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정치 [방과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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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정치 [방과후활동]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3.07.07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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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나라는 행정력은 3류, 정치력은 4류, 기업 경쟁력은 2류로 보면 됩니다."

-1995년 4월 13일,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치부 소속으로 국회를 출입하던 때의 일이다. 2014년 11월 19대 국회 소속 광주·전남 국회의원들은 '광주~완도간 고속도로 건설사업' 내 광주-해남 구간의 즉각 착공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기자회견에 참여한 국회의원은 총 20명, 이중 19명이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계 인사들이었고, 나머지 1명은 전남 신안 출신의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소속 비례대표 주영순 의원이었다. 정론관에서 기자회견문을 살펴보는데 의아한 부분이 하나 보였다. 의원들 명단이 적힌 곳에 새누리당 최고위원인 이정현 의원의 이름이 적혔다가 검정색 펜으로 덧칠돼 지워진 것이다. 경위가 궁금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정론관에서 나가는 박지원 의원을 붙잡고 물었더니 "잘은 모르겠는데 이 최고가 빠지겠다고 했다고 들은 거 같다. 실무진에게 물어보라"고 답했다. 기자회견을 담당했던 비서관도 비슷한 답변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이정현 의원은 보수정당 소속으로 호남(곡성·순천)에서 당선된 스타 정치인이었고, '박근혜의 복심'이란 별칭까지 붙을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됐다. 실제로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호남 재선(비례대표까지 3선)에 성공해 당대표까지 역임한 바 있다. 이 같은 정치인이 유권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 인프라 사안에서 제 발로 물러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정현 의원실에 문의했더니 뜻밖에 대답이 돌아왔다. "새정치민주연합 쪽에서 기자회견 당일 오전에서야 연락이 왔다. 이미 이 의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서류를 내밀고 일방적으로 동의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이 의원과는 아무런 논의 과정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주영순 의원도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냥 참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들었다." 대한민국 국회 정치가 이 정도 수준이었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의원실 관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로 몸담은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소통의 '오류'(誤謬)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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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 계획을 놓고 우리나라 국론이 분열됐다. '안전기준 부합'이라는 내용이 담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는 되레 대립을 키웠다. 정부여당과 그 지지층은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선동으로 규정했다. 이래도 과학을 믿지 못하느냐는 논리다. 야권과 그 지지층은 일본과 IAEA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일본 당국이 제시한 데이터·시료만을 반영해 작성된 IAEA 보고서는 오염수 방류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느냐는 별론으로 하고, 분명한 건 이 같은 국론 분열 속에서 국민들 대다수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여론조사업체 한국갤럽이 지난달 27~29일 전국 성인남녀 1007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진행해 내놓은 결과에 따르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우리나라 해양·수산물을 오염시킬까 '걱정 된다'는 응답이 78%(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달했다.

소통의 오류다. 오염수 방류는 우리나라 정부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사안이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사실상 일본 편을 들어줬고, IAEA라는 국제연합 기구가 사실상 오염수 방출을 허용했다. 일본 정부가 하겠다면 하게 되는 판이 깔렸다. 이 판국에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대외적으론 반대 목소리를 분명히 내면서 미일로부터 얻을 것들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내부적으론 오염수 방류의 불가피함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면서 국민 불안감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국민들로 하여금 마치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인식할 수밖에 없는 행보를 지속했다. 오염수가 방류되기도 전에 수산시장을 찾아 회를 먹고, 수조물까지 마시는 장면은 국민들에게 실소만을 안겼다. 소통의 오류에서 나아가 소통의 실패라고 해도 무방해 보일 정도다.

이젠 급기야 소통의 단절 사례마저 보인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김건희 여사 일가를 향해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2021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해당 사업의 원안 노선에 대해 올해 5월 국토교통부가 대안 노선을 내놨는데, 그 대안 노선상 종점인 양평JCT(가칭) 근처에 있는 남양평IC를 중심으로 반경 5km 내에 김 여사의 모친, 오빠, 언니, 동생 등 가족과 가족회사가 축구장 5개 크기에 해당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의혹 제기에 바탕이 된 기사를 보도한 KBS 측은 "만약 국토부의 대안 노선대로 착공이 이뤄졌다면 김건희 여사 일가가 보유한 29개 필지 역시 서울 강남권과의 접근성 개선으로 상당한 토지가치 상승 수혜를 입을 수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그러자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원 장관은 "김 여사 땅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사건 전에 조금이라도 인지한 게 있다면,  이와 관련해 권력층으로든 국회의원으로부터든 민간이든 청탁, 압력받은 사실이 있다면, 이에 대해 내 휘하에 사업 업무 관여자들이 구체적 보고·지시받은 게 있다면, 장관직은 물론,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다. 해당 사업은 양평 지역민들의 숙원 사업이자, 교통난을 해소시켜 국민 편의성을 제고할 수 있는 국책 사업이다. 이미 예타 조사까지 마쳤다. 정부여당에선 '소설'이라고 규정하는데, 의혹이 제기된 배경을 살펴보면 국민 눈높이에선 '합리적 의심'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는 생각이다. 정치 생명과 사업 백지화를 운운하면서 마치 양평 지역민들을 겁박하는 것 같은 발언을 앞세울 게 아니라, 왜 이런 대안 노선이 나왔는지 국민들 앞에 설명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아예 소통의 단절을 택했고, 주무부처 장관은 국민 편의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업의 중단을 선언했다. 이쯤되면 국토부와 원 장관이 최근 창끝을 겨눈 GS건설이나 호반건설과 같은 기업들이 더 나은 모습을 보인 게 아닌가. 이들은 적어도 잘못을 시인하고 입주예정자들을 위해 개선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거나, 소상히 해명했으니 말이다.

생각은 사람마다, 진영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사회적 다양성이 확대되면서 이해관계도 더욱 복잡해졌다. 찬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고,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의혹 제기와 상호 비방이 난무한다. 그래서 국가가 존재한다. 그래서 중앙정부가 존재하고, 지자체가 존재하고, 정치인이 존재한다.  이들에겐 이 같은 반목과 갈등을 중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대안을 제시해 통합과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수단은 소통이다. 정치의 모든 게 소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권은 진영간 소통은 물론, 국민과의 소통까지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

30년 남짓 흘렀는데 한 단계 더 떨어졌다. '오류'(五流)다.
 

*'방과후활동'은 기자의 과거 취재기를 통해 현재 이슈를 바라보는 기자칼럼이자 회고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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