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노회찬 5주기…‘머리에서 심장으로’ 정치 꿈꾼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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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노회찬 5주기…‘머리에서 심장으로’ 정치 꿈꾼 휴머니스트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3.07.23 2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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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 본령은 영혼을 가지고 진심으로 행하는 실천”
청소노동자부터 시각장애인, 소방공무원 위한 입법 힘써
한글로 된 국회의원 배지 달기…카드 수수료 인하 운동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故 노회찬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지 5년이 됐다. 사진은 故노 전 의원이 2016년 8월 17일 시사오늘과 인터뷰를 갖던 모습. ⓒ 시사오늘
故 노회찬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지 5년이 됐다. 사진은 故노 전 의원이 2016년 8월 17일 <시사오늘>과 인터뷰를 갖던 모습. ⓒ 시사오늘

故 노회찬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된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진보 정치를 꿈꾸는 이들의 마음 한켠에 여전히 남아있다. 

노회찬 재단은 노회찬 5주기 추모를 맞아 추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2일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마석 모란공원에서 노회찬 5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추모 슬로건은 ‘같이 삽시다. 그리고 같이 잘 삽시다’로, 그가 2016년 7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한 말에서 비롯됐다. 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고,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이 있었다. 

조승수 노회찬재단 이사장은 이날 인사말에서 ‘노회찬의 꿈’에 대해 말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을 달리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이 없는 세상, 성실하게 이 땅에서 일해서 살아간다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한국 사회가 도달한 경제력 수준에 걸맞은 복지 혜택을 받는 복지국가, 순환가능한 생태사회가 노회찬이 꾸던 꿈이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운데)가 22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노회찬 5주기 추모제에서 심상정 의원(왼쪽에서 세번째) 등 정의당 관계자들과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운데)가 22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노회찬 5주기 추모제에서 심상정 의원(왼쪽에서 세번째) 등 정의당 관계자들과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추모사에서 “분명한 것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다른 내일에 노회찬 대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라며 “정의당이 무너지면 노회찬 정신이, 그가 지키려 했던 사회 약자의 삶이 무너진다는 각오로 임하겠다. 더 크게 슬기롭게 단단히 마음먹고 이기겠다”는 다짐을 함께 밝혔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지난 6월 정의당 재창당 선언과 함께 “노회찬의 ‘6411 정신’ 빼고는 다 바꾼다”고 말한 바 있다. 노 전 의원은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 연설에서 새벽 4시에 6411번 버스를 타고 강남 빌딩으로 출근하는 청소 노동자에 대해 언급했다. 

누구도 새벽 4시와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서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 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 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

이들은 아홉 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 온 수많은 투명 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2012년 10월 21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 연설 中

그의 ‘6411번 버스’ 연설은 한국 사회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많은 노동자를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노 전 의원의 생전 정치 활동에 모두가 지지를 보내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가 한평생 노동자, 사회적 약자,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대변하며 진보 정치의 기틀을 다지는 데 바쳤다는 것은 여야 모두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는 19대·20대 국회 첫 공식 일정으로 국회 청소노동자와 함께 점심식사 시간을 가지며 휴게실을 잃은 그들에게 정의당 사무실을 함께 쓰자고 제안했다. 시각장애인 안마사 제도 부활 입법에 힘썼으며, 성전환자의 입양권 보장을 요구하며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학대 아동 법적 보호를 위한 국선 변호사 선임 의무화, 소방 공무원 국립묘지 안장과 보훈 대상자 지정, 재소자 권익과 편익 증진을 위한 관련 입법 등 국가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구석을 찾아 보호망을 만들고자 했다. 

2005년부터 매해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주변에 장미꽃을 선물하는 이벤트를 꾸준히 진행한 것, 한자 ‘國(국)’ 자가 들어있는 국회의원 배지가 아닌 한글문화연대·한글사랑 대학생 동아리로부터 선물 받은 한글로 ‘국회’가 쓰인 배지를 착용한 사례도 노회찬의 단면을 보여준다. <시사오늘>은 노회찬 5주기를 맞아 그의 많은 정치 업적 중 일부를 조명해 보려 한다. 

 

경기고 시절 ‘박정희 유신 독재 반대’ 유인물 살포
인민노련서 노동운동부터…‘진보정당’ 건설 꿈까지
2004년 총선 앞 ‘판갈이론’…촌철살인 정치언어 시작


1956년 8월 31일 부산에서 태어난 노회찬은 1973년 경기고 재학 시절 박정희 유신 독재 반대 유인물을 교내에 살포하는 등 정치 활동을 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를 명했는데, 소년 노회찬은 이날을 후에 정치인 노회찬을 형성한 계기가 된 일 중 하나로 꼽곤 했다고 한다. 

“노회찬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통령은 말 한마디로 간단하게 헌법을 위반했는데, 그럼에도 세상은 조용했다. 그는 다음 날 엄청난 데모가 일어날 줄 알았다. ‘아니, 이래도 되는 건가? 대통령이 헌법을 어겼는데 왜 조용하지?’ 4·19 같은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믿었던 그는 사회의 침묵에 짙은 배신감을 맛봤다.”

- 이광호 <노회찬 평전>, 67~68쪽

1979년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한 노회찬은 노동운동을 통한 사회 변혁을 꿈꿨다고 한다. 1981년 여름, 고창의 한 절 참당암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성찰 또 성찰한 뒤,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에 들어가 용접 기술을 배운다. 보일러회사, 공장 등 현장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노회찬으로서는 그가 유일하게 스승으로 존경했던 신영복이 말한 ‘머리에서 심장으로의 긴 여행’을 한 것이었다. 그 긴 여정에서 그는 직업학교 학생으로, 용접 기능공으로, 활동가로 ‘가족보다 중요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시간과 사람들이 그를 바꿨다. 

참당암에서 내린 실존적 결단이 이성, 논리, 대의를 바탕으로 그린 삶의 지도에 관한 것이었다면, ‘충격’을 던져준 노동 현장은 그 지도를 보고 도착한 구체적 공간이었다. 지도가 아닌 현실의 장소에서 그는 자신의 길,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그런 자각과 깨달음이 노회찬에게는 구원이었다.

‘진보정당 운동의 본령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계산된 행위가 아니라 영혼을 가지고 진심으로 행하는 실천’이라는 인식은 그 여행이 노회찬에게 준 고귀한 선물이었다. 젊은 날 노회찬의 선택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가 운동을 일찍 시작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평생 변치 않고 그 길을 갔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좋아했고, 잘했다. (…)

‘내가 왜 잘되지 않는 일(진보정치)을 계속하는지 아냐? 진짜 좋아하는 일이라서 그래.’”

- 이광호 <노회찬 평전>, 134~135쪽

노회찬은 용접 노동자가 되어 인천으로 갔다. 1987년 6월 출범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서 조직책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당 건설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1989년 12월, 노회찬은 국가보안법상 이적 단체 가입 혐의로 구속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던 시기였다. 

감옥에서 2년 6개월을 사는 동안 노회찬은 해바라기를 심었다. 그는 뽑히고, 밟히기를 반복한 그 해바라기 씨앗을 가지고 출소한 뒤 부산 집 마당에 심었다고 한다. 노회찬은 출소 직전인 1992년 3월 25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님, 어머님! 인간이 인간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을 근절시켜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그런 사회운동, 정치운동을 펼치는 것이 바로 저의 직업입니다”라며 ‘직업정치인’으로 활동하겠단 의지를 강조했다.

감옥을 나온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에 매진한다. 인민노련, 한국사회주의노동당, 한국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 진영에 남은 인사들이 모여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결성한다. 노회찬은 1992년 대선에서 무소속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본부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1997년 대선에선 국민승리21 중앙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당시 대표 등이 2001년 7월 20일 당사에서 1인2표제 전국단위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연합뉴스
민주노동당 권영길 당시 대표(사진 가운데)와 노회찬 전 의원(오른쪽) 등이 2001년 7월 20일 당사에서 1인2표제 전국단위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연합뉴스

그리고 2000년 1월 30일, 노회찬이 인생 목표의 절반을 이뤘다고 말할 정도로 간절히 꿈꿨던 진보정당이 세상에 나왔다. 후에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정의당으로 이어진 ‘민주노동당’이었다. 노회찬은 2002년 지선과 대선,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성과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사이 노회찬은 1인 1표로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을 선출하던 기존 선거법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청구하고 1인 2표제가 도입되도록 힘썼다. 민주노동당은 1인 2표제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민주노동당은 3회 지선에서 정당 득표율 8.13%를 얻어 제3당으로 올라섰다. 그해 대선에선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3.9% 득표율을 기록했다. 

열린우리당 창당,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던 2004년, 노회찬은 18대 총선에 사활을 걸었다. 그해 3월 20일 KBS <심야토론>을 시작으로 그의 촌철살인 정치 언어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 국민들도 50년 동안 썩은 판을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한국의 야당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죽인 것이 아니라 다 자살했습니다.” “열린우리당의 높은 지지율은 길 가다가 지갑을 주운 것처럼 횡재한 건데, 이거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날 토론에서 노회찬이 한 말이다. 다음날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노회찬의 이름이 올라왔고, 언론도 주목했다. 민주노동당의 지지율도 함께 높아졌다. 그해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득표율 13%를 얻어 지역구 2석, 비례 8석 총 10석 의석을 확보했다. 노회찬은 비례대표 8번으로 마지막 당선자였다. 김종필은 자민련 비례대표 1번이었음에도 불구 낙선했다. 17대 총선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고 김종필이 퇴장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 선거다. 

17대 국회 개원을 맞아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2004년 5월 31일 오전 국회에 등원하고 있다. ⓒ 연합뉴스

노회찬은 2004년 5월 31일 17대 국회 개원 첫날 취재진에게 “당사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는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 서민들 노동자 농민 대표가 여기까지 오는 데 사실 50년이 걸렸다. (…) 정치적으로 오는 데 50년이 걸렸다”는 소감을 말했다.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은 정책 대결에서 경쟁력을 갖추고자 했다. 보좌진과 정책연구원 100명을 공개 채용했다. 의원들은 월급을 180만 원으로 하고, 그 외의 세비 전액을 중앙당에 납부해 정책개발에 기여하고자 했다.

노회찬은 17대 국회 기간 미군기지 이전 협상 과정에서의 불평등성을 지적하고, 삼성 X파일 사건 관련 떡값 검사 리스트를 공개했다. 전관예우 문제를 지적하며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고,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는 말을 남겼다. ‘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 입법 운동을 벌여 자영업자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는 진보 정당 정치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당 안에서 정파 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조정하거나, 조직적 지지를 얻는 데는 약했다.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3위를 해 대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당내 자주파가 노회찬을 향해 네거티브 공격을 하는 등, 분열의 조짐도 있었다. 하지만 노회찬이 당시 대선후보 경선에서 들고나온 ‘제7공화국’ 공약은 그의 정치적 지향점을 보여주기에 잠시 살펴보겠다. 

“노회찬은 7월 선거대책본부 출범식에서 ‘제7공화국 건설 운동’을 선포했다.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돌파하겠다는 정치적 지향이었으며 주류 386세대들이 1987년 체제의 완성, 즉 민주화 담론에 머물러 있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한국 사회를 만들자는 의지를 품은 작명이었다. (…)

구체적인 내용은 ‘제7공화국 11테제’라는 제목의 공약으로 발표됐다. ‘11테제’는 평등과 통일을 양대 가치로 하고 반(反)신자유주의, 교육·의료·주택·일자리의 국가 완전 보장, 통일, 탈동맹 평화, 차별 철폐, 기간산업 사회화, 동일노동 동일임금, 식량주권, 성평등, 녹색국가, 국민주권 등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교육·의료·주택·일자리를 국가가 책임져야 할 4대 기본권으로 못 박았다. 노회찬은 교육공개념, 의료공개념, 주택공개념, 일자리공개념 등 새로운 ‘개념’을 내세웠다. (…) 제7공화국에 공약에 대한 노회찬의 설명이다. 

외형적 정치민주화는 이뤄졌지만, 사회 양극화는 꾸준히 증대됐다. 비정규직 850만, 자영업자 650만, 이 현실이 지난 20년 동안의 정책 실패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다. 4번이나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기득권 세력, 강자에 의한 신자유주의 노선은 일관되게 이어졌다. ‘7공화국’이라는 것은 이러한 지난 20년과 단절하겠다는 것, 이 20년을 청산하겠다는 것이다. 정책 기조와 철학이 근본적으로 다른 반신자유주의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경제 노선의 변화다.”

- 이광호 <노회찬 평전> 355~356쪽.

노회찬은 2008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다. 노원구병에서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에 밀려 2443표(3.05%p) 차이로 낙선한다. 비록 패배했지만, 노회찬의 정치는 계속됐다. 그는 총선 7개월 뒤인 11월 노원구 상계동에 노회찬마들연구소를 만들고 지역 활동을 활발히 했다. 2012년 통합진보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해 노원병에서 57.2% 득표율로 당선됐으나, 다음 해 2월 대법원은 그가 삼성 X파일 사건 관련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며 최종적으로 유죄를 선고한다. 노회찬은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 사이 심상정, 유시민 등과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진보정의당으로 당적이 바뀌기도 했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 선거 동작을 후보로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나경원 후보에 929표(1.2%p) 차이로 패한다. 20대 총선에선 창원시 성산구에 출마해 새누리당 후보와 10% 이상 차이를 벌리며 당선돼 3선 의원이 된다. 2016년 12월 9월 국회에서 통과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발의자 명단에 정의당 원내대표였던 노회찬도 이름을 올렸다.  

2018년 7월 23일 오후 9시 38분경, 노회찬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당에 남긴 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000만 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노회찬의 장례는 7월 26일 국회장으로 치러졌다. 7월 27일 발인 후 장례 행렬은 여의도 국회를 향했다.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국회에서 노회찬의 운구차를 배웅했다. 4시 30분, 노회찬은 마석 모란공원에 묻혔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노회찬의 배우자이자 유족대표인 김지선 선생은 5주기 추모제에서 노회찬이 세상을 떠난지 5년이 지났지만, 그 사실이 아직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일상 활동은 하는데 현실감이 없을 때가 많다. 열심히 사람도 만나고 해야하는데, 아직도 잘 못하겠다. 고마운 분에게 인사드려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다. 양해 부탁드린다”며 동지들에게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노회찬은 너무 꿈이 많았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현실은 너무 어렵고, 국민도 힘들어하는 상황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 이정미 정의당 대표도 와 계시는데 넓게, 깊게, 천천히 가더라도 확실하게 가는 걸음을 내디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회찬이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여기 계신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노회찬을 많이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저도 열심히 잘 살아내겠다고 약속드리고, 유족을 대표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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