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쥐와 친정아버지 [이순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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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쥐와 친정아버지 [이순자의 하루]
  • 이순자 자유기고가
  • 승인 2024.03.1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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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순자 자유기고가]

오래전 설공주 때 얘기다.

늦장마가 길게 이어졌다. 삼복도 다 지나고 추석이 코앞인데 거의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장마가 이렇듯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남한강 둑이 터졌다. 벼 이삭에 알이 차오르는 귀중한 이때에 강둑이 터져 넘치는 물이 많은 논을 강으로 만들고, 한창 여물어 가는 벼이삭을 사정없이 물속으로 끌어들였다.

낭패다. 이러한 장마는 자주 오지 않는다. 어쩌다 몇십 년 만에 오는 장마도 감당키가 어려운데 자주 오면 절대로 안 되겠지…. 결국 읍내로 나가는 대교도 위험수위가 넘쳐서 통행이 두절 되고 그 관계로 남편과 나는 읍내로 일을 나가지 못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다리 통제가 풀려야 할 텐데 걱정이다. 나는 남편과 물난리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할 일 없이 우두커니 봉당에 서서 세찬 비에 쓰러질 듯 겨우겨우 헛간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오래된 헛간 느티나무 기둥을 위험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헛간 잡풀 더미 속에서 커다란 어미 쥐 한 마리가 입에 빨간 새끼를 물고는 뒷발을 곤두세우고 억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로질러 우리 집 뒤꼍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나 놀래고 신기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선 채로 낮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리 좀 와 봐요!”
남편이 낮잠을 자려다 말고 봉당으로 나왔다.
“여보, 글쎄 큰 어미 쥐 한 마리가 빨간 새끼를 물고 저 헛간에서 튀어나와가지고 우리 집 뒤꼍으로 갔어요.”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헛간 바닥에 물이 차는 모양이군 그래...”라면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여보, 아니 어미 쥐가 새끼를 물고 기어가는 것이 아니고, 새끼를 물고 뒷발을 꼿꼿이 세워서 깡충깡충 뛰면서 갔다니까요.”
나는 아직도 놀래고 신기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어 말끝에 숨을 헐떡였다.
“당신이 처음 봤구나, 원래 쥐들이 그렇게 급할 때는 뒷발을 세워서 뛰기도 해”
남편은 이미 몇 번 본 모양이다.
“그래요? 나는 오늘 처음 봤어요.”
남편은 신기해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기막힌 얘기를 한다.
“그래서 사람 못 된 거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거야. 말 못 하는 짐승도 제 새끼 귀한 줄 아는데 어쩌다 못된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게 제 새끼를 거두지 못한다는 거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불현듯 아이들 생각이 났다.

“여보, 우리 아이들 이따가 집에 못 오면 어떡해요?”
“아냐 이따가는 강물이 빠져서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거야.”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요?”
“여기서 오는 비는 서울 한강으로 흐르고 지금 우리 앞의 강은 저 위에 충주 쪽에서 많이 와 갔고 그런데, 아까 읍내에 있는 친구와 통화했는데 강물 수위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했어. 그리고 텔레비전 일기예보도 내일부터는 비가 그친대...”
나는 남편의 말을 듣고 조금 안심이 됐다.

이제 오후 3시밖에 안 됐는데 아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여보! 학교에다 전화를 해야겠어요. 오늘 같은 날은 애들을 좀 일찍 보내 달라고요.”
“그래 전화해 봐, 4시 반 차로 올수 있게 애들을 보내달라고 해봐”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기를 돌려 두 아이들 학교 교무실에 전화를 했다. 물난리 얘기와 함께 우리 아이들에게 배려해 달라고 했더니 학교에서도 이미 강 저쪽에 사는 학생들을 특별히 조금 일찍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고 얘기했다.

아이들은 훤해서 집으로 돌아왔고, 모두 강물 얘기를 하면서 저녁을 먹었다.
“엄마, 여주 읍내 사람들은요 모두 양동이를 가지고 나와 강둑에서 다슬기 잡는다고 난리예요.”
아들의 얘기였다.
“그래 맞아. 그 다슬기가 새 물을 좋아하거든. 뭐 이렇게 강둑까지 물이 차도록 비가 온 적이 있나? 다슬기 많이 잡겠는데.”
남편은 그 같은 상황을 잘 안다는 듯이 말했다.
하기는 남편은 여주가 고향인 여주 토박이다. 나는 고향이 양평이면서 남한강과는 먼 거리에 있는 면 단위에 살았으니 강 쪽 일을 잘 몰랐다.

다만 장거리에서 아주머니들이 잡아다 파는 다슬기를 가끔 사다가 아욱을 넣고 된장국을 끓여 먹곤 했는데 유독 그 맛이 일품이다. 그렇게 구수하면서 입맛에 짝짝 달라붙는 고유의 맛이 나는 것이다.
 
내일이 여주장이니 장날 가면 다슬기가 많이 나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슬기는 사서 바로 끓이면 안 된다. 한 사흘 오지항아리에 넣고 해감을 시켜야 제맛이 난다. 다슬기가 움켜 먹은 강물 바닥의 모래를 어느 정도 뱉어 내야 하는 것이다. 내일 여주 나가면 잠시 시장에 들러 다슬기와 아욱을 사다가 다슬기 아욱국을 끓여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군침을 삼켰다.
 
저녁 밥상을 치우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9시 뉴스를 끝으로 TV를 끄고 자려고 누웠는데, 도대체 낮의 어미 쥐 생각이 나서 잠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그 어미 쥐란 놈이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사생결단을 보기 전까지는 그저 쥐란 놈은 지저분하고 혐오스러운 짐승이요, 오직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동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쥐가 있는 것을 알면 그저 쥐약을 사방에 쥐약을 놓아서 잡아 죽일 생각과, 혹 쥐 창아(덫의 경기도 방언)를 설치해 잡아 죽일 생각만 했지 그 흉측한 동물의 세계에 그렇듯 위대한 모성애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은 이미 잠이 들어 새근거리며 꿈속을 헤매고 있다. 이리저리 어미쥐의 기적 같은 광경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안방에서 홀로 텔레비전과 씨름하면서 세월을 보내시는 친정아버지 생각이 번득 났다.

아버지도 어미 쥐 못지않게 자식을 위해 희생하셨다는 생각에 불현 듯 가슴 밑바닥부터 뭉클해졌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되셨다. 어머니는 44살에 산후풍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세 살이 적으셨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해 아버지는 겨우 41세였다. 그때 내 나이 17세, 언니 나이 20세, 남동생 나이가 6세였다. 

아버지는 엄마 돌아가시던 해에 5·16 쿠데타를 맞았다. 강상면 부면장으로 공무원이었는데, 면장 발령 한 달여 앞두고 결국 면사무소에서 쫓겨났다. 하는 수없이 시골집과 전답을 팔아 자식들을 서울로 이주시켰다. 산에 나무를 벌목하여 파는 목상이라는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셨다. 강원도 원주에서 자리를 잡게 됐다. 언니는 원주에서 결혼했으며, 남동생은 서울로 옮겨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남동생과 함께 서울에서 자취를 했다. 아버지는 원주의 새엄마 집과 서울의 자식 집을 오가며 남동생의 학교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다 나는 여주로 시집왔고 아버지는 원주에서 새엄마와 살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서 이혼을 하게 됐다. 그 뒤 원주 언니집 옆에서 홀로 사시다가 내가 여주로 모셔오게 된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도 자식들 때문에 새엄마와 이혼까지 하고 쓸쓸하게 말년을 딸네 집에 와서 텔레비전과 울고 웃으면서 지내시는 것이다. 새엄마의 불평은 결론적으로 자식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불쌍한 내 아버지…. 그토록 자식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가 저 어미 쥐와 견줘 무엇이 모자란다는 말인가? 

아버지! 제가 잘 모시지는 못해도 제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눈물이 뜨겁게 두 뺨을 적시며 흘렀다.

※ 시민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 설공주에 살던 때의 얘기이며 글을 쓰는 이순자 씨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사는 78세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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