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표의 農飛漁天歌> "나도 궁지에 몰린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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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표의 農飛漁天歌> "나도 궁지에 몰린 적이 있다"
  • 글 홍문표 국회의원/정리 윤진석 기자
  • 승인 2014.08.27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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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농어촌공사 - 中> 운전기사 한 명만 데리고 온 이유
거물들이 보낸 화한 돌려보내고 문 활짝 열어두고 만나
설득과 대화로 지역균형·현장중심 피라미드 구조조정 성공
억울한 누명…골프 안 친다는 사실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글 홍문표 국회의원/정리 윤진석 기자)

누구나 궁지에 몰릴 때가 있다. 기본적인 스탠스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된다는 걸 농어촌공사 사장 시절 경험한 바 있다.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그런데 억울한 누명을 당해 추궁을 받을 당시에는 내가 골프를 치지 않는 사실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쩔쩔맨 적이 있다. 정말 그때 많은 걸 배웠다.

농어촌공사 부임 초 일화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생긴 웃지 못할 비화인데 설명하면 이렇다.

 

▲ 2008년 9월 7일 농어촌공사 제5대 사장 취임.ⓒ시사오늘(사진=홍문표 의원실)

2008년 공사 사장에 부임하기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부 조로 하신 말씀이 있다. "공사나 건설 같은 거 해봤소? 농어촌공사가 사업이 많을 거요. 업자들을 만나면 안 돼요…." 막상 자리에 앉아 보니까, 왜 대통령께서 신신당부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시기 4대강 사업이 한창일 때라 농어촌공사도 몇백 억 가량의 공사들을 여럿 관장할 때였는데, 공사를 따내려고 하는 업자들의 방문 요청이 쇄도한 거였다.

배달되어 오는 화한들 역시 가관이었다. 죄다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기업의 거물한테서 온 것들이었다. 나는 우선 시범적으로 화한을 다섯 개만 돌려보냈다. 또 직접 방문한 사람들을 만날 때는 일부러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맞았다. 대 부분이 문 닫고 소곤소곤 은밀히 얘기할 테지만, 나는 마이크 없이도 바깥에서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리게 하고 말했다.

급기야 곧장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사람 중 "회장님 모시고 왔는데 이런 푸대접이 어디 있느냐"는 원성 아닌 원성이 쏟아진 거였다. 화한도 돌려보내고, 만나러 와도 무안만 주니 "홍문표 저 사람 강심장"이라는 혀 차는 소리가 농어촌공사 안팎으로 나돌기 시절이었다.

나는 부임하면서 운전기사 한 명만 데리고 왔다. 보통은 비서진 세 명 정도는 자기 사람을 쓸 수 있는 권한을 준다. 그런데 내 경우는 비서실장도 먼저 하던 사람을 시켰다. “아니, 어째서 저를 그대로 기용하신 겁니까.” 비서실장이 나중에는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 적지 않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내가 내 사람을 쓰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농어촌공사를 농어민이 혜택받는 공사로 키우려면 일단 나부터 편하게 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기 농어촌공사가 부실하면 농어민에게 가는 혜택도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그러려면 농어촌공사의 만성적자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공사 구조를 살펴보니, 팔다리가 부실한 항아리형의 구조가 농어촌공사의 발전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간부급은 다 서울에 모여 있고, 임원 30%가량은 전부 과천에 모여 있던 것이다. 각 도에 농어촌공사 지사가 있는데 주요 임원은 도에 대부분 몰려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현장에서 농어민과 가까이 일할 수 있는 직원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때문에 위는 작고 아래는 튼튼한 피라미드 구조로 바꾸는 것이 내 당면과제가 됐다.

지역편중 문제는 특히 더 심했다. 대한민국 농림부 장관의 95%가 호남 출신인 데다 농어촌공사 사장 역시 호남 출신이 줄곧 해온 터였다. 호남 출신의 임원 또한 농어촌공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지역균형, 지역감정 해소 정책이 필요했다.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도표를 갖다 놓고 노조위원장을 만났다. 본사 편중의 지역분산, 각 지방 출신의 고른 등용, 중복업무구조조정 등의 인사문제를 해결해서 일 잘하는 A급 1등 공사를 만들자며 한 달 이상 가량 설득에 나섰던 것 같다.

호남 출신의 노조위원장으로서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고, 같은 호남 출신의 노조원들의 반발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게다. 그러나 다행히 용기를 내어 내 뜻을 따라줬고,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다음 단계로 노조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사장으로서 직접 농어촌공사의 현실을 소상히 밝히고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한편, 혹여 부모나 자녀들이나 배우자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더라도 너그럽게 양해를 구한다는 내용의 편지였는데, 공사사상 이런 경우는 처음 있다며 신기해하고 거꾸로 응원하는 분들이 늘어난 거였다.
 
직원들한테는 구조조정안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전체 직원 중 68%가 설령 자기가 구조조정 대상이 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겠다며 찬성한다는 의견을 표한 것이다. 설득과 대화, 타협과 동의하에 모두가 애사심을 발휘해 일군 구조조정이었고, 덕분에 나는 서울 본사에 있는 4급 이상의 간부들을 호남, 경기, 강원, 충청, 경상도 등지로 안배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각 시도별 광역이사 5명 중 호남 출신이 3명이던 상황을 개선해 호남 경상 강원 방식으로 배치하는 등 각 지방 출신을 골고루 등용할 수 있었다. 

농어촌공사 채용을 혁신적으로 바꾼 것도 보람찬 일 중 하나다. 앞서 언급했지만, 농어촌공사에 필요한 인재는 현장에서 농민들 가까이 일할 수 있는 직원들이다. 시골 가서 일하려면 학벌이 중요한 것이 아닌 농촌을 잘 아는 게 중요한 법이다.

폭우 쏟아지는 날 천둥과 벼락이 친다 해도 논과 논 수로, 수풀에 들어가 물꼬 잡고 둑을 메워야 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그럴 때 거머리나 벌레들이 무섭다고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서울에서 자라 좋은 대학 나온 자녀들은 무서워 못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농촌에서 나고 자란 농민의 아들딸들은 논에 들어가 준설하는 작업을 겁내 하지 않는다. 이는 어촌의 자녀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농어민 자녀를 모집 인원의 50%로 뽑는 특별 채용 정책을 도입했다. 농어촌공사 신입사원 공채에 응시하려 했던 서울 및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불만의 대상이 되어 청와대로 민원을 넣는 경우도 생겼지만, 농어촌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장 중심의 직원들을 늘리는 것이야말로 농어민을 생각하고, 공사의 피라미드 구조를 튼튼히 하는 시작점이라 믿었기에 지금까지 좋은 결실로 이어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 2012년 6월 28일 농가희망봉사단 사랑의집 고치기 행사 방문ⓒ시사오늘(사진=홍문표 의원실)

문제는 이런저런 공사 개혁을 하는 사이에 기득권을 빼앗긴 부류들로부터의 음해 또한 만만치 않다는 거였다. 내게 직접 가해지는 공갈 협박은 물론 청와대 쪽으로도 "홍문표가 돈 먹고 누구를 그 자리에 앉혔다더라" 등 나를 모함하는 투서가 동시다발적으로 보내졌다. 가끔 청와대에 올라갈 일이 있으면 이명박 대통령이 대뜸 핀잔을 주셨다. 농어촌공사 일을 어떻게 하길래 나를 겨냥한 민원들이 쏟아지느냐며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무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선 자리에서 억울한 마음을 다 토로할 수도 없어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 모 씨가 책상 서랍을 열어 보여주며 왜 그렇게 골프를 치러 다니느냐며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서랍 속에는 나를 겨냥한 투서와 증거자료들이 대여섯 건이 넘었다. 자료에는 내가 강남 모 골프장 CCTV 영상에 포착됐다며 CCTV 사진과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도면까지 상세히 그려 제출하는 등 별의별 것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억울한 누명을 당할 때의 심정이 어떤지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조작된 게 틀림없는 자료들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형님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어요”라고 말하는 모 씨의 눈에 비친 나는 그저 비리를 저지를 죄인에 불과했다. “나는 그곳에 간 적도 없어!”라고 항변했지만, 모씨의 귀에는 그저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 뿐인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금방이라도 진실을 밝힐 방법은 한 마디 말이면 충분했다. “난 골프 치지 않잖아?”

내가 골프를 치지 않고, 골프장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는 것은 모 씨도 진작부터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모 씨도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고, 나 역시 너무도 억울한 나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그저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다는 얘기만 되풀이하는 아둔함을 보인 것이다.

잠깐 샛길로 새면,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17대 국회의원 초선 시절 때부터 골프와 관련해서는 일절 상종을 하지 않았다. 젊을 때는 태권도 유도 검도 등 운동을 워낙 좋아해 미8군 시절부터 골프를 곧잘 쳤지만, 한 사건을 계기로 금연 금주하는 사람들처럼 골프 치는 운동을 딱 끊은 것이다.

나는 17대 국회의원 선거 기간 나는 충남 홍성·예산 지역민들 앞에서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농촌 지역 민심 상 양주, 양담배, 골프 등 이런 것들을 사치스럽게 여기고 있던 때라 내가 국회의원이 되면 사치스럽게 살지 않겠다는 뜻에서 지역민들에게 공표한 거였다. 그러다 여의도 국회 입성 후 딱 한 번 골프를 친 일이 있었다. 젊을 때부터 각별한 사이로 지내 왔던 선배로부터 “골프 한 번 같이 쳤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고, 평소 선배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던 나로서는 난생처음 골프치자는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 딱 한 번이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새벽 이른 시간에 태릉 골프장으로 가 잠깐이지만 즐겁게 골프를 쳤다. 오랜만에 선배와 담소를 나누며 옛 추억에 잠긴 거였다.

그런데 웬걸. 얼마 후 지역민 중 누가 상을 당해 문상을 갔는데, “골프 치지 않겠다면서 왜 골프를 쳤느냐”며 한 지역민이 대뜸 나를 질책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선배와 함께 갔던 태릉 골프장 매점 주인이 예산 지역민이었고, 이 이가 “홍문표가 골프 친다”라는 얘기를 예산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하면서 삽시간에 알려진 거였다. 정말 세상은 좁았다. 지역주민과의 약속을 단 한 순간이라도 저버리면 그것은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까지 두 번 다시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청와대 수석비서관에게 추궁당하며 사정관 실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씩씩대고만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고 곧이어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모 씨에게 전화 한 통이 왔는데, “다른 날로 잡아 한 번 칩시다”는 모 씨의 말로 미루어 짐작건대 누군가 모씨에게 골프를 치러 가자는 내용인 듯했다. 하나님 맙소사! 그 순간 ‘나는 골프를 안 치잖아?’라는 사실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가는 것이었다. 모씨가 전화를 끊는 즉시 나는“이 사람아. 나 골프 안 치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골프를 쳤다는 거야?”라고 시원 통쾌하게 말했다. 모 씨 또한 그제 서야 생각이 났는지 “맞아요. 형님 골프치지 않지 않습니까?”라고 무릎을 탁 치는 것이었다. 모 씨나 나나 완벽하게 꾸민 증거자료에만 신경 쓰느라 아주 사소하고도 단순한 진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런, 이거…. 하마터면 조작된 자료들에 속을 뻔했잖아?”나에 대한 의심을 푼 모씨는 나를 모함한 자들이 보낸 투서들의 조작 여부를 놓고 역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그랬더니 역시나 그 투서들은 조작된 것으로 판명 났고, 음해 꾼들은 법의 처벌을 받는 것으로 종결됐다.

결론은 우리 사회가 부조리하고 엉망인 것 같지만 시간이 가면 진실은 반드시 빛을 보게 된다는 거다. 길게 돌아서 왔지만, 지금 혹여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해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지금 하는 내 말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시간은 가고, 진실은 온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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