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진 “6월항쟁 주역, DJ 아닌 YS” [6월항쟁 되짚기⑯]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인명진 “6월항쟁 주역, DJ 아닌 YS” [6월항쟁 되짚기⑯]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3.10.29 2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 걸쳐
 개신교가 민주화운동 실질 역할
 국본 만들어 6월항쟁 성공시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개신교야말로 6월 민주항쟁의 실질적 주역이에요.”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교회)의 말이다.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다는 듯 목소리에 힘이 팍 들어갔다. 인터뷰에 응한 목적도 그 점을 각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됐다.

“최대 주역은 개신교지. 개신교.”

- 왜 그런가요?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만든 것도 개신교잖소. 사무실을 어디에 뒀는지 알아?”
모른다. 

 

국본의 태동 


지난 8월 서울 장충동 카페에서 만났을 때다. 막 자리에 앉은 그의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한창 열변을 토하다 주섬주섬 휴지로 이마를 닦는다. 문득 카페 너머를 흘겨봤다. 지글지글 탈것처럼 무더위가 한창이었다. 인 목사는 얼마 남지 않은 냉커피를 들이켰다. 벌컥벌컥. “사무실을 어디에 뒀는지 알아?” 다시금 물어온다.

- 어딘데요?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312호.”

또박또박 번지수까지 읊는 모습이 선명하니 빛이 났다. 옛 기독교방송 건물이라고 했다. 몇 해 전 혜화동을 지나다 본 기억이 났다. 

“나는 여기를 민주화운동 사적지로 지정해야 한다고 봐요.”

딱 잘라 말했다. 

6월항쟁의 구심점이 돼줬던 국본은 범국민운동기구와 같았다. 첫 태동된 곳이라면 역사적 의미가 있지, 있어. 속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이재오 전 의원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이 됐잖소.”

재야를 호령하던 이 전 의원도 그 시절 국본에 참여했다. 서울 민통련 의장 자격으로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건의할 참이에요.”

인 목사와 이 전 의원 모두 민주화운동 역사의 산증인들이다. 켜켜이 쌓아온 세월만큼 어딘지 

이 전 의원을 대하는 분위기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4·13호헌 조치가 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범국민조직이 국본이잖소.”

인 목사가 다시금 환기해왔다.

“11개 단체가 참여했는데 우리가 제도권부터 심지어 법조계 끌어들이고, 천주교 끌어들이고, 불교 끌어들여 만든 거예요.”

1987년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발기인대회를 가졌다. 여러 장소가 물망에 올랐지만 경찰의 살벌한 감시를 피해 가까스로 결정된 장소가 향린교회였다. 

“상임집행위원장도 개신교에서 맡고 국본 운영에 필요한 돈도 다 댔어요.”

쐐기를 박으려는 듯 

“6·10항쟁 전국화도 개신교에서 다 조직했고요.”

말끝마다 개신교에서 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잊기가 무섭게 작정하고 말해줄 요량이었다.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발기인 대회가 열리던 그날. 

집행위원장인 오충일 목사의 주재 아래 최형우·김동영·양순직·계훈제·박형규·김상근 등 각계 2191명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향린교회로 모여들었다. 민통련의 성유보, 기독교의 황인성 천주교의 이명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의 김도현 이렇게 4인방이 실무를 맡았다. 

국본은 이후 6월항쟁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에 이어 급기야 체육관 선거가 강행되던 6월 10일에는 전국 도처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시민들도 직선제 쟁취의 물결 속으로 뛰어들어 커다란 인의 장막을 쳐내려갔다. 위협을 느낀 군 당국은 점점 수세에 몰려갔다. 그러기까지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지역 조직을 주로 담당해 힘을 확산시켜 나갔다고 인 목사는 설명했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은 개신교에서 다 했다고 보면 돼요. 불교는 참여를 거의 안 했어요. 천주교는 소극적이었고….”

- 대중 인식은 천주교가 더 많이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걸요? 

“천주교 사람들은 참석을 잘 안 했어요. 우리로서는 구색을 갖춰야 하니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좀처럼 신부들이 오지를 않았어….”

- 근데 왜 천주교에 대한 인상이 더 강하게 남은 걸까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함세웅 신부가 꽤 오래했잖소. 천주교 중심으로 알려진 게 아닌가 싶어요.”

나름대로 유추했다. 그러다 불쑥 “우리나라 언론은 이상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 왜요? 

“개신교는 무시하고, 천주교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많아요.”

표정에서도 못마땅함이 느껴졌다. 기자가 볼 때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신부 중에서는 명동성당의 김승훈 신부가 대표적으로 열심히 하긴 했어요.” 내심 너무 기독교만 강조해왔다고 느꼈는지, 이 말을 보태왔다. 

김 신부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이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식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됐다고 세상에 처음 알렸다. 

 

6월항쟁의 서막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천주교를 통해 폭로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경로를 거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3인천사태 주도 혐의로 감옥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 <동아일보> 해직기자는 우연한 계기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똑같은 내용으로 각각 몇 통의 쪽지를 썼다.

세상 밖으로 나온 서신은 극비리에 손에 손을 타고 장기표 선생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김정남 선생, 상도동계 김덕룡 YS(김영삼)비서실장 등에게 전달됐다. 

전두환 정권은 경찰에 연행된 박 군에 대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며 사고사인 것처럼 위장했다. 건네받은 쪽지에는 이 모든 것이 조작됐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경찰이 꾸민 거짓말을 뒤집으려면 전략적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처음엔 정치권에서 발표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 우려됐다. 결국, 고민 끝에 종교계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 방법으로 우회하게 됐다는 전언이었다. 

이윽고 거사일이 다가왔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맨 먼저는 김수환 추기경의 쩌렁쩌렁한 꾸짖는 것 같은 목소리가 명동성당 안을 가득 울렸다. 마치 전두환 정권을 향해 죄를 묻는 것처럼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다음으로 김승훈 신부가 억울하게 숨진 박종철 군의 죽음에 대한 전말을 알렸다. 못다 핀 청춘의 비극 앞에서 국민은 분노의 민심을 드러냈다. 마그마가 임계점에 다다른 것처럼 활화산은 뜨거웠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실상 진작부터 국민은 이골을 내고 있던 참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좌절된 이후부터 줄곧 대한민국은 무채색의 겨울을 몇 해나 반복했다. 지겨운 계절이었다. 

한번은 참다못해 첫 번째 국민적 저항이 터져 나왔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였다. 

제도권 안에서부터 불을 댕긴 역사적 저항이었다. 

단식투쟁 끝에 가택연금을 풀고 범정치결사체인 민추협을 조직한 YS는 선거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다. 

2월 12일 선거일이 다가왔다. 투표율부터 놀라웠다. 무려 84.2%라는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국민적 표심은 선명 야당 노선의 신당을 연호하고 있었다. 단숨에 제1야당이 탄생됐다. 선거혁명이라 부를만했다. 

신민당의 승리는 단지 한 정당만의 쾌거가 아니었다. 개구리가 개굴개굴 경칩에 울 듯 각계는 동면에서 깨어나 꿈틀대고 있었다. 저항적 분위기를 감지한 군사정권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학원안정법부터 만들어 대학가를 옥죄기 시작했다. 사회적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최루탄을 쏘아댔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인천5·3사태, 건대 사태 모두 좌경용공세력으로 몰아 곤봉을 휘둘러댔다.

“기독교계에서 보다 못해 용공조작고문대책위원회를 만든 겁니다.”

인 목사가 자초지종을 얘기하다 마른침을 삼키고는 그 시절을 떠올렸다. 

강경진압 일변도 속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폭로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졌다. 개신교를 필두로 정치권과 종교계 재야 등이 모여 공동대책위를 구성했다. 정확히는 용공조작고문대책위였다. 

하루는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고문폭로까지 이어졌다. YS-DJ를 비롯해 계훈제, 김명윤, 최형우 등이 고문공대위에 참여했다. 양심수 석방과 민주화 조치 단행을 촉구했다. 개신교에서는 폭력추방을 위한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범대중 운동은 자연스레 개헌 투쟁으로 확산해나갔다.

“그 또한 개신교에서 앞장섰어요.” 

인 목사는 잊어먹을 새라 꾹꾹 눌러 담았다. 관련해 더 소상히 묻지 않다가 나중에서야 자료를 찾아봤다. 
 

“신민당뿐 아니라 민족민주운동 진영도 제5공화국 헌법 철폐와 개헌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86년 가장 첨예한 정치 현안으로 부각됐다. 연초인 1월 12일 함석헌, 김재준, 박형규, 이돈명, 문익환, 이우정 등 재야인사 22명은 기독교회관에서 <조국의 위기 타개를 위한 우리의 제언>이라는 제하의 원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원로들은 ‘오늘의 이 암담한 정국을 수습하는 길은 정부와 집권당이 진정한 민주헌법으로 개정할 분명한 의사를 표명하고 구체적인 일정을 발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정부에 헌법을 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사회적 개헌서명운동이 본격화할 움직임을 보이자 치안본부는 개헌투쟁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하지만 목협은 각 지역의 목회자들 대상으로 개헌서명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고, 민주헌법쟁취위원회(본부장 장성룡 목사) 산하에 서명추진본부를 조직했다. 

2월 11일 당국이 경찰병력을 동원해 무산시키자, 2월 12일 신민당이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했고 2월 17일 박형규, 고영근, 김상근, 김동완, 오충일, 허병섭 목사 등은 다시 모임을 시도해 기독교민주헌법개정서명추진본부를 결성했고 공식적인 교단이나 NCC 차원에서 운동을 전개했다.”
- <6월항쟁과 국본> 중 황인성 간사 편 중-


전국적으로 민주개헌서명운동 본부를 결성하고 개헌서명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방방곡곡 동참운동이 일어났다. 자신감을 얻게 되자 KBS시청료 거부운동까지 병행했다.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본에 이르게 됐다는 얘기였다.

 

“또 다른 주역 YS”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국본 대변인을 맡았을 때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때는 나만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어.”

- 왜요.

“많이들 잡혀갔어요. 아니면 수배중이라 잠수를 탔고 말예요.”

- 같은 처지였을 것 같은데요.

“웬걸. 나한테도 체포영장이 떨어졌지.”

- 근데 왜….

“나는 대변인이잖아요. 30여명 외신기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으니까 못 잡아가더라고. 그 시절 어떤 상황이었느냐면 6월항쟁 관련해서는 오직 대변인인 내 입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었어요.”

흥분한 듯 목소리가 커졌다.

본의 아니게 사실상 대표 역할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무슨 결정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없으니 나 혼자라도 지휘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 말을 하다가 퍼뜩 생각이 났는지 “그런데 YS는 매일 사무실에 찾아오긴 했어요.”

YS는 국본을 지원하고 있었다. 

- 와서는 뭘 했습니까. 

“‘강경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하더라고. 그 기개를 보고 내가 놀랬어요.”

혀를 내둘렀다. 

“분위기가 흉흉했을 때거든요. 계엄령이 선포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단 말이에요.”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모를 만큼 배짱이 좋았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재야에서는 YS를 동지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인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재야는 DJ와 가까웠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YS를 다시 보게 된 거예요. 대단한 사람인줄 처음 안 것이지. 이후 내가 어디 방송 나가면 그랬어요. ‘6월항쟁의 주역은 DJ가 아닌 YS다.’ YS 차남 김현철 씨한테도 ‘당신 아버지가 6월항쟁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DJ는 가택연금 중이었다. 

“나는 원래 DJ와 굉장히 가까웠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분은 겁이 났던 것 같아.”

곰곰이 복기하듯 읊조렸다. 

“나한테 전화해서는 강경 투쟁하면 안 된다, 자제하라고 말리고는 했어요.”

- 왜 그랬을까요.

“오죽 탄압을 받았으면 그랬겠어. 계엄령이 나면 자기는 또 잡혀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잖소?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해요.” 

사형선고까지 받다 극적 망명 후 귀국한 뒤에는 가택연금까지…. 전두환 정권에서의 그의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다고 느꼈을 터였다.

“그렇겠네요.”

고개가 끄덕여졌다.

야권단일화 책임론 

이야기는 6·10항쟁을 거쳐 영수회담과 6·29선언을 향해갔다. 

“그러기까지 6월항쟁 전략을 YS와 나, 우리 둘이 의논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은 우리밖에 없었다고 봐도 돼요.”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인명진 원로 목사(갈릴리 교회)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의 최대 주역은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마침내 얻은 87체제. 

- 아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야권단일화가 아쉽지.”

6월항쟁 관련 인터뷰마다 공통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그때 두 파로 나뉘었어요.” 

하나는 DJ에 대한 비판적지지, 다른 하나는 후보단일화파였다.

“후보단일화는 이재오 전 의원, 돌아가신 조영래 변호사가 주축이었어요. DJ에 대한 거부반응이 많을 때니까 YS 5년하고, DJ 5년하고 이렇게 10년 하자는 거였죠.”

당시만 해도 DJ에 대해서는 영남·기업인·군인·공직자가 반대해 안 된다는 4대불가론이 나돌던 때였다. 하지만 상황은 예기치 못하게 돌아갔다. 

“한창 단일화 교섭이 이뤄지고 있는데 야권단일화를 요구하던 문익환, 안병무, 문동환 목사 등이 일방적으로 DJ 지지를 선언하고 나선 거예요. DJ는 재야의 여러 인사들이 지지해주는 것을 명분으로 자신이 대통령을 해야겠다며 평민당을 만들어 독자출마 했고 말예요.”

인 목사는 결과적으로 YS편에 서게 됐다. 단일화 판을 깨버린 DJ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그리 비쳤다. 

“DJ가 나보고 섭섭하다고까지 얘기했어요. 그러든가 말든가 합하지 않으면 우리는 못 이긴다, 그게 내 주장이었어요.”

대선 결과 양김 모두 떨어졌다. 

“맞잖아. 그렇지?”

거 봐라는 표정. 아쉬움이 가득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DJ를 지지했던 재야인사들에게 내가 그랬어요.”

- 뭐라고요? 

“내가 얘기한대로 되지 않았냐. 당신들이 하늘의 뜻을 잘못 읽은 거였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노태우 정권은 없었다, 민주화 진영이 나뉘지 않았을 거다. 더 빨리 민주주의 길로 갔을 거다….”

두고두고 뼈아픈 일이었다. 깊은 한숨이 묻어났다. 뒤이어 한 시간가량 현 정국에 대한 개탄이 이어졌다. 20대 대선 기간  윤석열 대통령과 안철수 의원 간 단일화 운동에 앞장선 그다. 정부 출범에 기여했다고 자부하지만 돌아가는 국정운영은 기대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듯했다. “이런 얘긴 쓰지 말아요.”여러 작심발언들이 쏟아졌지만 그 자리에서 되삼켜졌다. 

 

현실참여 속으로 


1946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5대가 기독교 집안이다. 평생을 목회자로 살면서 노동운동과 빈민운동, 인권운동과 시민운동의 길을 걸었다.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네 차례 투옥되고 국외에 추방까지 당했지만 민주화를 향한 대장정을 멈추지 않았다. 경실련 초기 설립자로 좌우를 떠나 개혁하고 혁신할 수 있는 곳이라면 주저앉고 뛰어들었다는 평가다.

-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요.

“산업선교 때인데요.”

유신 정권에서다. 

“YH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군사정권이 표적이 됐을 때예요.”

산업선교를 이끌면서는 10월 유신의 도화선이었던 YH무역 여공 농성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 네.

“검찰에서 우리(산업선교단)에 대해 조사한 뒤 박정희 대통령한테 보고서를 올렸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이 땅의 산업선교가 아니었으면 노동 운동계가 진즉에 공산화에 물들었을 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거예요. 박 대통령이 깜짝 놀랐다고 해요.”

처음 해주는 얘기라고 했다. 이후 강경 탄압이 잦아드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돌아보면 현실참여형 인간이었다. 먼 이방의 사마리아인까지 품었던 예수의 정신을 따라간 것일까. 그리 보였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