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룡, 안철수신당을 색칠한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김덕룡, 안철수신당을 색칠한다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3.12.01 02: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4년 주목할 정치인(24)>YS 대통령 만들기·3당 합당 등 역사현장 ‘진두지휘’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김덕룡 한나라당 전 대표가 다시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국민동행 대표를 맡으면서 부터다. 그가 1970년 김영삼(YS) 전 대통령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국민동행 대표를 맡기까지, 그의 험난한 정치사는 재밌는 이야기꺼리다.

김 전 대표에게 붙여진 약칭은 DR이다.

영문약칭은 아무에게나 붙여주지 않는다. YS,DJ,JP 등 정치판의 오랜 파고와 싸워온 인물에게만 붙여주는 게 통례다. 일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에게도 영문 약칭은 붙여주지 않았다.
이렇듯 김 의원은 오랜 정치풍랑 속에서 자신의 애칭인 ‘DR’을 얻었다.

DR이란 정치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50여 년이다.

DR의 정치시점을 통상 1970년으로 본다. 하지만 훨씬 더 이전이라는 게 맞는 표현이다. 1963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다니던 김덕룡은 6대국회에서 서울대 선배인 김영삼이 당선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민정당 안국동 당사를 찾았다. 이후 김영삼은 두서너 차례 김덕룡에게 공천을 제의하며 ‘같이 일하자’고 했다. 하지만 김덕룡은 이를 거절했다.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게 이유였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YS가 DJ에 역전패 당하자 상도동에 입문했다.

상도동 사단에 입문한 이래, 4차례투옥, 민주산악회 결성, 민추협 발족, ‘2.12 선거혁명’, 대통령 직선제 쟁취, 3당합당, 문민정부창출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DR은 변화무쌍한 한국정치판의 주인공이었다.

▲ DR이 국민동행을 만든 것은 이미 오래전 계획된 것으로 알려졌다.ⓒ시사오늘

YS와 함께 권력이동 이끌어내

그는 이런 굵직굵직한 역사의 전환점을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YS)’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을 탄생시킨 첫 정치적 인맥인 ‘상도동 사단’의 주역으로써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상도동 사단에 입문한지 20년 만에 집권여당의 실세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그는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1970년 상도동 사단에서 YS의 비서로 입문해, 1979년 비서실장을 맡았다. 이후 수차례 투옥되는 등 험난한 민주화 운동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통치 시절,DR은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에 관한 유인물을 작성 배포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투옥됐다.

이후 유신말기인 1979년 YH 사건의 와중에서 노동자 김경숙씨의 죽음을 실은 ‘YH백서’를 작성 배포하다가 또다시 구속됐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DR은 ‘YS의 23일 단식투쟁’을 외부에 알리려다 또다시 투옥됐다.

이처럼 수차례의 투옥을 거친 그는 1982년 연금이 해제되면서 YS가 민주산악회를 결성하자 핵심인 ‘연락책’을 맡아,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이를 기반으로 1985년 민추협을 창설한 후 초대 기획실장을 맡아 신당탄생의 산파역할을 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당돌풍을 일으킨 주역으로 등장했다.

2.12 총선은 민주주의 부활의 신호탄이 됐다. 관제야당이던 민한당을 무너뜨리고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DR은 정치규제에 묶여 출마하지 못했다. 이처럼 그는 선거 때마다 피선거권을 박탈당해 금배지를 못 달았다. 때문에 ‘3선급 원외의원’이란 말이 따라 다녔다.

마침내 DR은 1988년 4월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 서초 을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김덕룡이 한국정치 전면에 진입하게 된 시기다.

그는 원내에 진입하자마자 통일민주당 대변인, 중앙청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3대 총선에서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은 제2 야당으로 추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때문에 YS의 대권도 눈앞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위기에 직면하자 DR은 민자-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기획하면서 돌파했다.

그리고 3당 합당의 통합협상의 주역으로 나섰고, 끝내 YS를 대권에 올려놓았다.

합당 후 DR은 YS의 최측근으로 불렸던 김동영 등과 함께 통합반대파를 하나씩 제압해 들어가는 전략을 폈다. 합당 후 내각제 파동으로 YS가 위기에 몰리자 ‘여권 내 후보조기 확정 관철’을 외치며 정면 돌파했다.
급기야는 이런 정면돌파가 ‘YS대세론’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권력이동을 이끌어냈다.

YS가 집권한 후 DR은 YS의 그늘에서 벗어나 차세대 대권주자 1,2위를 다투는 위상으로 급진전 됐다.
또한 개혁그룹의 사령탑으로 급부상하며 ‘개혁=DR’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YS 집권기 동안 실세가 된 DR은 정무 1장관, 당 서울시 지부장, 사무총장 등 요직을 맡았다. 이런 힘을 앞세워 대권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를 위해 청와대 비서실 인맥을 구축하는 한편, 개혁지향파 여야 의원들을 규합, ‘DR계’를 형성했다.

또한 ‘신한국 창조를 위한 시민운동연합’, ‘한국사회연구소’, ‘지식사회연구소’ 등 사조직을 조직화했다.
때문에 웬만한 정치권 인사라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DR계를 피해갈 수 없었다.

서청원 이인제 의원 등이 DR을 통해 YS계가 된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안희정 이광재 등도 사실 ‘DR 캠프’에서 요직을 맡았던 인사였다. 새누리당 이성헌 전 의원이나 민주당 김영춘 전 의원도 DR의 최측근으로 통했다.

그만큼 DR은 대권과 근접해 있었다. 당시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의 ‘온산계’와 함께 쌍두마차를 이뤘다.
하지만 대권가도를 향해 뛰던 최형우 전 장관이 뇌일혈로 쓰러지자, 상도동 사단은 급격히 분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온산계를 형성했던 황명수 이인제 서청원의 분열을 시작으로 한국정치사에 사라지는 듯 보였던 민정계가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DR은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남인’이라는 한계에 부딪치면서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경선에서 분류를 삼켰다.

DR, 호남인 한계로 대권 꿈 접어

영남당인 한나라당에서 호남인으로 겪어야했던 DR의 애틋함은 2013년 3월 7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잘 나타난다.

“제가 상도동계라고 하는데, 상도동계가 영남과 김영삼(YS)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그러니까 상도동계에서 호남 출신은 희귀했습니다. 그러다가 YS와 DJ가 (87년 대선에서) 단일화를 못하고 결별하니까 영·호남 갈등이 더 심화됐습니다. 물론 그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DJ와 대선에서 경쟁하면서 지역주의가 생겼지만 YS와 DJ가 분열하면서 더 심화된 건 사실입니다. 이런 지역주의가 상도동계 내부에서도 있다 보니까 저 자신도 거기서 좀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당시 굳이 지역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리버럴'한 생각을 했고 인간적으로 YS를 좋아했습니다.”<2013년 3월 민산되짚기 김덕룡 인터뷰에서>

▲ DR은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시사오늘

당시 신한국당 후보가 된 이회창 후보가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꿔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마함으로써 DR 또한 야당의원으로 전락하게 됐다. 이로써 그는 여당 내 실세중의 실세에서 야당의 비주류 의원으로 추락하게 됐다. 이후 이회창 총재의 철저한 견제에 막혀, 5년간 비주류 수장으로 험난한 세월을 겪었다.

지난 2003년 당 대표 경선에 출마, 4위로 낙선함으로써 잊혀 진 정치인이 됐다.

최병렬 대표가 ‘탄핵역풍’으로 물러난 뒤 박근혜 대표와 짝을 이뤄, 원내대표에 복귀하며 재기를 불태웠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전에서 이명박 후보를 밀어, 그를 당선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하지만 18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원내에 진입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을 탈당해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지만 성과 없이 끝났다.

그가 새누리당을 떠난 것은 크게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은 새누리당 내 대표적 호남정치인의 퇴장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 정치판에서 ‘YS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상도동 사단의 새누리당 퇴장을 의미한다.
김동영 최형우 서석재 황명수 강삼재 박종웅 등 상도동 사단의 인사들은 고인이 되거나 사실상 모두 정치판에서 사라진 상태고, DR만이 홀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국민동행은 이미 오래전 계획된 ‘시나리오’

그리고 대선이 끝난 1년 후 그는 국민동행 대표자격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DR의 이런 모습은 올 3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우리끼리 만나면 자주 그런 얘기를 합니다. 권노갑 등 옛날 DJ 측근들을 만나서 지금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 YS와 DJ가 민주화를 위해 기여했고 대통령도 했는데 두 사람이 87년 대선에서 분열됨으로써 지역갈등 구도를 심화시켰던 건 틀림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역사에 해를 끼친 것이고 두 사람을 모신 우리도 똑같이 죄인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지역갈등 구도를 해결한다든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정치문화를 바꾸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런 일을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죽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김덕룡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인사들이 YS-DJ 화합 프로그램을 추진했던 사실도 전했다.

"DJ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 사람을 화해시키자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광태, 권노갑, 김무성, 김상현, 그리고 저 등이 모여서 그런 의논을 했고 민추협이 중심이 되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민주세력이 지역분할구도를 뛰어 넘어서 화합하는 그런 것을 추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YS와 DJ가 화합하도록 하자고 했는데 DJ가 그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DJ가 타계하기 전에 YS가 병원에 입원한 DJ를 문병한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DJ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우리가 이벤트도 만들고 실제로 뭔가를 하려고 했는데 그걸 못했습니다. 나중에 YS가 DJ 측근들 불러서 밥도 사고 했는데, 그게 그 일환으로 진행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013년 3월 김덕룡 인터뷰에서>

그렇다면 국민동행을 만든 DR의 귀착지는 어디일까? MB정부에서 고위공직을 지냈던 한 인사는 11월 28일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10월 DR을 만났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정치가 아주 엉망이다. 정계개편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은 안철수뿐이다. 우리가 힘을 합해 한번 밀어주자'고 했다. DR이 신당에 참여할 것 같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