관계를 누락·훼손시키는 건 그 기본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0년대 후반(특정될 수 있기에) 한 재벌 대기업집단 소속 화물운송 계열사인 A사, 화학 계열사인 B사와 C사 등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 당시 3사는 오너일가를 위한 한 사업활동을 영위하고 있었다. B사가 운영하는 대규모 공장에서 발생한 유해화학물질을 A사가 받아 유독물 보관·유통업을 하는 C사에게 운송해주는 방식이다. A사는 해당 대기업 총수의 부인이 최대주주로 있는 회사고, C사는 총수가 지분 100%를 보유한 업체다. 통행세, 비자금 조성 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제보자는 A사의 하청업체인 D사를 운영하는 대표이사였다. D사는 A사로부터 배차를 받은 물량을 지입차주들에게 나눠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수익구조를 갖고 있었다.

D사 대표가 제보한 내용은 전형적인 하도급 갑질 의혹이었다. A사가 단가를 후려치려고 하자, D사에선 오히려 단가를 인상해야 할 상황이라고 맞섰는데 이후 더욱 거센 단가 후려치기, 배차 빼기, 협박 등 A사의 갑질 횡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A사와의 오랜 분쟁으로 지친 D사 대표는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선택을 했다.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A사, B사, C사 소속 임직원들에게 수억 원의 금전을 상납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금융거래내역, 리베이트로 돈봉투를 건넸을 때 사진 등 증거도 존재했다. 그러자 A사에선 D사가 소속 기사들과 임금체불 문제로 갈등을 빚는 등 하도급법을 위반했다고 맞섰다. 단가를 둘러싼 양측 공방이 난타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D사 대표는 이 같은 이유로 회사에 가압류가 걸리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본지에 제보했다. 또한 A사가 운송용역계약 즉시 해지 사유를 만들고자 D사에서 일하는 기사들과 접촉해 의도적으로 노사 갈등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본격 취재에 돌입했다. 현장으로 찾아갔다. D사 대표 사무실엔 기사들 10여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D사 대표를 규탄했다. 기사들로부터 고액의 수수료를 수취하고, A사로부터 대기료와 어음 이자를 받기 위해 차에 짐을 실어놓은 뒤 고의적으로 일을 주지 않고, C사에서 반품 처리를 요구할 땐 중간에서 반품비를 받은 후 기사들에겐 한 푼도 주지 않는 등 갑질을 부렸다는 것이다. D사 대표는 A사한테 돈을 제때 받지 못해 급여가 미지급됐다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A사로부터 사주를 받고 일부러 갈등을 키우는 게 아니냐며 기사들을 향해 날 선 발언을 했다. 사무실은 난장판이 됐다. 기사들은 마시던 커피를 집어던졌다. 기자임을 밝히고 동석한 필자는 멱살이 잡혔다.  D사 대표의 끄나풀로 의심된다는 이유였다. 입회한 변호사가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필자의 '턱주가리'가 돌아갔으리라.

A사 관계자들과도 만났다. 이들은  D사 대표가 제기한 금품 수수 비리 의혹에 대해 내부 감사에 착수한 결과 한 직원이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다만, 단가 후려치기, 배차 빼기, 협박 등 갑질 의혹에 대해선 직원의 '개인의 일탈'이라고 선을 그었다. 특히 A사 측은 D사 대표가 갈취를 당했다는 금전 중 상당 부분이 D사 대표에게 다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자기네 직원과 D사 대표가 정산된 운송대금 중 일부를 빼돌려 나눠먹었다는 것이다. D사 대표도 이를 부인하진 않았다. 다만, A사가 중소기업을 위한 상생지원금으로 편성해 주는 돈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이 사건에서 상위성을 갖는 본질적 인과관계는 원청-하청-운송기사들로 이어지는 갑질의 연속으로 선의의 피해자(기사)가 생겼다는 것이다. 당시 본지가 입수한 A사와 D사 실무진, 운송기사간 문자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을 중의 을은 지입기사들이었다. 미지급된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양사 모두로부터 모욕을 받으면서도 이를 감내해야 했다. A사와 D사간 공방은 부차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원인은 원하청 관계자들의 욕망, 결과는 재하청 노동자들의 궁핍이었다. 부끄럽게도 이 같은 본질을 흐린 건 필자 자신이었다. A사와 D사의 진실게임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만 몰두하면서 인과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턱주가리가 돌아가도 쌌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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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관계를 누락·훼손시키는 건 언론뿐만이 아니다. 수백억 원 규모 회삿돈을 횡령해 감옥에 갖힌 한 재벌 대기업 E사의 총수가 2010년대 중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해 초부터 국회 의원회관에서 소문이 돌았기에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E사 대관팀은 이상하리만치 전·현직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인사들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본지가 파악한 인원만 10여 명에 달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당시 여당 중진의원 밑에서 일하던 보좌관들었고, 야권 출신도 소수 있었다. 목적은 구명(救命)이었다. 당초 E사 대관팀은 총수의 가석방을 노리고 대(對)국회 구명 로비를 펼쳤다. 친분이 있던 한 야권의 보좌관으로부터 이 같은 첩보를 입수해 취재에 들어갔고, 직접 눈과 귀로 확인했다. 여의도 국회 근처 횟집, 고깃집이 이들의 로비 주무대였다. 가석방은 입법부가 아니라 사법부의 권한이지만, 이후 유력 정치인들이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기업인 가석방를 공론화 시켰다. 이들의 무리한 공론화 작업에 기자들 사이에선 E사와 정부여당 차원의 '딜'(Deal)이 오간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이 같은 의혹을 제기하기 위한 취재 활동은 번번이 가로막혔다. 유무형의 압력이 분명히 존재했다. 간신히 기사를 보도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당시 E사 측은 구명 로비 활동과 관련 의혹들을 모두 부인했다. '당사에는 그럴 만한 능력도, 역량도 없다'는 게 공식 입장이었다. 필자가 횟집과 고깃집에서 직접 보고 들은 사항에 대해선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하며 일부 직원의 과잉 충성에 따른 개인의 일탈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후에도 유무형의 압력이 있었고, 해당 기사는 조금씩 '누더기화'되다가 끝내 자취를 감췄다. 핑계 같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E사 총수는 사면·복권된 상태에서 또다시 범죄를 저지른 상태였고, 그를 향한 여론이 너무나 좋지 않았기에 가석방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개월 후 특사가 이뤄졌다. 이후 E사 총수를 비롯한 고위급 관계자들은 미르·K스포츠재단 등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검찰 심문까지 받았다. 정경유착이 특사로 이어졌고, 그 특사가 또 다른 정경유착을 낳은 꼴이다. 그 인과관계가 세상에 제대로 공개됐다면 또 다른 정경유착은 없었을 것이다.

국가 차원의 조작 의심 사례도 있다. 최근 MG새마을금고 사태에 대한 국민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금융당국과 시중은행, 국책은행 등이 힘을 모아 조(兆)단위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기사들이 일제히 보도됐다. 새마을금고의 단기 유동성 지원에 적극 협조해달라는 금융당국의 요청에 각 은행들이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는 게 주요 골자다. '새마을금고 사태에 소방수로 나선 은행', '새마을금고 지원에 은행들이 뭉쳤다', '은행 지원에 진정 국면' 등 긍정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국내외 경기 둔화로 은행권도 힘겨운 시기에 국민들을 위해 자금을 지원한다니 참으로 훌륭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은행들이 새마을금고를 무상으로 도와주겠다는 게 아니다. 시중은행 등이 새마을금고에 자금을 지원한 방식은 '대출'이다. 새마을금고가 보유한 국고채 등 채권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준 것이다. 그렇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을 통화안정증권채권(RP) 매입이라고 한다(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금융당국은 이 대목에서 인과관계를 흐렸다. 새마을금고는 이번 사태가 벌어진 이후 보유 중이던 국고채를 매각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우리나라 국고채 금리는 단기간에 급격하게 상승했고, 국고채 금리가 상승하면 국고채 가격이 하락하기 마련이다. 국고채를 많이 보유한 금융사들 입장에선 새마을금고의 국고채 매각 러시를 어떻게든 막아야 자산을 방어할 수 있는 셈이다. 반면, 새마을금고 입장에선 국고채 가격이 더 떨어지기 앞서 빨리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하는 게 유리하다. 이 마당에 시중은행 등이 새마을금고의 국고채를 담보로 해서 새마을금고에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나섰다. 이 같은 구조를 금융당국 등에선 단순히 '시중은행이 새마을금고 지원에 나섰다'라고 홍보했다고 볼 수 있다. 

표면적인 인과관계는 새마을금고가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원인) 금융당국과 은행권이 자금을 지원했다(결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상은 보는 이에 따라서 전혀 다를 수 있다. 새마을금고가 유동성을 확보하고자 보유한 국고채를 지속적으로 매각하면 국고채 가격은 하락하고, 국고채 금리는 상승하게 된다. 국고채 금리가 상승하면 한국은행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더라도 전반적인 금리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침체기에 접어든 내수 시장엔 치명타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 금융사들, 특히 국고채 보유량이 많은 증권사와 보험사들에겐 자칫 악몽과도 같은 일이 벌어질 여지도 있다. 이미 새마을금고가 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국고채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국고채 금리가 단기간에 치솟았고, 국고채 가격은 하향곡선을 그린 바 있다.

즉, 이 사건의 인과관계는 새마을금고가 어려워서 은행권이 지원에 나섰다가 아니다. 새마을금고의 국고채 매각이 원인이고, 이에 따른 국고채 가치 하락과 금리 인상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새마을금고의 국고채 매각을 막기 위해, 새마을금고가 보유한 국고채를 담보로 삼아 은행권이 돈을 빌려준 게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가정 하에서 금융당국과 시중은행은 새마을금고 사태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고자 자금을 지원해줬다는 식으로 인과관계를 재구성한 것이고, 실상은 국고채 방어를 위한 결정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상당하다는 생각이다. 나중에도 비슷한 일이 생길 것이고, 경우에 따라선 다수의 선의의 피해자들이 발생할 공산이 커 보인다.

지난 13일 기획재정부는 모집 방식 비경쟁인수를 통한 국고채 발행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재부 측은 "국고채 발행실적과 최근 재정 소요, 국고채 수급 여건 등을 감안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원인은 뭘까. 인과관계를 파헤쳐야 한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 '날벼락'에도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아는 이들은 날벼락이 아니라 '마른 뇌전'이라 부른다.

 

*'방과후활동'은 기자의 과거 취재기를 통해 현재 이슈를 바라보는 기자칼럼이자 회고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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