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춘 “숨은 주역 민산 재조명돼야” [6월항쟁 되짚기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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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춘 “숨은 주역 민산 재조명돼야” [6월항쟁 되짚기⑰]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3.11.26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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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춘 민주산악회 전 부회장
​​​​​​​“독립운동 심정으로 전국 산에 올라”
“YS 전위부대 활동하며 앞장서 투쟁”
“민추협 태동 산실, 신민당 산파 돼”
“민산 부활 어렵지만 정신 계승돼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다시 군부통치가 시작됐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한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했다. 야당 지도자들은 구속되거나 가택연금 당하기에 이르렀다. 

재야, 노동계, 대학가는 물론 파편을 맞은 광주는 붉게 물들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8개월 만에 자리에서 축출됐다. 신현확 내각도 물러났다. 전두환이 빠른 속도로 정권을 장악해나간 결과였다. 

1981년 2월 전두환은 변칙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5공화국이 출범했다. 다시 5월이 돌아왔다. 1일이 되자 전두환은 선심 쓰듯 가택연금 중인 YS(故김영삼 전 대통령)를 풀어줬다. 1년 여 만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 그뿐일 뿐 정치규제에 묶여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YS는 이 시기를 툰드라로 회고했다. 겨울이 길고 천지가 빙설로 뒤덮이듯 세상은 춥고 어두웠다. 서울의 봄을 지키지 못한 통한이 밀려왔다. 야당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깊이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도동계 핵심서 시작  


속수무책으로 한 달이 지났을까. 하루는 상도동계 핵심인 김동영이 찾아왔다. 별명이 불곰이었다. 

“산이라도 갑시다.”

6월 9일 목요일 첫 산행을 시작했다. YS를 중심으로 김동영을 비롯해 최형우, 문부식, 김덕룡, 홍인길, 김기수 등이 참여했다. 정해진 약속 장소에 얼굴을 비추었다. 삼엄한 감시를 뚫고 향한 목적지는 서울시 외곽의 삼각산이었다. 
 

“10·26 사태 이후 역사적 비극을 막지 못한 정치인의 책임을 통감하면서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죽는 길을 택하기로 하는 비장한 결심으로 산행을 시작한 것이다.”
-YS 회고록 중-

 

오는 9일은 민주산악회 결성 40주년이다.ⓒ김영삼 회고록
민주산악회의 시작은 1981년 6월 9일이다.ⓒ김영삼 회고록

“이후 민주산악회(민산)가 만들어집니다. 독립운동가 같은 심정으로 산에 올랐습니다. 그런 사명감 없이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지난 7월 26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만난 이성춘(민산 전 부회장)은 이듬해 봄부터 민산에 가입했다고 회상했다. 

올해 74세로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군 제대 후 박찬 의원실 비서진으로 들어갔다. 한번은 YS가 이 지역을 방문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거침없이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두 팔로 민주화의 여명을 열어젖힐 것만 같았다. 단박에 YS 기개에 매료되는 순간이었다. 

정계 입문 시기 이성춘은 진산계로 분류됐다.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던 유진산에 대해 대화와 타협의 귀재였다고 추억했다. 진산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상도동계로 합류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고 정치규제를 당하면서 꼭 감옥에 갇힌 심정이었다.

 

엄혹한 시절 해방구 돼줘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산은 민주투사들에겐 탈출구, 해방구와도 같았다. 힘겹게 봉우리를 넘고 넘다 이윽고 정상에 올라서면 탁 트인 시야에 절로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초창기 산행 인원은 10여 명 이내로 조촐했다. 상도동계 핵심들이 전부였다. 전화로 약속장소를 정할 때면 갑자기 지지직거리면서 잡음이 들려왔다. 도청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찌어찌 약속을 잡으면 수첩 등에 적지 않고 머릿속에 외워두는 일이 습관이 됐다. 행선지가 노출될 염려가 있어서였다.

이성춘의 집은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었다. 모임 날이 되면 <남부군>의 작가 이우태가 그의 집에 들렀다. 비장한 마음으로 함께 길을 나섰다. 서울 북쪽에 위치한 김동영 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다 같이 모여 산에 올랐다. 

“비바람 몰아치고…” 이우태가 지었다는 회가를 부르며 힘을 내었다. 또 이 노래도 기억났다. 신민당 당가였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전통의 신민당 양양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삼각산, 도봉산, 관악산 등 서울권을 시작으로 YS와 함께 전국에 안 오르는 산이 없었다. 지금이야 등산객 수가 범람하지만 그 시절 산에 가면 민산 회원들 밖에 보이지 않을 때였다. 점심이 되면 도란도란 모여 도시락으로 배를 채웠다. 그게 아니면 쌀을 가져와 밥을 해먹기도 하고,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지금에야 산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금지가 됐지만 당시는 규제가 따로 있지 않았다. 
 

민주산악회 회원들은 시간이 가면서 그 수가 몇 만 명으로 불어난다. ⓒ시사오늘(사진제공=김영삼)
민주산악회 회원들은 시간이 가면서 그 수가 몇 만 명으로 불어난다. ⓒ시사오늘(사진제공=김영삼)

그사이 회원 수도 늘어났다. 일 년쯤 되니 20~30명, 200여 명으로 불었고, 몇 만 명으로 커졌다. 

첫 번째 대규모 모임은 충남 계룡산에서 가졌다. 대구·부산·충북·강원·전남 등 전국적으로 조직화됐을 때였다. 각 지부마다 이름이 달랐다. 이성춘은 민주지산조의 조장이었다. 몇 백대 버스가 계룡산으로 집결할 정도로 어마어한 인원이었다. 이민우, 김명윤,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등 민산 지도부도 바뀌어갔다. 조직을 관리하는데 능했던 이성춘은 노병구, 심의석과 함께 조직위원으로 참여하다 부회장을 지냈다.

 

민추협의 산실 민산 


“다 알다시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DJ(김대중)는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 JP(김종필)도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JP는 재산을 헌납하고 풀려나 미국으로 갔지요. 또 YS는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게 가택 연금시켰고요. 연금이 풀려 등산을 가게 됐는데 그때 만들어진 게 민산입니다. 야권의 정치가 무너지고, 언론이 공백기일 때 진실을 알리는 입이 돼주고, 발이 돼준 곳이지요. 전의를 다지고 조직화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죠.”
- 2022년 4월 김덕룡 민추협 이사장 본지 인터뷰 중-


민산이 6월항쟁과 연관이 있는 데에는 동력이라 평가받는 민주화추진협의회 태동의 산실이 돼줬기 때문이었다.

“민산 회원 대부분이 당원이고 민추협 회원이었습니다.”

이성춘은 민추협과 신민당에서 조직1국을 맡았다.  

“산악회 회원들은 민주당은 물론 민추협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활동했습니다. 물불 안 가리고 앞장설 만큼 민주화 투쟁을 위한 전위부대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후 신민당 창당의 거름 역할을 한 민산은 1천만 개헌운동, 6·10항쟁에 이르기까지 전국적 세부단위에서 손과 발이 돼줬다.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이한열 최루탄 피폭 사건으로 국민적 공분이 커질 때에는 대한성공회에 집결해 42회 타종을 시작으로 범국민 규탄대회에 동참했다. 민산 회원 일부는 전날 밤을 새워가며 6·10국민대회를 준비했다. 국민적 힘이 응집되는 순간마다 민산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최루탄 고통 지금도 생생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집회 때도 생각이 난다며 이성춘은 최루탄 일화에 대해 들려줬다. 도심 한복판 진용을 갖춘 전경들은 일부러 최루탄을 바닥에 굴러댔다. 시위대들이 진격을 하던 중 땅에 떨어진 최루탄을 밟게 되면 어김없이 살갗을 찌르는 매캐한 연기가 삽시간에 사방을 휘감았다. 고춧가루 섞인 물을 코에 들이키는 것보다 훨씬 심한 고통이 폐부를 찔러왔다. 수건으로 가려도 소용없을 만큼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다. 절로 당시의 아픔이 연상되는지 이성춘의 표정도 일그러져갔다.

앞이 안보여 도저히 나아갈 수 없게 되면 대열에서 잠시 이탈해 근처 가게로 들어갔다. 음료수도 나눠주고 물로도 씻겨주는 등 시민들은 시위대 편이었다. 백골부대들이 휘두르는 나무곤봉에 맞아 피가 나기도 했다. 닭장차에 갇혀 난지도 등에 떨어진 적도 많았다. 다시 터벅터벅 서울 중심가로 들어와 다음 일정의 시위에 참여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이렇듯 민추협과 신민당, 직선제 개헌운동에서 6·10항쟁까지 매순간 YS와 함께한 민산의 역량이 발휘됐다는 얘기였다. 

 

YS 단식 알린 투사들 


다시 80년대 초로 돌아와 YS가 23일 간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할 당시 이를 외부에 알린 것도 민산 회원들이었다고 이성춘은 강조했다. YS 단식은 6월항쟁의 시발점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야당 지도자가 단식을 하는데 신문에서는 지리산 곰의 생사 문제가 일면 톱을 장식하고 있을 만큼 언론의 자유가 없던 때였다. 아주 조그맣게 ‘정치권에서 재야 정치인의 식사 문제를 논의했다’고 나오는 게 다였다. 단식의 단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때도 나서준 것은 민산인들이었다. 정보과 감시를 피해 유인물을 만들어 집집마다 배포하며 YS 단식을 알려 나갔다. 연행과 감금, 폭행 등 수난을 당하기 일쑤여도 무궁화가 피고 또 피듯 이들의 투쟁은 멈출 줄 몰랐다.

YS가 82년 5월 31일부로 이듬해까지 다시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던 때였다. 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을 기해 단식을 결심한 YS는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그 길로 곡기를 끊었다. 훗날 정치결사체 민추협이 만들어지는 데 구심점이 돼준 사건이었다. 민주화 세력이 다시 모이기까지 민산 회원들이 밤을 밝히는 등불처럼 싸워나가며 그를 지켰다고 소회했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군부에서는 협박과 회유를 반복했다. 먹고살기 어려울 때라 공기업 자리 등을 제안해 오면 더러는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YS부인 손명순 여사의 비서로 활동했던 한 인사도 그렇게 떠나가게 됐다고 이성춘은 돌이켰다. 그 또한 잦은 회유를 받고는 했지만, 그때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정보요원들 감시 아래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 게 다반사였다.

민주화 투쟁 전선을 지켰던 그는 결혼도 늦게 했다. 야당 투사를 둔 아내들이 그렇듯 부인도 고생을 많이 했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웠지만 이성춘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자식들에 떳떳한 가장으로 살았다고 자부했다. 그러면서도 엄혹한 시절 힘들게 살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내심 숨기지 못했다. 

원체 지조를 제일로 여기는 듯했다. 민주화가 온 뒤 충남을 기반으로 하던 JP(김종필)가 국회의원을 시켜주겠다며 적극적으로 입당을 권유했지만 한사코 마다했다. 보수당 소속으로 서울에서 출마할 생각은 왜 안 했느냐고 묻자 선거를 치를 만큼 넉넉한 형편이 못됐다는 담담한 답변이 돌아왔다. 대신 조직국을 이끌며 YS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신민당, 통일민주당에 이어 지금의 보수당에 이르기까지 YS 뒤를 따르는데 충실했다. 

3당합당 때도 YS 판단이라면 믿는다는 생각으로 두 말 않고 뒤따랐다. 그만큼 YS의 통찰력과 선견지명, 정치적 혜안을 높이 샀다. YS가 약속한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고 군정을 종식시키지 않았느냐며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분은 참된 민주화의 지도자였습니다. 지금도 ‘자유는 그것을 위해 싸운 만큼 얻어지는 것이며 민주주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고 했던 YS 말이 생생합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듯이 자유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YS의 신념과 정신을 지금도 존경합니다.”

 

민산 해체 뼈아픈 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가운데 왼쪽으로 이성춘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사진제공 : 민추협
김영삼 신민당 총재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가운데 왼쪽으로 이성춘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사진제공 : 민추협
민산 일원이자 민추협 임원, 신민당 당직자인 이성춘이 일천만 개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사진제공 : 민추협
민산 일원이자 민추협 임원, 신민당 당직자인 이성춘이 일천만 개헌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사진제공 : 민추협

다만 민산이 박철언의 사조직 월계수회처럼 변질될까 우려해 문민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단칼에 해체해버린 것은 YS가 잘못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안 그랬다면 정권재창출도 됐을 것이라고 한 그는 민산 해체에 서운해 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산행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전국의 민주동지를 규합해 민주화투쟁을 구축하고 민주화 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도 YS께서 대통령에 당선된 후 해산을 한 바람에 민산의 민주화운동이 저평가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업도 포기하고 군부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 있었기에 민주헌정질서를 회복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 민산의 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재평가 작업이 반드시 이뤄져 합당한 예우와 지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춘의 말처럼 민주화 투쟁하면서 어렵사리 살았던 민산 회원들은 문민정부 이후에도 빛 하나 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전 재산을 남김없이 사회에 환원했던 YS를 본받아 청렴하게 살아간 회원들이 대다수였다고 했다. 오늘날 그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 이성춘은 역사적 재조명이 필히 이뤄져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다시 민산 같은 모임이 부활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이성춘은 고개를 저었다. YS와 같은 강한 지도자가 없어 어렵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대신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간 민산의 정신을 후세들도 배웠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민주대장정의 주역 민산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성춘 전 민주산악회 부회장은 민산은 민추협의 산실이고 6월항쟁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마무리하면서는 6월항쟁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짚어줬다.

“잃어버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고 현대 정치 발전의 변곡점이 곧 6월항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근간인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고 이를 계기로 지금의 민주헌정질서를 확립하는데 초석이 돼줬습니다. 자유와 평등, 공존과 평화의 가치가 우리 사회에 온전히 뿌리내리고 대한민국이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모범이 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것 모두 6월항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같은 민주 대장정 한가운데 민산이 함께했다는 것에 자긍심을 느낀다며 말을 이어갔다. 

“기나긴 투쟁 끝에 아무리 높은 산도 정상에 오르면 다시 내려와야 하듯 강한 권력을 가진 자도 결국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등산을 통해 깨우쳤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끝내며 몇 개의 일화도 더해졌다. 김무성이 자금을 대 무교동에 민추협 사무실을 만들었는데 경찰이 집기를 건물 밖으로 끄집어내는 등 방해 작전이 이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동지들끼리 짊어지고 계단을 올라 갖다놓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다음날이면 집기가 또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하는 수없이 돗자리 회의를 하게 됐다며 지금이니 웃으며 할 수 있는 얘기라고 털어놨다.

12대 총선 때는 이성춘은 종로중구에 출마한 이민우를 도왔다. 합동유세장에는 나무 위까지 올라가 구경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파가 운집했다. DJ(김대중)는 민추협 공동의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지만 동교동 계파가 종로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을 정도로 신민당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는 불편한 진실도 전해줬다.  

6월항쟁 기간 노태우가 YS를 설득하기 위해 사무실까지 왔지만 돌려보내진 일 등 꼬리에 꼬리를 문 에피소드는 끝이 없을 듯 보였다. 또, 다시 들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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