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87년 대선 패배 시 정계 은퇴 시사”
스크롤 이동 상태바
“DJ, 87년 대선 패배 시 정계 은퇴 시사”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5.03 15: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2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김영삼 총재는 자신이 희생할 각오로 달래고 사정하고 유리한 조건을 모두 맞춰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단일화를 이루려고 당당한 경선을 제의했다.
 
그런데 김대중 자신은 ‘4자 출마필승론’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했고, 김영삼 총재도 꼭 출마해야 한다면서 김영삼 총재는 자신의 상대가 안 된다는 망상에 젖어 분당을 선언했다. 그러니 김영삼 총재로서도 구경만 할 수능 없었다.

1987년 11월9일 오전 9시,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 임시전당대회를 소집했다. 당시 전당대회 의장 유제언 의원과 부의장 김득수 의원은 본래 김대중계 출신으로 두 사람 모두 탈당해서 김대중 씨가 만드는 평민당으로 가고 의장단에는 나만 홀로 남았다.

나는 전당대회 소집권자가 되어 소집 통고도 부의장인 내 이름으로 대의원들에게 전달되었다. 전당대회 당일에는 개회사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의장에 황명수 의원, 부의장에 문부식 의원을 선출했으며, 황명수 의장이 만장일치로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음을 선포했다.

특히 이날 전두환이 하극상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육군참모총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당해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고 감당키 어려운 수모를 겪어온 정승화 대장이 통일민주당에 입당해서 단상에 마련된 의장석에 나와 나란히 앉아 김영삼 대통령 후보수락 연설을 들었다. “이번 대선에서 기어이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며 필승을 다짐하자는 정승화 대장의 찬조연설은 우리 모두의 눈시울을 적셨고, 국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사흘 뒤인 11월12일, 김대중 씨도 평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됨으로써 김대중 씨의 필승전략이라는 4자가 대통령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김대중 씨의 말에 등을 돌린 호남출신 동지들

드디어 1987년 12월16일자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일이 공포되었다. 나와 경옥은 광명 5동 큰길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민주산악회 회원들을 모아 성대한 출정식과 선거대책기구를 결성했다. 선거대책기구는 지금가지 내려오던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의 간부들을 그대로 두고 신진을 보강하는 것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결성되었다.

그 당시 민주산악회를 함께하면서 군정종식을 외치고 민주화투쟁을 함께한 사람 중에는 호남출신 인사들이 많았는데, 김대중 씨의 연설을 듣고 나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칼로 무 자르듯 민주산악회에 등을 돌렸다. 그때 남은 우리들은 떠나간 그들을 참으로 야멸치게 무서운 베트콩이라고 불렀다. 민주화투쟁의 판은 예측한 대로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광명시민의 인구분포는 호남인이 가장 많고 다음이 충청인 이었고, 강원인과 본토박이 광명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민주산악회원을 중심으로 한 통일민주당 당원들은 겨우 자장면이나 먹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선거운동을 했다. 광명에서만 보면 노란 깃발을 든 평민당의 기세로 보아 김대중 씨의 4자필승론이 적중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직 지역감정만을 유발하고 이용해서 승리하겠다는 김대중 씨의 발상은 이 나라의 민주화와 장래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당선만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기발한 전략전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민주화를 위해서 평생을 바친 우리들은 김대중 씨가 대권욕에 눈이 멀어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조장해서 절대다수의 민주화세력을 분열시키는 처사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얄밉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지들 가운데는 김영삼 후보의 당선이 역사의 순리이고 물러설 수 없는 우리들의 소망이지만 만에 하나 여의치 않는다면 노태우나 김종필보다는 김대중 씨라도 되었으면 하는 가냘픈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대중 씨도 양심은 있었던지 선거운동 중 “이번 선거에서 지면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말까지 하고 다녔다.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노태우 후보의 당선과 김대중 씨의 몰락

김대중 씨와 호남인의 결속은 다른 지역 사람들을 자극해서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경쟁도, 군정종식도, 민주화도 뒷전으로 밀리고 대통령 선거는 완전한 지역싸움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국가도, 국민도 안중에 없이 어느 향우회가 이기느냐의 싸움으로 변질되어 지역이 다르면 원수처럼 반목하고 질시하여 옳고 그름이 없어진 한심한 선거판이 되고 말았다.

선거판은 돈판 먹자판 개판으로 치달아서 원적지가 부산이나 경남인 사람들은 김영삼 후보를 선호해서 비교적 수월했지만 수가 가장 적었다. 경북은 노태우를 지지하고 충청은 김종필에게 쏠려 호남인의 수가 절대적 우위에 있던 광명시에서 산술적 계산으로는 김대중 씨가 절대적 우세를 달렸다.

노태우는 경북인의 지지를 바탕으로 엄청난 물량공세를 펼치면서 유권자들을 끌어들였고, 많은 충청인들은 김종필 쪽으로 밀려갔다.

다행히 내 고향이 충북 보은이라서 할 수 없이 나도 충청인임을 내세워 어차피 김종필 씨는 후보자 넷 중 꼴찌일 텐데 고귀한 표를 죽은 표를 만들어서여 되겠느냐고 설득해 많은 충청인들의 표를 모을 수 있었다.
 
지역감정에 묶여 있던 목사와의 싸움

선거운동 당시 나는 하안 1동 제일은행 옆에서 우연히 한 중년신사를 만났다.

“저는 김영삼 후보 광명시 선대위원장인데 김영삼 후보를 잘 부탁합니다.”

“나는 광명시내에 있는 교회 목사인데 이번에는 김대중 후보가 돼야 합니다. 죽을 고생도 했지만 호남이 정권을 잡을 차례인데 김영삼 후보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나이도 그렇고 이대로 경쟁하면 안 되지요.”

“목사님께서 사정을 잘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김영삼 씨를 꼭 출마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4자출마론을 주장하고 나온 것은 김대중 씨입니다. 목사님까지 지역감정에 동조하시면 되겠습니까? 저도 교회의 집사입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지역감정을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영삼 후보는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는 몹시 기분 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집사가 목사에게 이렇게 대들어도 됩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사와 집사가 계급의 차이입니까? 교회에서 목사와 집사는 직분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우대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이 되세요. 우대받겠다는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이 되세요. 우대받겠다는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목사님들이 지역감정이나 선동하고 다니면 교회도 어렵고 나라꼴도 안 됩니다.”

그 목사도 나도 흥분한 상태였다.

“집사가 목사에게 무례한 것도 안 되지만, 어떻든 나는 당신의 말에 승복할 수도 없고, 내표는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 줄 수 없어요.”

“당신 같은 목사의 표는 나도 필요 없어요. 그만 합시다.”

나는 ‘목사까지도 저런 사고를 하고 있으니 이 망국적인 지역감정 해소는 오래 가겠다’고 한탄하면서 돌아섰다. 그날 그 목사와의 다툼은 오랫동안 악몽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광명시 민주산악회 회원들은 김영삼 후보의 여의도 강연이 있던 날 모금함을 안고 다니며 수백만 원을 모금해서 선거운동에 보태 쓸 정도로 어려운 싸움을 했지만 그만큼 열렬하게 선거운동을 했다.

선거는 끝났다. 4자출마론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승리를 장담하고, 이번 선거로 김영삼 후보를 완전히 제압해 대통령도 되고 김영삼 총재도 제치고 민주화세력의 유일한 지도자로 군림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출마했던 김대중 씨는 대통령은커녕 김영삼 후보보다 수십만 표나

적은 표차로 3등을 하고 말았다. 국민의 3분의 2가 반대하는 노태우의 승리였다.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망국적 지역감정을 고착시키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절대 다수 국민을 배반하여 출마한 김대중 씨의 뻔뻔함은 온 나라를 초상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광명시는 호남인의 수적 우위로 김대중 4만5천여 표, 노태우 4만3천여 표, 김영삼 4만1천여 표를 득표해 1,2,3등이 각 2천여 표 차이로 김대중이 1등을 했다.

광명시의 평민당은 구심점이 될 만한 사람이 없어 정치경험이 전혀 없던 경기도 출신 H씨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했는데, 1등을 했음에도 선거 후 바로 위원장을 교체할 정도로 운동이 미미했으나 지역감정으로 뭉친 호남인의 결속력은 감탄할 정도였다. 고정지지 기반인 부산 경남인이 가장 적은 불리한 여건에서도 우리 민주산악회 회원들이 사투를 벌여 얻은 4만1천표는 대단한 성과였지만 3등인 것을 어쩌랴? 나는 김영삼 후보에게도 민주산악회 회원들에게도 죄인이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