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수금회’ 된 출판기념회의 비밀 [정진호의 정치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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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 수금회’ 된 출판기념회의 비밀 [정진호의 정치여담]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4.02.20 1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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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출판기념회를 제한하는 법안 발의·통과를 약속했다. ⓒ연합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출판기념회를 제한하는 법안 발의·통과를 약속했다. ⓒ연합뉴스

얼마 전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민의힘은 출판기념회 형식을 빌려서 정치자금을 받는 관행을 근절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겠다. 우리 모두 지금까지 출판기념회를 열어서 책값보다 훨씬 큰돈을 받는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받는 것이 사실상 허용돼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언젠가 단호하게 끊어내야 한다.”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한 위원장의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정말 없앨 수 있을까?’

출판기념회는 외국에서 보기 드문 한국 정치의 관행 중 하나입니다.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예비후보들은 선거 4~5개월 전 책을 냈다며 사람들을 모읍니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책을 사고 ‘책값’을 내는데요. 이 책값은 우리가 일반적인 책을 살 때 내는 1~2만 원 수준이 아닙니다. 보통은 10만 원 정도, 많게는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책값이 비싼 이유는 출판기념회의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출판기념회에서 모은 돈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받을 수 있는 돈의 상한선도 없습니다. 이러니 정치인들은 출판기념회를 사실상의 ‘모금 창구’로 활용합니다. 출판기념회를 통해 선거에 쓸 돈을 모으는 겁니다.

실제로 2022년 뇌물수수‧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수사를 받았던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은 자택에서 현금 3억 원이 발견되자 “2020년 출판기념회에서 모은 후원금”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출판기념회 후원금이 모금 한도나 내역 공개 의무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 해명이었죠.

이러다 보니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우선 책이 나오는 과정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선거를 앞둔 한창 바쁜 시기에 정치인이 사무실에 틀어박혀 책을 쓰기는 어려우니, 선거 시즌 즈음엔 ‘대필 시장’이 활성화되는데요. 문제는 이 ‘대필’조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한 대필 작가는 의뢰인이 바쁘다는 핑계로 인터뷰에 응하지 않아 비서들이 대충 정리해준 자료로 자서전을 ‘소설처럼’ 썼다고 토로했습니다. 또 다른 대필 작가는 급히 출판기념회를 준비한 의뢰인이 책을 열흘 안에 완성해달라고 요구해서 여러 자서전을 참고해 ‘짜깁기’로 책을 썼다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완성도보다는 ‘일단 내고 보자’는 식의 자서전이 많다는 거죠.

그래도 대필을 맡길 정도면 양반입니다. 과거 한 국회의원은 자신의 보좌진에게 그동안 SNS에 올린 글을 엮어 책을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적게는 몇 백만 원에서 많게는 2000~3000만 원까지 드는 대필 비용을 아끼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습니다. 글을 쓰거나 대필을 맡기는 대신 ‘화보집’을 내는 정치인도 종종 눈에 띕니다.

이런 관행은 여러 부작용을 낳습니다. 우선 선거판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듭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역 의원들이나 고위 관료 출신들은 출판기념회 한 번으로 수억 원의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습니다. 반면 정치 신인들의 출판기념회 수익은 현역 의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그칩니다.

출판기념회가 ‘로비 창구’로 악용되기도 합니다. 현직 의원이나 고위 관료 출신의 출판기념회에 돈이 모이는 이유는 상임위원회 유관기관이나 기업의 대관 담당자가 ‘눈도장’을 찍기 위해 참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받은 게’ 있는 정치인이라면 당선 후 ‘줘야 하는 것’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정치자금 수금회’로 변질된 출판기념회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지속적으로 나왔습니다. 과거 새누리당은 새누리당은 의원 153명 명의로 출판기념회 전면 금지 법안을 냈고, 제20대 국회 때도 출판기념회 사전 신고와 수입·지출 내역 보고 등을 골자로 하는 정치자금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이 발의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야무야됐죠.

출판기념회가 특정 정치인들을 위한 정치자금 모금창구로 기능하고, 이것이 입법로비 등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역 의원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는 출판기념회를 스스로의 손으로 폐지하는 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과연 한 위원장은 총선이 끝난 후에도 ‘출판기념회 폐지’ 약속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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