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분은 참 훌륭한 분이야! [이순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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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은 참 훌륭한 분이야! [이순자의 하루]
  • 이순자 자유기고가
  • 승인 2024.04.14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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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순자 자유기고가]

“저분은 참 훌륭한 분이야”

이는 고등학교 1학년인 내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내 친정아버지다. 친정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시는 데는 가슴 찡한 이유가 있다.

가끔 일요일이면 아들은 오징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온 식구들을 먹게 했는데 그 맛이 꽤 괜찮았다.

아들은 마치 요리사라도 되는 양, 데친 오징어와 김치를 가위로 잘게 잘라서 큼직한 팬에 마가린을 넣고 달달 볶다가 밥을 넣고 잘 버무린 다음 진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끝으로 참기름을 살짝 둘렀다.

알맞은 접시에 퍼 담고는 위에 계란프라이를 얹어준다. 고소한 마가린 맛과 잘게 자른 오징어 맛이 입안에서 침샘을 자극하며 살근살근 목 너머로 넘어갔다. 이때 밥은 주로 갓 지은 쌀밥이다. 그래야 볶음밥이 엉키지 않고 잘 섞인다.

부엌은 친정아버지가 계시는 방과 이어져 있고, 문만 열면 밥상을 들일 수가 있다. 제일 먼저 볶음밥을 퍼서 친정아버지께 드렸는데, 이때 밥상은 내가 가져간다.

아버지는 밥상을 받으시며,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흐흠, 저 양반은 참 훌륭한 분이야”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는데 몇 번째나 반복해서 듣고 보니 그 뜻을 알 것 같다.

친정아버지 혼은 이미 몸에서 떠난 것이다. 즉 혼이 나갔다. 친정아버지는 이미 ‘알맹이 혼’이 나갔고 빈 껍데기인 육체만 남아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치아는 윗니 아랫니가 모두 빠졌다. 어금니는 먼저 삭아 없어지고 충치로 인해서 뽑기도 해서 이미 없어졌다. 신통하게도 아래위 송곳니 네 대는 남아있다. 힘없는 송곳니만이 위아래를 지켜줘 겨우겨우 움직여 음식물을 넘기는 것이다. 

아버지는 설공주로 이사 와서는 처음 3년은 택시를 불러 여주읍내 노인정으로 출퇴근을 하셨다. 

그러다 그것도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약 3년 전부터는 아예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소일을 삼으셨다. 

여기는 깡촌 시골이고 이웃도 띄엄띄엄 있어서 아버지 방에 마실 올 또래 친구분도 없다. 이렇듯 아버지는 꼼짝없이 외톨이가 되셨다. 그러다 보니 약간의 우울증이 왔고 얼른얼른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증상 비슷한 것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아들은 일요일이면 가끔 할아버지와 민화투를 쳤는데, 그럴 때는 외손주를 알아보셨다. 그런데 유독 외손주가 맛있는 밥 한 끼를 해드릴 때는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시고는 “저 양반‘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외손주가 차려주는 밥은 어느 귀한 양반이 차려주는 밥일 정도로 맛이 있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는 잠시 감격하시는 것 같았다.

외손주와 함께 한방에서 주무시고 매일매일 얼굴을 맞대고 하는데도 꼭 밥을 챙겨드릴 때만 ‘저 양반’으로 둔갑을 하니 그저 나는 그때마다 적잖이 충격을 받고는 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이제 세상을 떠나실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예감과 함께 내 부모가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진다는 상실감에서 오는 절망감이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물도 흘렀다. 세월은 모든 것을 산화시켰다. 젊음도 건강도 명예도 흩으러 놨다.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산과 들의 돌과 나무, 심지어 바위까지도 변하고 부서지고 없어진다. 

아버지가 10년만 더 사셨으면 좋겠다. 그때쯤이면 아들이 장가가고 나는 일도 안 나가고 그러면 매일매일 아버지의 이야기 친구가 되어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해드리고 똥오줌 수발도 다 들고 하면 될 것이다.

나는 원래 아버지와 얘기를 잘했다. 옛날 고향 동네 얘기로 많은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그런 아버지와 딸의 사이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 시민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오래전 설공주 살던 때의 이야기이며 글을 쓰는 이순자 씨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사는 78세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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